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143화 (143/184)

환생의 정석 143화

베르사는 별로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네가 드디어 장로원의 눈에 든 것 같구나.”

“축하를 해주시는 것치고는 표정이 밝지 않으십니다.”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이다.”

“정보다 단단한 돌은 정을 무디게 만들지요.”

베르사는 피식 웃었다.

생각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빈첸은 지극히 빈첸다운 방식으로 반응했다.

“장로들은 수백 년간 아덴카를 지배해 왔다. 그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베르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이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으나 너 때문에 여러 번 그 원칙이 깨지는구나. 잘 들어라.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빠르게 승급하게 될 것이다.”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생도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생도를 벗어나 파성무인이 되어, 아덴카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고 싶었다.

“장로원에서 네 승급을 적극적으로 돕겠지. 대신 네게 임무를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적당히 위험하면서 저와는 상성이 무척 나쁜 임무겠군요.”

조금씩, 조금씩, 빈첸의 평판과 명성을 갉아먹으려고 할 것이다.

빈첸 또한 그 정도는 쉽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 상상 이상으로 비열하고 치졸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다.”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어머니께서는 제게 어떤 임무가 부여될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그 질문에 대답해 주지는 않았으나 베르사는 임무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걱정이 되어 빈첸을 따로 부른 것이고.

베르사가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중요한 질문이었다.

만약 빈첸이 원하는 것이 ‘아덴카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장로원과 협력하는 게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기만 한다면 가주가 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본 빈첸의 성장세라면 분명히 가능한 일이었다.

“압도적인 강함을 원합니다.”

“가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아덴카입니다. 아덴카의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미온가(家)를 넘어서라. 그리하여 진실과 마주하라.

베르사는 담담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신념을 응원한다 말하였다.”

빈첸의 신념을 일컬어 무척이나 느린 신념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러나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신념이라고도 얘기했었다.

“여전히 그러하다. 네가 닿을 곳이 어디인지 진심으로 궁금하구나.”

빈첸은 문득,

베르사의 눈에서 기이한 감정을 읽어냈다.

저 눈은 세리의 눈동자와 지극히 닮아 있었다.

데이븐이었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시선.

그 시선이 느껴졌다.

“저를 편애하고 응원해 주시는 건, 어머니입니까, 혹은 아덴카의 두 번째 주인입니까?”

“…….”

베르사는 빈첸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녀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빈첸의 질문이 자신의 허를 찌른 듯한 느낌이었다.

빈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머니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생에서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조금 욕심이 났다.

이윽고 베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로서 말을 한 것 같다.”

이 얘기는 서신으로 전해도 되는 얘기였다.

레일사를 시키면 보안도 철저하게 유지될 테니까.

굳이 직접 찾아와서 얘기한 것은, 아마도 빈첸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 스스로 그 마음을 처음 깨달았다.

“이것을 받거라.”

빈첸은 동그란 알약 형태의 무언가를 받았다.

붉은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석 같기도 했고 마정석 같기도 했다.

도합 다섯 알이었다.

“용혈환이다. 용의 피를 환의 형태로 빚은 것이지. 흑색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고.”

“아마도 제가 받게 될 임무와 관련이 있겠군요.”

베르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빈첸이 다른 말을 꺼냈다.

“용혈에 어떤 효능이 있습니까? 환의 형태로 빚어 흑색 등급 금고에 보관하셨다면 상당한 귀중한 보물일 텐데요.”

“꾸준히 섭취한다면, 만 가지의 독이 네 몸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다섯 알이면 그 정도 성취를 이루기는 어려우나 반년 정도는 네 몸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베르사에게 용혈환을 돌려주었다.

“저는 아마도 이미 그것을 이룬 듯합니다.”

“자만하지 말거라.”

베르사는 빈첸의 ‘지나치게 빠른 성취’를 걱정했다.

보통 저렇게 빠르게 성장한 자들은 자만에 빠지기 쉽고, 빨리 올라간 만큼 더 처참하게 망가진다.

“용을 만났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만났던 용, 아넬린을요.”

“용이 이름을 가르쳐주었느냐?”

“예.”

“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그 용은 어떻게 되었느냐?”

“제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아넬린이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빈첸은 자신이 용혈을 꾸준히 섭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넬린의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자신의 체내에서도 느껴졌으니까.

그 마나는 한데 어우러져 빈첸의 심장에 녹아들어 있다.

“어머니께서 원하신다면, 그 유산을 확인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됐다.”

베르사는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을 경험해 본 베르사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빈첸은 오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담담히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무학의 성취만 있었던 것이 아니구나.”

베르사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가볍게 웃은 것이지만, 최근 10년 중 가장 큰 미소였다.

“나를 어디까지 놀라게 할 참이냐? 내 걱정은 기우였던 듯싶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모습을 본 빈첸도 덩달아 웃었다.

“그 기우가 제게는 기쁨이라고 말한다면 나무라실 겁니까?”

“실없는 소리를 하는군.”

