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42화
전에는 1급 대표생도였으나 이제는 파성무인이 되어 붉은요새를 떠난 여인.
헤나가 이곳에 있었다.
헤나는 이제 어엿한 아덴카의 무인.
헤르카는 그녀를 ‘경’이라 호칭했다.
“헤나 경이 싸우겠다고? 요?”
“예.”
“얻을 건 별로 없고, 잃을 것만 많아 보이는데?”
헤나는 빈첸을 이겨야 한다.
상식적으로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겨도 본전, 혹여 지기라도 한다면 망신이다.
“그걸 헤나 경이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요, 뭐. 마음대로 해. 아참, 이게 바르곤 2세 녀석의 치밀한 계획이고 설계라는 사실도 이미 눈치챘죠?”
“네.”
결국 헤나는 헤르카의 허락을 얻어 연무장의 무대 위로 올라섰다.
바람소리의 마리아 기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생도가 아니라 진짜 무인이야.”
데미안이나 아벨은 패배해도 괜찮다.
그들은 아직 생도신분이었으니까.
그러나 헤나는 다르다.
그녀에게는 ‘생도 신분’이라는 면죄부가 없었다.
“설마 빈첸 공자가 헤나 경까지 이기지는 못하겠죠?”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되지.”
데이아 공녀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헤나도 뛰어난 자질을 가진 무인이었다.
“근데 빈첸 공자가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사실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거든.”
다른 사람들이 승패에 집중할 때.
마리아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헤나가 왜 굳이 얻을 것이 없는 이 검투에 몸을 내던졌느냐, 그거야.”
“하극상을 일으킨 빈첸에게, 손위 누이로서 가문의 기강을 잡아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피도 눈물도 없다는 인형이?”
대외적으로 헤나는 여전히 ‘인형’이라 불렸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
“그게 뭘까요?”
“어쩌면 헤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나 해보았다.
“빈첸에게 패배하기 위해서 저 자리에 오른 게 아닐까?”
한편,
헤나가 빈첸 앞에 섰다.
“오랜만이구나.”
“누님. 미리 찾아뵈어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새 많이 컸구나.”
헤나는 빈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빈첸이 헤나와 다른 시간을 보내왔다는 것도 알았다.
“나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
“넘어서려 노력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보아라.”
“넘어서겠습니다.”
그때, 헤나가 빙그레 웃었다.
마리아가 황급히 말했다.
“줌! 줌! 줌 땡겨!”
‘인형’ 헤나가 빈첸 앞에서 웃고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안 들리지?”
“네.”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헤나와 빈첸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헤나가 말했다.
“이곳이 내게는 무척 치욕스러운 자리가 되겠구나.”
“누님께서 나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언젠가는 헤나를 꺾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은 아니기를 바랐다.
빈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처럼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이냐?”
헤나는 빈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작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빈첸이 자신마저 이겨낸다면, 빈첸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것이다.
“8급 생도의 신분으로 파성무인을 꺾은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여 네가 나를 이긴다면, 너는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빈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최선을 다하여 주십시오.”
“너도 최선을 다하거라.”
둘의 검이 맞닿았다.
제론은 어안이 벙벙했다.
생도와 생도의 검투를 넘어서, 이제는 생도와 파성무인의 검투까지 오게 됐다.
‘긴장 바짝 해야겠는데.’
제론이 둘의 검투 시작을 알렸다.
* * *
빈첸은 여지껏 모든 공방을 ‘보통공방’으로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누님의 검은 빠르다.’
아밀룬 제3검식.
중검첩방.
생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검을 일일이 막는 것은 포기하고서, 중검첩방으로 헤나의 검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빈첸은 검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
아덴카 정검 기본 1식.
반월 베기.
빈첸이 처음으로 검식을 사용했다.
아덴카 특유의 마나 흐름으로 마나를 유도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검흔이 자리 잡았다.
마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검기!’
빈첸은 분명 검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헤나는 공중제비를 돌듯 재빠르게 빈첸의 검을 피해내고 거리를 벌렸다.
헤나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공중에 휘날렸다.
“단순한 검에 수많은 묘리가 녹아들어 있구나.”
빈첸의 검로는 단순했다.
그러나 검에 담긴 무학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무엇이 담긴 것이냐?”
“제 또 다른 스승께서는 이를 일컬어 초월검격이라 하였습니다.”
기회만 생긴다면 언제든지 초월검격을 운용할 수 있다.
천과를 통해 회복한 천골의 신체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세르쿤에게 배운 역용이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초월검격. 좋은 이름이다.”
그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직접 체감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닿기만 해도, 자신의 검이 부서질 것만 같은 묘한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빈첸의 성장이 기꺼웠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헤나의 맹렬한 공세였다.
무인이 아닌 마리아의 눈으로 보면 그랬다.
그녀는 조심스레 헤르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요새장님.”
“아이, 깜짝이야!”
헤르카가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마리아는 더욱 놀랐다.
‘헤르카 요새장이 내 기척을 못 읽는다는 게 말이 돼?’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헤르카가 기절해 있거나 아니면 기절에 준한 수준으로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야 가능했다.
