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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44화 (144/184)
  • 환생의 정석 144화

    빈첸이 말했다.

    “이미 어머니께서도 언질을 주셨습니다.”

    “베르사 언니가? 이야, 그 언니, 캐릭터가 막 흔들리네.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저를 어린아이로 생각합니다.”

    장로원은 오랜 시간 아덴카를 지배해 왔다.

    그에 반해 빈첸은 이제 갓 떠오르고 있는 신성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빈첸은 성가신 후계자 후보일 뿐, 진정한 ‘적’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게 많은 것을 쥐어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성공을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 타락하기 마련이니까요. 제 스스로가 자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좀 부족한데.”

    헤르카는 서신을 내밀었다.

    빈첸을 1급 생도도 아니라, ‘조건부 파성무인’으로 승급시키는 것이 어떻냐는 내용이었다.

    “조건 몇 가지만 충족하면 너를 곧바로 파성무인으로 만들자는 얘기야. 아주 파격적인 제안인 셈이지. 아마 3개월 내에 너는 파성무인으로 승급할 수 있게 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겨우 2년 만에 붉은 요새를 떠나는 최초의 생도로 기록될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붉은 요새의 명성을 드높였다는 것을 치하하기 위한 상금까지도 하사한다는데 그 금액이 꽤 크네.”

    “얼마입니까?”

    “1억 루덴!”

    빈첸의 놀람을 기대한 헤르카는 실망했다.

    “안 놀라?”

    “놀라야 합니까?”

    “놀라는 게 정상인데.”

    사실 빈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케르빌가가 보증하는 10억짜리 수표도 경험했었다.

    1억 루덴이 큰돈은 맞지만, 그렇다고 깜짝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헤르카가 진지하게 말했다.

    “빈첸, 네가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1억 루덴이면, 초호화 마차를 사서 으스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다? 요새장쯤 되는 내가 1년 동안 한 푼도 안 모으고 써야 1억 루덴을 겨우 모을까 말까야.”

    “능력에 비하여 봉급이 짜군요.”

    “그래! 내 말이 그 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너도 참 별나다.”

    헤르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나이에 1억 루덴이라는 큰돈이 주어지면 흥분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러나 빈첸은 평온 그 자체였다.

    “제게 성공을 쥐어주고 싶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요.”

    그를 통해 오만하게 만든 뒤, 아마도 빈틈을 찔러올 것이다.

    어떻게 빈틈을 만들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쩔 것 같은데?”

    “그들이 잘하는 것이 정치이니 짐작 가는 것들이 몇 개 있기는 합니다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빈첸이 중시하는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망가뜨리려 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장로원에 밉보이는 것이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새다?”

    “원래도 그들은 저를 싫어했습니다.”

    장로원은 애초부터 자신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태생부터 적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대가 장로원인데? 무슨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알고? 그들 손에 쓸쓸히 사라진 후계자 후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뵈었을 때 경외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과연 경외할 만한 자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장로원은 제2의 칸과 제2의 베르사가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는 무리에 불과했다.

    빈첸의 눈으로 본 장로원은 아덴카를 좀먹는 권력 집단이었다.

    “장로원은 또 다른 왕이 태어나는 것이 두려운, 겁먹은 승냥이 무리일 뿐입니다.”

    헤르카는 쿡쿡대고 웃었다.

    “패기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승냥이도 너무 좋게 쳐줬어.”

    그녀는 속 시원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사실 나도 그 늙은이들이 진짜 꼴 보기 싫었거든.”

    “…….”

    헤르카가 빈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해보라고, 혐르곤 2세, 예비 파성무인씨.”

    * * *

    붉은 요새의 생도들에게 한 가지 사실이 전달되었다.

    빈첸이 조건부 파성무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생도들 사이에서 매우 큰 이슈였다.

    “어떻게 1급도 아니고 곧바로 조건부 파성무인이 될 수가 있어?”

    “이건 우리를 전부 무시하는 처사인데.”

    “빈첸은 일대일 전투로 헤나 공녀를 이겼잖아. 파성무인을 실력으로 이겼으니 사실 과한 처사는 아니라고 봐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붉은 요새가 단순히 강한 무인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잖아.”

    거쳐야 할 과정이 있고.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어.”

    몇몇은 요새장실을 찾아 빈첸의 승급에 반대했다.

    헤르카는 귀를 후볐다.

    “아, 공문이 아직 전달이 안 됐나 보네.”

    “어떤 공문입니까?”

    “너희들 중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빈첸과 싸워.”

    “……예?”

    “빈첸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파성무인으로 올려줄게. 어때?”

    그 소식이 생도들 사이에 전해졌다.

    몇몇 생도들이 빈첸에게 덤벼들었으나 그들은 로아와 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빈첸을 단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빈첸의 검을 두 번 이상 받아낸 사람 또한 없었다.

    “다음 선배님은 누구신지요?”

    빈첸은 홍련을 든 채 자신과 겨루기 위하여 찾아온 상급 생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권태롭기까지 했다.

    벌써 7명의 검을 받아냈으나 빈첸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 나는 됐다.”

    2급 생도 중 한 명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세 분이 한꺼번에 덤벼도 됩니다.”

    그 말에 생도들은 격분했다.

    이런 도발을 듣고도 참는다면 그건 무인이라 볼 수 없었다.

    “네 이놈!”

    “제 승급이 선배들에게 무슨 피해를 끼쳤습니까?”

