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39화
빈첸은 아넬린이 남긴 용골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묵념했다.
이후, 아공간에서 상자를 꺼냈다.
네디아의 비급을 품고 있었던 그 상자였다.
빈첸은 용골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상자에 조심스레 담았다.
아넬린의 유산을 받아드는 빈첸의 태도는 경건하기까지 했다.
‘바깥 공기가 느껴지는구나.’
빈첸의 기준으로는 6년의 시간이 흘렀다.
6년 만에 맡는 바깥세상의 공기는 상쾌했다.
‘수기(水氣)가 느껴지지 않는군.’
밖으로 나갔을 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폭포가 메말라 있었다.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던 폭포조개도 사라졌다.
율리안은 허탈한 듯 웃었다.
-허허허허, 폭포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 진짜네.
‘이건 뭘 의미하느냐?’
-뭐긴요. 이 거대한 폭포가 인공폭포였다는 뜻이죠. 자연에 스스로 존재하던 것이, 그것도 엄청나게 급격한 기후변화 같은 것도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릴 수는 없잖아요.
빈첸은 서신을 통해 바깥세상과 계속 교류해 왔다.
특별한 이상기후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런데 폭포의 물이 메말라버렸다.
애초에 이 폭포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를 위해 존재하던 것이 그 소명을 다하고 사라진 것 같아요. 도대체 이 정도 규모의 폭포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면 뭘 어떻게 하면 되죠? 그것도 500년이나 유지되려면…….
율리안의 계산에 의하면 이것은 마법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거의 물의 정령왕급, 혹은 정령신쯤 되는 존재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어쨌든 폭포는 말라버렸다.
폭포는 이제 폭포가 아니라 절벽이 되어 있었다.
절벽 중간 즈음에는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마나를 끌어올려 검기를 홍련에 덧씌웠다.
무심한 듯 휘둘렀다.
쏴아아-
홍련에 담겼던 검기가 동굴을 향해 쏘아졌다.
절벽에 가로로 긴 검상이 새겨졌다.
-뭐한 거예요?
‘용은 마나로 돌아간 곳에는 오랜 기간 마나가 깃든다. 희귀한 광물과 마정석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지.’
그렇기에 도굴꾼이 들끓기도 한다.
이내,
쿠구구구구궁-!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율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빈첸이 쏘아냈던 검기의 크기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검흔이…….
그런데 절벽에 남은 검흔이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빈첸이 절벽을 통째로 반으로 갈라버린 듯했다.
-방금 그냥 평범한 일격 아니었어요?
‘검기를 머금었으니 평범한 건 아니었지.’
-아니, 이 형님아,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마나흐름을 활용한 검식을 사용한 건 아니잖아요. 말하자면 그냥 휘두르기에 마나 덧입힌 거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절벽을 반으로 갈라버렸네.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절벽이 무슨 푸딩인 줄.
빈첸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위를 뽐내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가 흡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반지의 공간 속에서는 본인의 성취를 제대로 체감하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당신, 빈첸, 공자?”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땅 밑이었다.
빈첸은 그 목소리가 제법 익숙했다.
-폭폭인가 봐요. 귀여운 맛이 좀 사라졌네요, 쩝.
두더지 형태의 정령.
세리가 다루는 정령인 폭폭이였다.
예전보다 그 크기가 훨씬 커졌고 제법 날렵해져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어휘도 전보다 다양해진 것 같았다.
“너는 폭폭이군.”
“나. 폭폭. 아님.”
폭폭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양팔을 교차하여 ‘X’자를 만들어 보였다.
발톱이 꽤 길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 강한. 폭폭. 강폭폭.”
아무래도 세리가 앞에 ‘강’을 붙여준 모양이었다.
폭폭이는 그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강폭폭. 인사. 완료. 주인. 복귀.”
폭폭이는 오른손을 이마에 대었다.
마치 경례를 하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땅 밑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복귀했음을 알리러 가는 모양이구나.”
-세리의 정령술 실력이 엄청 높아진 모양이에요.
“그러게나 말이다.”
빈첸은 나일폭포를 벗어나 붉은 요새로 복귀했다.
빈첸은 기척을 죽이고서 요새장실을 찾았다.