‘지금의 저 대련에 그만큼 집중하고 있는 거구나.’
자세히 보니 헤르카는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자세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헤르카마저도 크게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 눈으로는 저 공방을 해석하기가 어려워서 요새장님께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음.”
헤르카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조금 더 압도적이네요.”
“네?”
마리아는 얼른 수첩을 꺼내 필기하기 시작했다.
“역시 파성무인은 격이 다르다, 이 말씀이신가요?”
“아뇨. 그 반대죠.”
헤르카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마리아가 그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이동시켰다.
“응?”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땅에 떨어뜨렸다.
헤나의 검이 두 동강 나 있었다.
빈첸의 홍련이 헤나의 목에 닿아 있었다.
검투장에 모인 생도들은 침묵했다.
8급 생도가 파성무인을 제압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스, 승자는 빈첸! 빈첸 생도입니다!”
격렬한 공방 속에, 헤나는 약간의 부상을 입은 듯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빈첸은 홍련을 갈무리했다.
-뭐해요? 부축 안 해줘요? 다리를 크게 베였잖아요.
‘그건 누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피가 꽤 많이 났다.
헤나는 자신의 옷 일부를 뜯어 지혈한 뒤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나가 말했다.
“기쁘구나.”
그녀는 빈첸의 성장이 기뻤다.
빈첸이 일부러 목소리에 마나를 담았다.
마리아 기자에게도 목소리가 충분히 닿도록.
“누님께서 생명을 담보로 저를 구명하여주셨었습니다.”
천과를 흡수할 때를 뜻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때 헤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빈첸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누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습니다.”
헤나가 빙그레 웃었다.
“잘했다.”
* * *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수백 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각종 소식지에서 빈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신성의 도약.]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신성.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빈첸의 활약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덴카의 장로원은 빈첸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말론은 그렇다 치고. 데미안은 그렇다 치고. 아벨 놈은 겁먹었고. 헤나는 보기 좋게 패배해 버렸소. 아주 난리가 난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빈첸을 후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빈첸이 후계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장로원의 꼴이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빈첸의 자질을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손가락질만 받게 생겼다.
장로원 장로들의 안목이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빈첸은 데이아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열여섯의 빈첸이, 열여섯의 데이아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아덴카의 경사일지도 모릅니다.”
“헛소리좀 작작 하시오!”
아덴카 장로들 중에서도 실세 중 실세.
‘4대 장로’ 중 한 명인 피다넬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빈첸 그놈은 지나치게 오만하고 장로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성정을 지녔소. 델백 장로가 그놈 때문에 팔을 잃게 된 것을 잊었단 말입니까?”
빈첸을 옹호하려던 장로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가는 역적으로 몰리게 생겼으니까.
“장로원이야말로 아덴카를 이끌어가는 견인마차요. 우리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소.”
장로들 모두가 저 말의 의미를 알았다.
역사적으로, 아덴카는 가주보다 장로원의 권위가 더 높았다.
가주는 아덴카의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
그 외 가문의 실질적인 모든 것들은 장로원에서 주재한다.
즉, 실권은 장로원이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최근에 조금 바뀌었다.
“현 가주는 장로원에 무척 비협조적이지.”
그것은 장로원으로서도 매우 골칫거리였다.
꼭두각시 노릇을 해주었던 역대 가주들과는 많이 달랐다.
“게다가 베르사까지 그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으니.”
피다넬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 가주인 칸과 베르사 부인은 장로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빈첸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제2의 칸, 제3의 칸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될 거요.”
칸은 이미 너무 컸다.
그를 보좌하는 베르사도 지나치게 유능했다.
현 장로원의 힘으로는 그들을 억압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밟을 수 있을 때 밟아놔야 한다는 소리요.”
“회유하여 저희 밑에 두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오만한 성정 때문에 그건 어려울 거요.”
아까 빈첸을 옹호하는 말을 꺼냈던 신입 장로 테일린은 말하고 싶었다.
‘오만한 것이 아니라 올곧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감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장로원은 이미 빈첸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1공자 혹은 2공녀를 가주로 앉혀야 합니다.”
1공자는 욕심이 많다.
2공녀는 무학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둘은 다른 의미로, 장로원에서 쉽게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장로들은 회의를 이어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장로들이 원탁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을 무렵.
빈첸은 8급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헤르카가 8급 생활관을 찾았다.
“바르곤 2세야. 너 찾아온 손님 있다.”
“손님이요?”
빈첸을 찾아온 사람은 베르사였다.
베르사가 제안했다.
“가볍게, 산책 한 바퀴 하겠느냐?”
“좋습니다.”
“보폭을 맞추어 걸으려무나.”
“알겠습니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생활관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베르사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빈첸은 설상걸음을 운용하여 베르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머니는 역시, 빠르시군.’
과연 8성 무인답게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적이 없는 공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베르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산책치고, 지나치게 걸음이 빠르시군요.”
“지나치게 걸음이 빠른 것 치고는, 아주 잘 따라오는구나.”
빈첸에게서는 지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빈첸의 어마어마한 성장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베르사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빈첸이 물었다.
“저를 긴히 찾으신 이유가 있으시지요?”
베르사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