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40화
헤르카의 적극적인 주선 아래, 빈첸과 로아의 검투 일정이 잡혔다.
일주일 후.
붉은 요새의 대연무장에서 검투가 치러지게 되었다.
“바르곤 경. 바르곤 경은 왜 안 나가? 나한테 고백이라도 할 참인가?”
“머리에 마탄 맞았습니까? 요새장님께 고백을 왜 합니까?”
평소에는 무척 침착한 바르곤이지만 요새장 헤르카가 얽혀 있으면 일단 말이 험하게 나가고 봤다.
그것은 숱한 야근과 일 떠넘기기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르카도 바르곤의 말들을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왜? 나 정도면 꽤 훌륭하잖아?”
헤르카는 무인다운 움직임으로 스르르 움직여 바르곤의 뒤를 점했다.
바르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붙였다.
이러면 바르곤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르곤 경이 제법 마음에 드는데. 바르곤 경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장난은 그만 치십시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뭐가?”
“빈첸과 로아의 검투 말입니다.”
헤르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둘의 검투를 진행했을 리는 없었다.
“에이, 바르곤 경은 내게 무슨 꿍꿍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예. 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일주일 뒤로 잡을 이유는 없었다.
헤르카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바르곤 경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마 일을 크게 벌이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맞아. 정확해.”
“그러니까, 어째서입니까?”
“빈첸을 갑자기 승급시켜버리면 반발이 심할 게 뻔하니까?”
“…….”
“빈첸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말이야, 순식간에 뭐 한 1급쯤으로 올라가 버리면 말이 되겠어? 그건 전통에도 위배되고, 형평성에도 안 맞잖아. 내가 독단적으로 그런 걸 진행했다가는…….”
헤르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작성해야 할 서류가 수십 장은 될걸. 장로원 그 늙다리들이 나를 얼마나 들들 볶을지도 뻔하고.”
“…….”
“그러니까 이참에 빈첸과 로아의 검투를 아주 크게 벌여서, 빈첸의 실력을 모두 앞에서 완벽히 증명해 주면 좋지 않겠어? 나는 칸 오라버니한테도 서신을 보낼 작정이거든.”
헤르카는 실실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었다.
“칸 오라버니가 오면? 베르사 언니도 오겠지? 그리고 잘 생각해 봐. 레이븐이 7급인가? 아무튼 레이븐도 당연히 참관할 테고? 그러면 바르티칸의 가주까지도 올 수도 있잖아.”
예전 빈첸이 일을 크게 벌였던 것과 비슷했다.
결국 헤르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빈첸의 무위를 증명하고, 이를 통해 반발 없이 빠른 승급을 시켜주려는 계획이었다.
“바르곤 경. 화내지 마. 나는 절대로 서류 작성하기 싫어서 그런…….”
“드물게 좋은 생각이군요.”
“그러니까…… 응? 바르곤 경, 지금 뭐라고 했어?”
“제법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곤의 잔소리 폭격이 두려웠던 헤르카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거봐, 내가 할 때는 또 하는 요새장이라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빈첸이 그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여야 할 텐데 말입니다.”
바르곤은 빈첸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법사였다.
본질적으로 무인의 성취를 무인만큼 정확히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런 건 아주 사소한 걱정이야, 바르곤 경.”
“요새장님이 그렇게 확신하니 오히려 믿음이 안 갑니다.”
“왜?”
“진짜 몰라서 묻습니까?”
“아니, 알지.”
“인정은 빨라서 다행입니다.”
“인정이라도 빠르지 않았다면 바르곤 경이 날 독살했을걸?”
“잘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바르곤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빈첸도 요새장님의 생각을 읽었을까요?”
“당연하지.”
헤르카가 본 빈첸은 결코 무위만 뛰어난 멍청이가 아니었다.
헤르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걔가 가끔 바르곤 경보다 더 무섭더라.”
“예?”
“나는 말이야. 가끔 걔가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설마요.”
“설마가 아냐.”
“…….”
헤르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로아와의 검투판을 크게 벌여놨잖아. 근데 빈첸은 겨우 그 정도로 안 끝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 * *
6일이 흘렀다.
빈첸과 로아의 검투 소식은 꽤 빠르게 전해졌다.
사실 빈첸은 아덴카의 ‘7공자’에 불과했고, 로아는 ‘8공녀’였다.
본래대로라면 후계경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제1소식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바람소리의 마리아 최고 수석기자는 재빨리 움직였다.
“행방을 감췄던 빈첸 공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예. 2년만입니다. 제보에 의하면 키와 골격은 물론이거니와 분위기마저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가야지. 얼른 준비해.”
“하, 하지만 그 날에는 쿨리안 가문의 가주와 인터뷰가…….”
“대타 보내.”
“최, 최고 수석기자님.”
“상대가 빈첸 공자잖아. 나는 쿨리안가가 아니라 사미온가 가주와의 인터뷰가 있었어도 뺐을 거야.”
“…….”
검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
마리아는 빈첸과 만났다.
“오랜만이군요, 빈첸 공자!”
마리아는 빈첸에게 작은 선물 상자를 건넸다.
데르마쿤 지방의 특산품인 다크 초콜릿이었다.
“많이 달라졌다더니 정말이군요. 몰라보겠어요.”