똑똑-
노크했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도대체, 누구야, 암살자냐?”
콰광!
문이 박살 났다.
헤르카의 채찍이 문을 부수고 빈첸의 몸을 감쌌다.
“엥?”
“8급 생도 빈첸, 복귀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엥?”
헤르카는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빈첸의 몸을 옥죈 채찍을 풀지 않았다.
“암살자가 아니네?”
“8급 생도, 빈첸입니다.”
헤르카는 눈을 꿈뻑이다가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너, 안 다쳤어?”
“예, 다행히도요.”
헤르카의 채찍은 어지간한 검날보다 훨씬 날카롭고 예리했다.
빈첸은 그러한 헤르카의 채찍을 몸에 감고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제야 헤르카가 채찍을 회수했다.
“아니, 요새장실에 이렇게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접근하는 놈들은 자객밖에 없단 말이지.”
“어떤 덜떨어진 자객이 노크를 하고 들어온단 말입니까?”
“그건 그렇네?”
헤르카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빈첸 앞으로 걸어와 빈첸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2년 동안 아주 훌쩍 컸네. 이제 사내라고 말해도 되겠어.”
사실상 2년이 아니라 6년이었다.
그것도 성장에 무척이나 유리한 환경에서 6년을 성장했다.
외양적으로는 성인과 똑같았다.
“붉은 요새로 돌아온 걸 환영하기는 하는데.”
헤르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를 생도라고 해도 될까?”
“저는 아직 8급 생도입니다.”
“그렇지. 너는 8급 생도지. 1급 생도들이 떼로 덤벼도 우습게 해치울 수 있는 8급 생도.”
헤르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 뭔 놈의 수련을 했길래 애가 이렇게 된담.
그녀는 홀로 중얼거리다가 투덜거렸다.
“파성무인으로 바로 승격시켜야 할 거 같은데. 여태껏 그런 경우는 없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내가 이례적인 거 싫어한다고 말했냐, 안 했냐?”
“했습니다.”
관습에서 벗어난 것.
이례적인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많은 서류들과 절차가 필요하다.
수백 년을 지켜온 전통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너를 파성무인으로 승격시켜버리면 반발도 만만치 않을 거고.”
“압니다.”
“그렇다고 일반 생도들과 같이 뭘 시킬 수도 없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생각해 봐라, 너랑 같이 임무 수행하면, 걔들이 뭘 성장할 수 있겠어? 그저 우와, 빈첸은 정말 격이 다르구나, 엄청 세구나, 구경이나 하겠지. 아무튼 너랑은 같이 아무것도 못 시켜.”
“…….”
빈첸은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얘 봐라, 부정도 안 하네.”
“겸손도 과하면 독이라고 누가 가르쳐주셔서요.”
“일단 8급 생활관…… 에…….”
헤르카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빈첸을 과연 8급 생활관으로 보내는 것이 맞나 싶었지만 당장은 별수 없었다.
“하, 8급 생활관에서 대기해. 네 자리 있으니까.”
“불편해 보시는군요.”
“책임자 입장에서, 편하겠냐?”
“그러면 본가에 복귀하여 보고를 올리고 오겠습니다.”
“오, 그럴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본가로 꺼져 버려, 이레귤러. 아, 아니다. 잠깐만.”
헤르카는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했다.
“여기서 기다려. 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이내 두 사람이 요새장실로 들어왔다.
한 명은 바르곤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윌슨이었다.
“부요새장님.”
“……빈첸 공자입니까?”
바르곤은 저도 모르게 ‘빈첸 공자’라고 불렀다.
바르곤의 얼굴이 붉어졌고 헤르카가 풉!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짐짓 호통을 쳤다.
“엣헴, 부요새장! 그 도대체 무슨 추태인가! 생도에게 공자라며 존대를 하다니! 부요새장의 체통이 흔들리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방금 이를 꽈득 깨문 것 같은데.”
“아닙니다.”
“붉은 요새의 체면을 손상시킨 건 부요새장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
헤르카는 오랜만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흐흐흐 웃었다.
그간 바르곤에게 당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바르곤과 인사를 나눴다.
뒤에서 눈치 보고 있던 윌슨이 빈첸 앞에 납작 엎드렸다.