    빈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러한 선례를 만들어주면, 오히려 선배들에게도 좋은 것 아닙니까?”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2년 만에 파성무인으로 승급하게 되는 전례가 있다면, 후에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빈첸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옹졸함을 버리십시오. 선배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율리안이 킥킥대고 웃었다.

    -쟤네 얼굴 빨개진 거 봐요. 그러게 뭐하러 굳이 시간을 내서 이렇게 반대한다고 난리를 칠까 모르겠네요.

    그들은 속마음을 숨겼다.

    “누가 옹졸하단 말이냐?”

    “우리는 그저 승급의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다.”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그것이 명분이었다면 셋이서 함께 덤벼도 무방하겠군요. 저를 이기면 승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시렵니까?”

    “이 건방진 놈이!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1급, 2급, 3급으로 이루어진 생도무리가 공격진을 형성하여 빈첸을 공격했다.

    빈첸은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들의 검을 모조리 동강 내버렸다.

    겉으로는 한 번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열두 번을 베었다.

    생도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빈첸의 무력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저만치 멀리서 헤르카가 짝! 짝!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이야, 삼 대 일로 패했네. 이제 더 이상 딴지 걸 사람 없지?”

    그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헤르카는 킥킥대고 웃었다.

    “사실로 뼈 때리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단 말이야.”

    “요새장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 곧 파성무인인데, 그냥 누나라고 하라니까?”

    “예, 요새장님.”

    헤르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빈첸에게 임무 하달서를 전해주었다.

    “이 임무만 완수하면 파성무인으로 승급하게 될 거야. 뭐, 그 고리타분한 서류는 나중에 읽고 내가 설명해 줄게.”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현재 파견 나가 있는 3급 생도들을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마물들이 테르산맥의 길로안이라는 마을을 한참 침범했어. 그런데 거기는 사실 마물을 막아내는 마법결계가 작동하던 곳이었거든.”

    마법결계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마탑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마탑도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당장 수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나마 최대한 빨리 수리하려면 이유라도 먼저 파악해놔야 한단 말이지.”

    “그래서 3급 생도들이 파견되었군요.”

    “겸사겸사. 마물도 막아줄 겸.”

    마을을 침범하는 마물들이 그렇게 강한 마물들은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가장 강한 축에 드는 놈이 5급이었고, 보통은 6, 7급 마물이 주로 등장한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임무 하달서의 내용.”

    “숨겨진 내용이 더 있습니까?”

    “어제 들어온 직통 보고야. 마을로 도망친 놈들 중에 4급 마물이 있었대.”

    “침범이 아니라 도망입니까?”

    “그래.”

    4급 괴수종 ‘오우거’가 마을로 도망쳤다고 했다.

    오우거는 인간을 별미로 잡아먹는 거대한 괴물이다.

    괴수종답게 공포를 모르고 살육본능이 무척 강한 마물이었다.

    “놈은 마을에 들어와서 벌벌 떨었대.”

    그 오우거가 겁에 질려 있었다고 했다.

    4급 괴수종을 그렇게 만들려면 그보다 훨씬 강한 상위 포식자가 주변에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헤르카가 빈첸에게 직접 임무를 ‘설명’한 이유였다.

    헤르카가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거, 장로원에서 네게 내린 임무라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긴장 풀지는 마. 그 뱀 같은 늙은이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지 알 수 없거든.”

    * * *

    길로안은 테르 산맥이라 불리는 거대 산맥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마을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다.

    윌슨이 빈첸 뒤로 따라붙었다.

    “테르 산맥에는 진귀한 광물과 특별한 마물들이 많아서, 많은 자들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리적으로는 아덴카 가문과 6마탑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도시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헤헤,

    윌슨은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빈첸의 칭찬을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세리가 핀잔을 주었다.

    “윌슨, 시종으로서 그 정도 알아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누나는 당연함의 기준이 늘 너무 높더라.”

    “당연하지. 우리가 모시는 분이 누군지 잊었어?”

    모시는 자가 빈첸이다.

    그러니 빈첸의 격에 맞는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세리의 논리였다.

    “끄응.”

    “공자님, 사람 냄새가 느껴져요. 마을에 거의 도착한 것 같아요. 마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요.”

    세리는 뛰어난 정령술을 바탕으로 빈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꼈다.

    세리의 정령술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수고했어.”

    “별말씀을요.”

    윌슨이 쭈뼛쭈뼛 다가섰다.

    “공자님, 저도 칭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으헤헤.”

    그런데 그때, 세리가 말했다.

    “피 냄새가 나요.”

    “방향은?”

    세리는 눈을 감았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을 부려 위치를 탐색했다.

    “이쪽이요.”

    빈첸이 걸음을 멈췄다.

    나뭇가지에 찢어진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생도복이다.’

    생도복 일부가 찢어져 있었다.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걸 본 윌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무척 겁쟁이였지만 오늘은 꼭 칭찬을 받고 싶었다.

    “공자님! 여기 배지가 떨어져 있습니다!”

    3급을 상징하는 갈색 배지였다.

    무엇인가에 공격을 당한 것 같았다.

    세리가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빈첸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저, 저도 치, 칭찬 좀…… 가, 같이 가요!”

    윌슨은 황급히 빈첸의 뒤를 따랐다.

    빈첸 뒤가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빈첸은 가시덤불로 이루어진 군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안쪽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쪽인가.’

    빈첸이 홍련을 들어 가시덤불을 베었다.

    가시덤불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그 안쪽에 누군가가 있었다.

    “당신은…….”

    꼴이 엉망진창이었으나 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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