마리아는 빈첸의 외양에 감탄하고 말았다.
열넷의 어린 생도는 온데간데없고, 건장한 청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제가 무엇을 중점적으로 취재하면 될까요?”
“검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빈첸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마리아는 깊게 탄식했다.
“친선교류회에서 빈첸 공자를 만난 것은 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군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아뇨.”
빈첸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때마침 달빛이 빈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마리아는 넋 놓고 빈첸을 바라보았다.
“마리아 기자님께서 가장 먼저 저를 찾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저야말로,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빈첸의 태도는 지극히 귀공자다웠고 겸손했다.
빈첸은 인터뷰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빈첸을 넋 놓고 바라보던 마리아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 날, 빈첸 공자가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는군요.”
예전,
빈첸이 가르쳐주었었다.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무엇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물었다.
“빈첸 공자는 이제 무엇을 거실 생각입니까?”
빈첸은 잠시 고민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빈첸은 입을 열었다.
“진실을 걸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하루가 흘렀다.
붉은 요새가 떠들썩해졌다.
“빈첸이 8급 생도가 된 것이 벌써 2년 전이지?”
“그래. 서류상으로는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7급 생도라고 봐야지.”
빈첸의 상대는 8급 대표생도 로아 아덴카.
5년쯤 전, 빈첸이 로아의 뺨을 맞고 울었다는 사실은 아주 유명했다.
“이번에도 아덴카의 가주께서 참관하러 오신다나 봐.”
이례적인 일이었다.
겨우 일주일밖에 기한이 남지 않은 행사에, 그것도 어린 생도들의 검투에 가주가 직접 찾아오다니.
“베르사 부인께서도 함께 오신다나 봐.”
“진짜?”
칸과 베르사가 함께 움직였다.
그에 따라 아덴카 장로원의 장로들 몇이 붉은 요새를 찾았다.
당연히 집합 가능한 모든 생도들이 대연무장에 모였다.
“저는 아덴카의 백색검대에서 파견되어 중재무인을 맡게 된 제론입니다.”
이것은 제론이 자원한 일이었다.
제론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사실 그도 빈첸의 성장을 정확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빈첸은 심상이론을 익히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대략적인 기세는 읽어냈었다.
‘기세가 흐릿하다.’
예전보다 훨씬 유해졌다.
다른 말로 하면, 빈첸의 기세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제론이 빈첸과 로아 가운데 섰다.
제론은 긴장했다.
‘지금 빈첸 공자님의 성취를 읽을 수 없다. 어쩌면, 최선을 다해도 불상사를 막기 어려울지도 몰라.’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저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까?”
제론은 과거 진검회동에서의 실수를 떠올렸다.
그는 방심한 나머지, 빈첸의 검을 제대로 막지 못했었다.
그래서 레반 아덴카가 팔을 잃었었고.
“최선을 다할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하도록.”
그 말에 제론은 약간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빈첸은 지극히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로아는 달랐다.
로아는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빈첸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아가 외쳤다.
“검을 들어!”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로아. 네가 나를 증명하라고 얘기했었다. 맞느냐?”
“그래. 그러니 어서 검을 들어.”
그녀는 당장에라도 검을 맞대고 싶어 했다.
그녀의 승부욕과 다짐은 남달랐다.
칸과 베르사까지 왔으니, 절대로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로아. 너는 네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구나.”
“뭐?”
“나를 증명하기에, 네 그릇이 너무 작다는 뜻이다.”
빈첸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윌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6성 무인인 제론에게도 할 말을 하는 용감한 시종이 되었지만, 8급 생도 로아는 무서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흑향목 목검입니다.”
윌슨은 빈첸에게 얼른 목검을 전해준 뒤 얼른 줄행랑을 쳤다.
빈첸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왼손이었다.
“진검회동의 날에, 나는 네 가지 핸디캡을 떠안았었다.”
목검.
좌수.
후공.
부동.
“오늘은 후공을 제외한 세 가지 핸디캡을 떠안겠다.”
이번에는 ‘후공’을 빼기로 했다.
율리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좌수도 빼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님 원래 왼손잡이잖아요.
빈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율리안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얼른 홍련을 뽑아!”
“홍련에 어울리는 격을 갖춘 이후에 그리 말하거라.”
빈첸이 제론을 바라보았다.
“중재무인 제론. 그대는 내가 목검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가?”
“그렇게 하십시오.”
“그게 무슨!”
로아가 반발했으나 이미 중재무인이 허락한 상황.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검을 뽑았다.
“서로의 검을 맞대고 서로에 대한 예를 취하십시오.”
빈첸의 목검과 로아의 검이 맞닿았다.
“8급 대표생도 로아, 8급 일반생도 빈첸. 두 생도의 명예로운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제론이 검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검투는 무척이나 싱겁게 끝이 났다.
“힐트(*검의 손잡이)만 남은 것으로 무얼 하느냐?”
빈첸의 말대로 빈첸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아직 한 걸음을 떼기 전.
로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응?’
검을 휘두르려던 로아는 문득 자신의 검이 무척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검의 형태는 멀쩡했다.
그런데 이 가벼운 감각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뭐, 뭐야?’
쨍그랑-!
로아의 검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로아는 빈첸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빈첸은 분명 제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로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검이 왜……?’
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살 난 검과 빈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