베르사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빈첸이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 용혈환 대신, 다른 선물을 주시면 안 됩니까?”

빈첸의 얼굴은 무척 뻔뻔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

“있습니다.”

“주지 않겠다면?”

“그럼 용혈을 받은 뒤 팔아서 돈으로 바꾸겠습니다.”

“네 어머니의 선물을 말이냐?”

“그렇게라도 용이하게 쓰는 것이 아들의 옳은 도리 아니겠습니까?”

빈첸은 다시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니 다른 선물을 좀 주십시오.”

“뻔뻔하구나.”

“제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뭘 원하는지 들어나 보지.”

빈첸이 원하는 것은 ‘흑색 등급 금고’의 사용권이었다.

“성배 말고도 보관할 것이 생겨서 말입니다. 부피가 상당합니다.”

“꽤 거창한 것을 원하는구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감사합니다.”

빈첸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이룬 듯한 모양새였다.

약간은 얄밉기까지 했다.

“한 번을 빼질 않는구나.”

“상황이 이쯤 됐는데 빼는 것이 더 이상한 것 같습니다. 혹여 그러길 바라셨습니까?”

“한 번쯤 겸양은 떨 줄 알았지.”

“다음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퍽도 그렇게 하겠구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 성격.

뻔뻔하게 자신의 것을 쥘 수 있는 저 성격.

베르사는 빈첸의 이러한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첫째는 그것이 지나쳐 남을 파괴하여서라도 갖고자 하고.’

첫째는 욕심이 지나치다.

둘째는 욕심이 너무 없다.

‘둘째는 무력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일절 없으니.’

그러니 빈첸 정도가 딱 좋았다.

“제가 맡길 것은 이것입니다.”

“…….”

베르사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첸의 아공간에서 거대한 것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 부피의 뼈를 보관하고 있으려면, 상당한 마나를 소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게 무척 소중한 자이자 제 스승님이 남긴 마지막 것이니,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관하고 싶었습니다.”

빈첸이 흑색 등급 금고에 맡기고자한 것은 아넬린이 남겨준 용골이었다.

* * *

디르미델은 요즘 무척 기분이 좋았다.

최근 3일은, 작업장보다 맥주가게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그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소식지들을 수집하여 읽는 것이었다.

“이것 봐라, 한센.”

“왜 또 바쁜 사람 오라가라냐?”

“여기, 내 이름이 실렸다.”

최근 빈첸이 또 한 차례 돌풍을 일으켰다.

붉은 요새 8급 생도 신분으로서 그보다 강한 상급 생도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렸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3공녀인 헤나까지 넘어섰으니 이는 실로 충격적인 얘기였다.

“이 정도면 최연소 1급 무인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해. 어쩌면 곧바로 파성무인이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최연소 각명에, 혁명대의 영웅, 최연소 파성무인, 그 자의 성취가 내 덕분이라고 여기 딱, 명시되어 있지 않느냐?”

사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빈첸에게 가 있었다.

디르미델에 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빈첸이 ‘제가 보다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신 디르미델, 한센 야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디르미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잘 봐. 여기. 내 이름이 앞이냐, 뒤냐?”

“…….”

“내가 앞이자너~ 우헤헤헤헤! 눼가 이겨뜨아!”

한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새끼, 한 잔에 취했네.”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주량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디르미델의 혀가 많이 꼬부라져 있었다.

“내 이름이 앞이다. 나를 먼저 언급했어.”

“……그래, 축하한다.”

쾅!

소리가 났다.

디르미델의 고개가 고꾸라지면서 탁자와 부딪쳐버린 것이었다.

작업에 치여서 소식지를 확인하지 못했던 한센은 그제야 수북이 쌓여 있는 각종 소식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구나.’

* * *

검투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빈첸은 여전히 8급 생도의 신분이었다.

헤르카는 고심했다.

“그래도, 보여준 게 너무 뛰어나니까 최소 1급으로는 올려야 할 텐데.”

빈첸이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 제 자신을 빛냈으니, 서류작업만 진행하면 된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빈첸이 헤르카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장로원 늙은이들이 염병을 엄청 떨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염병이라니요?”

“네가 최연소 1급 생도가 되면 걔네는 되게 싫을걸? 최연소는 데이아가 가지길 바랄 거야. 데이아가 17살에 1급 생도가 됐거든.”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헤르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르곤 2세의 생각은 어떤데?”

“멀지 않은 미래에 서신이 도착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때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다리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마법 통신소에서 날려보낸 비둘기가 틀림없었다.

“이게 진짜 장로원에서 온 서신이면, 나 진짜 너 혐오할 거야.”

헤르카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나 너를 혐오하기로 했어. 너는 이제 혐르곤 2세야.”

“장로원에서 온 서신입니까?”

“그래.”

“제 생각이 맞다면…….”

“나 너를 더 혐오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저를 1급 생도 혹은 파성무인 정도로 승급시키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서일 것 같습니다.”

서신의 내용을 살펴본 헤르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