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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53화 (153/184)
  • 환생의 정석 153화

    빈첸은 델백의 목을 들고 지하에서 올라왔다.

    그 상태로 곧장 피다넬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피다넬이 보였다.

    피다넬은 빈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저를 죽이려 하였기에 베었습니다.”

    빈첸의 한마디는 장로원에 파장을 일으켰다.

    아덴카 내에서 즉시 조사단이 꾸려졌고 그들은 검흔과 지하의 흔적을 토대로 상황을 유추해 냈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먼저 검을 뽑은 자는 델백 장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시체에 남은 흔적을 살핀 뒤, 조사단원은 결론을 내렸다.

    “델백 장로는 빈첸 공자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근육의 경직도.

    검을 쥐고 있던 모양새.

    마력회로에 남은 마나흐름의 흔적.

    족적까지.

    모든 것들이 빈첸의 기습이 아님을 증명했다.

    “모든 정황들은 빈첸 공자가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대 장로 중 한 명.

    피다넬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렇다면 빈첸이 델백과의 정정당당한 검투에서 승리했단 말이냐?”

    그게 말이 되느냐?

    빈첸은 이제 겨우 열여섯의 어린애일 뿐이다.

    그런 어린애에게 어떻게 장로가 패배할 수 있단 말이냐.

    “……현장의 흔적들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그 자리에 베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말이 안 된다고 봅니까?”

    피다넬이 베르사 쪽을 바라보았다.

    “베르사 부인……!”

    “빈첸은 이미 정정당당한 검투를 통해 6성 무인 제론을 꺾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하나 델백은 장로입니다. 오른팔을 잃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장로원의 장로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덴카의 미래가 밝은 것 아니겠습니까?”

    “뭐라고요?”

    “이제 겨우 열여섯인 빈첸이 장로의 목을 베었습니다. 스무 살의 빈첸이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을 짓을 했다면 죽어야지요.”

    피다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장로를 죽인 것은 중죄입니다. 장로원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율리안이 말했다.

    -형님, 괜찮은 거겠죠?

    ‘여전히 쫄보구나.’

    -쪼는 게 정상이고, 안 쪼는 게 비정상인데요. 제가 정상이고, 형님이 비정상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낄 수 있지 않느냐?’

    -뭘요?

    ‘아버지께서 다가오고 계신다.’

    율리안은 빈첸보다 한 템포 늦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안은 그 나름대로 전율을 느꼈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잘한 것 같아요.

    베르사와 칸을 이 사건에 개입시킨 건 율리안의 계략이었다.

    물론, 이를 배짱 두둑하게 진행시킨 사람은 빈첸이었다.

    ‘너는 그냥 장로원에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께 말씀드려 도움을 얻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만 말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계략이었죠.

    ‘근데 혹시 대니얼의 딸이 장로원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고려만 해보자고 했잖아.’

    -그, 그거야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 아니겠어요?

    ‘나는 여전히 대니얼의 딸이 장로원에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율리안은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언급하여 말했고.

    빈첸은 그 가능성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진행했다.

    -그, 그래서요? 형님 똥 굵다, 뭐 이런 거예요?

    ‘내가 잘한 거지.’

    율리안은 끄응, 소리를 냈다.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별로 없었다.

    실제로 그 자신이 빈첸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런 방법은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장로원에 대니얼의 딸이 없었다면 리스크가 너무 큰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요. 형님 잘났어요.

    율리안은 조금 토라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빈첸의 칭찬에 목말라했다.

    ‘그러나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나 또한 불가능했겠지.’

    -……네?

    ‘잘했다는 뜻이다.’

    -헤헤.

    율리안은 속없이 헤실거리며 웃다가 이내, ‘그, 그런 칭찬 같은 건 하나도 안 기뻐요!’라며 속마음을 감추었다.

    그래봤자 정말로 감출 수는 없었다.

    빈첸과 율리안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율리안은 왠지 감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형님 보면서 느껴요. 2인자와 1인자의 운명은 타고나나 봐요. 나는 절대로 형님처럼은 못할 것 같아요.

    이윽고 칸이 도착했다.

    “나는 아덴카의 가주로서, 그동안 장로원의 독자적인 권위와 존엄을 이해하고 양해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을 넘었다.”

    칸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장로원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시신에는 강력한 폭발마법 수식까지도 새겨져 있었다.

    “흑색 명령을 발동할 것이니, 호법당의 무인들은 장로원을 봉쇄하고, 탈출을 탐하는 모든 자들의 목을 베어라.”

    그의 시선이 빈첸에게 향했다.

    빈첸의 손에 델백의 목이 들려 있는 것도 발견했다.

    “왜 죽였느냐?”

    “저를 베려 하기에 베었습니다.”

    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잘하였다.”

    피다넬 장로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가주! 그 무슨 말이오!”

    “나는 장로에게 발언권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칸의 눈을 마주한 피다넬 장로는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이내 칸의 시선을 피했다.

    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에 조금의 책임이라도 있는 자들은 자백하여 스스로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장로원 구석구석에 퍼졌다.

    자백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칸은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과거의 칸은 빈첸을 늘 시험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후계자로서 어떤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격을 지니고 있는지.

    ‘이제 검증은 끝났다.’

    후계자 후보들에게 가주의 검증은 늘 혹독했다.

    기준은 매우 높았고, 그 기준을 달성해도 그 다음 기준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검증을 통과한 자들에게는 신뢰가 주어졌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이번 사건을 진두지휘할 책임자로, 빈첸 아덴카를 임명하겠다.”