“공자님의, 유, 일, 한, 시종 윌슨이 인사 올립니다! 옥체 강명하셨습니까?”
원칙주의자 바르곤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정정해 주었다.
“강명 아니고 강녕.”
“옥체 강녕하셨습니까? 유일시종 윌슨을 잊고 계셨던 건 아니시겠지요? 저는 공자님을 기리며 공자님을 다시 시중들기 위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뱃살이 두툼하게 오르기는 했지만 빈첸은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윌슨이 빈첸 자신을 반가워하는 것만은 진심인 듯했으니까.
“바르곤 경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을 무렵.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빈첸은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요새장님, 임무 완료 보고를…… 아, 손님이 계셨군요. 추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냐, 들어와. 얘도 8급 생도야.”
요새장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다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빈첸은 저 여자아이가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8급 대표생도 로아, 요새장님께 보고 올립…….”
로아는 보고를 올리다 말고 말을 끊었다.
어딘지 모르게 저 새로운 ‘8급 생도’가 눈에 익었다.
헤르카가 능청스레 물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제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긴 했군요.”
로아는 눈을 비벼보았다.
몇 번이나 다시 보았는데, 그녀가 아는 얼굴이 맞는 것 같았다.
“혹시…… 빈첸 오라버니?”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율리안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저주를 내뱉었다.
-책상다리 모서리에 새끼발가락 엄청 세게 부딪쳐서 발톱이 덜렁덜렁거릴 년!
로아는 결국 빈첸을 알아보았다.
헤르카가 킥킥 웃었다.
“어때? 네가 보는 오라버니, 많이 변해서 잘 못 알아보겠지?”
“정식으로 만나는 건 거의 7년 만인 것 같습니다. 많이 변했다는 건 들었는데…….”
로아의 눈이 빈첸을 훑었다.
로아의 눈에 비친 빈첸의 변화는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내게 뺨을 맞고 울었던 그 빈첸이 맞아?’
빈첸도 율리안의 기억 속에서 로아를 읽어냈다.
로아에게 뺨을 맞던 그 장면도 기억났다.
“로아. 오랜만이구나.”
묵직하게 내려앉은 중저음.
로아가 알던 빈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나한테 존대를 하기로 했었는데…….”
“존대를 해주랴?”
로아는 빈첸이 유독 여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로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본래 빈첸은 로아 앞에서 엉엉 울기나 하는 한심한 놈이었다.
“오라버니의 여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거야?”
로아는 빈첸의 성장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외양이 크게 성장했을 뿐, 빈첸에게서는 아무런 기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첸이 심상이론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과는 별개로,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는 네 은은한 노기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냐?”
빈첸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 같아 보여서 오히려 귀여울 정도였다.
“내가 8급 생도로 승급했을 때부터 매일 들은 말이 있어. 오라버니가 복귀하면 난 대표생도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거라고. 심지어 요새장님도, 부요새장님도, 은근히 그런 눈치였어.”
로아는 이미 자존심이 크게 상한 상태였다.
물론 그녀도 빈첸의 활약상을 많이 듣기는 했다.
그러나 로아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나는 오라버니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그러냐?”
“빈 수레일수록 소리가 요란한 법이니까.”
“그렇지.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지. 네 생각을 이해한다.”
그러나저러나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에 로아는 조금 더 화가 났다.
빈첸이 무성의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서, 뭘 어쩌길 바라느냐?”
“오라버니와 관련된 소문들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주면 좋겠는데.”
“나와 관련된 소문?”
“오라버니가 과연 최연소 각명에 어울리는 무위를 지녔는지, 그 대단하다는 카곤과 겨루어 승리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헬라임의 영웅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 나는 내 눈으로, 내 검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
“나한테 뺨을 맞고 울던 그때가 불과 5년이 채 안 지났잖아.”
로아로부터 서슬 퍼런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헤르카가 손뼉을 짝짝- 쳤다.
“오, 그러면 둘이 검투를 해보면 되겠다.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잖아?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시간 되는 애들 전부 구경 오라고 해.”
헤르카가 바르곤에게 윙크했다.
무엇인가 속뜻이 담겨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