    칸은 후계자 후보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다.

    훌륭한 아덴카의 무인으로 성장한 아들에게 그에 걸맞은 임무를 내리는 것이었다.

    “너를 믿으마. 빈첸.”

    그가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 * *

    아직까지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아덴카 내에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장로원에서 대니얼의 딸을 납치했다.

    그를 통해 대니얼을 움직이려 들었다.

    그것을 빈첸이 포착했다.

    빈첸이 칸과 베르사에게 단독으로 보고를 올려, 결국 딸의 시신을 발견했다.

    크게 분노한 칸은 최고 명령권인 흑색명령을 발동시킨 뒤, 열여섯에 불과한 빈첸에게 조사를 맡겼다.

    이번 사태는 아덴카 내에서 파장이 굉장히 컸다.

    아덴카의 무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번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소문에 의하면 마탑에도 관련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굳이 장로원에서 그런 짓을 벌였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정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조사의 책임자가 빈첸이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장로원을 개무시하는 걸로밖에 해석이 안 되지 않아?”

    “반대로, 빈첸 공자가 그만큼 가주의 신뢰를 독차지했다고 봐도 되겠지.”

    “그건 너무 긍정적인 해석이고. 2공녀 데이아님이 맡아도 치욕스럽다고 할 장로원이잖아.”

    의견은 분분했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칸 경께서 장로원을 향한 칼을 뽑았다는 거지.”

    “선전포고나 다름없어.”

    장로원은 아덴카의 실권 대부분을 쥐고 있다.

    500년의 역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주의 무력이 독보적이라고는 하나, 세상은 무력만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빈첸 공자가 장로원에 치명적일 만큼의 뭔가를 해내지 못하면…… 가주님의 입지가 줄어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에게 일임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빈첸 공자는 어디서 뭘 하고 있대?”

    “아직은 생도 신분이어서 흑색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나 봐.”

    파성무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추었다.

    빈첸은 최대한 빠른 경로를 통해 붉은 요새로 복귀했다.

    윌슨은 걸음이 느려서 빈첸을 수행하지 못했고, 정령술사인 세리만 빈첸의 뒤에 따라붙었다.

    “공자님! 저기 보세요! 요새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요.”

    불과 3년도 안 지났다.

    그때는 바르곤 경의 시험을 통과했어야만 했었다.

    빈첸이 문 앞에서서 ‘요새의 문을 열어라’라고 직접 명령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요새의 성벽 위에 생도들이 제복을 차려입고 서 있었다.

    이미 저들은 빈첸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색기를 들어라.”

    성벽 위로 흑색기가 솟아올랐다.

    흑색기가 펄럭거렸다.

    “적색기를 들어라.”

    그 옆으로.

    2급을 상징하는 적색 깃발이.

    그 옆으로.

    3급을 상징하는 갈색 깃발.

    그 옆으로.

    4급을 상징하는 자색 깃발.

    그 옆으로.

    5급을 상징하는 청색 깃발.

    그 옆으로.

    6급을 상징하는 황색 깃발.

    그 옆으로.

    7급을 싱징하는 백색 깃발.

    7개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생도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려 빈첸의 복귀를 환영했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들어 올렸던 검을 회수하고서 빈첸을 향해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빈첸이 이루어놓은 것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세리는 괜스레 울컥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전과는 정말 다르구나.’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바로 앞에 걸어가는 빈첸의 등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세리는 눈물을 닦아내고서 빈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헤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첸 생도는 그 자리에 서서 붉은 요새 요새장의 전언을 들으라.”

    환호성이 멈추었다.

    유례없는 간이 파성식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헤르카의 배려였다.

    굳이 요새 안에 들어와서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빨랐다.

    “빈첸 생도는 붉은 요새의 생도로서, 붉은 요새의 명예를 드높였고, 생도로서 보여줄 수 있다 생각되는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에 본 요새장은, 요새장의 이름을 걸고서, 빈첸 생도가 파성무인으로 승격되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빈첸이 그 자리에 섰다.

    파성식을 진행한다는 것은 곧, 이제 빈첸은 더 이상 생도가 아니라 아덴카의 무인이라는 뜻이었다.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가슴팍에 가져다대고서 비스듬히 들었다.

    -오른손으로 쥐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헤르카 경은 내가 확실한 왼손잡이인 것을 알아.’

    그러니까 헤르카에게 진짜 예의를 보이기 위해서는 왼손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헤르카도 그것을 보았다.

    ‘짜식이.’

    헤르카는 빈첸이 대견했다.

    빈첸이 검을 든 손을 가슴팍에 대고 이쪽에 예의를 취했다.

    그게 무척 기특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벅차기도 했다.

    “가라. 가서 붉은 요새에서 배운 것들을 행동으로 증명해라.”

    솔직히 붉은 요새에서 가르친 건 별로 없긴 하지만.

    자기가 알아서 잘 컸지만.

    헤르카는 약간 찜찜하기는 했지만 일단 그렇게 말은 했다.

    “너는 이제 어엿한 파성무인이며, 아덴카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을 갈무리한 빈첸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서 몸을 돌렸다.

    “가자, 세리.”

    “이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

    복잡한 절차는 모두 간소화했다.

    새로운 제복을 받는 것도.

    새로운 검대에 배치되는 것도.

    모든 것을 일단 뒤로 미루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정확히 재조명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니까.

    정식으로 파성무인이 된 빈첸이 아덴카의 본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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