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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38화 (138/184)

환생의 정석 138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뭐가 보여?”

“벌써 들어오셨습니까?”

아넬린은 이 공간을 드나들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허세를 부리며 ‘자유로이’ 보름에 한 번 정도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공간 안의 시간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이동이 가능했다.

그 정도면 자유로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했지만 빈첸은 굳이 짚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게 혹시 저 상자입니까?”

“그니까, 저게 보여?”

“보입니다.”

“와, 진짜 보이는구나.”

아넬린은 허탈한 듯 웃었다.

“너 진짜로 아슬란이 말하던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맞는 것 같아.”

“저 상자가 보이면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맞습니까?”

“응. 아슬란은 그렇게 말했어.”

“그럼 저를 이래저래 시험하시지 마시고 이 공간에서 확인하시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넬린의 몸이 움찔했다.

“야, 나도 내 나름대로 확인을 하고, 어? 용으로서의 검증도 좀 거치고, 어? 이런저런 절차라는 게 있는 거야, 알겠어?”

“상자의 존재를 까먹으셨군요.”

“……아니거든.”

“맞는 것 같은데요.”

빈첸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아넬린은 ‘진실을 추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상자’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저 옛 친구들의 부탁을 500년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500년간 약속을 지킨 것을 보면, 당신께서 얼마나 친우들을 소중히 여겼는지 알 것 같군요. 예로부터 용은 신의를 지키는 종족이라더니 무척 놀랍습니다.”

“후후후, 내가 한 신의 하기는 하지. 알아보다니 되게 고맙다야.”

“그렇다면 신의로 지켜온 저 상자는 무엇입니까?”

기분이 좋아진 아넬린은 흔쾌히 말해주었다.

“가서 열어봐.”

“신의로 지켜오셨으니, 누구보다 저 상자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그렇지.”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랑은 안 친했는데, 아슬란이랑 한 편 먹은 녀석이 있었어. 이름이 네디아였던가.”

빈첸의 몸이 움찔했다.

네디아.

빈첸에게 이능검격이 포함된 파사검을 사사하고, 빈첸과 함께 파사검을 연구했던 500년 전 무인.

빈첸의 스승이었다.

“뭐야? 아는 이름?”

“들어보았습니다. 흔한 이름이니까요.”

“그건 그래. 아무튼 네디아가 죽기 전에 아슬란에게 비급을 하나 넘겼어. 그 비급을 담은 상자와 함께.”

그 상자가 저것이었다.

“그걸 왜 이곳에 두신 겁니까?”

“300년 정도는 애지중지하면서 잘 지켜왔는데, 300년쯤 지나니까 좀 시들해지더라고. 아무도 저걸 발견하지 못했거든.”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500년 전 친우들의 약속과, 200년 전 친우의 약속을 함께 지킬 수 있도록 한 공간에 보관해놓으신 거군요.”

많이 귀찮으셨나 봅니다.

빈첸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치, 나는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뢰와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이니까.”

* * *

빈첸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능검격의 검로를 볼 수 있는 자만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구나.’

그래서 빈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었다.

빈첸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깨끗하게 보관된 책이 한 권 있었다.

책에는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빈첸은 책을 바닥에 고이 내려놓고, 그곳에 절을 한 번 올렸다.

“뭐하냐?”

“보아하니 검식을 담은 비급서인 듯합니다. 이 비급을 준비해 준 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는 중입니다.”

빈첸은 한동안 묵념한 뒤 책을 꺼내 읽어 보았다.

‘파사검의 흐름과 일치하기는 하는데.’

앞장의 내용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었다.

‘이능검격을 사용하기 위한 마나의 흐름. 이능검로를 보기 위하여 안력을 일깨우는 방법 등은 삭제되어 있다.’

그보다 훨씬 상승의 검식들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이능검격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검식들.

-그럼 형님의 스승님이, 이능검격을 익힌 사람을 위해서 남겨진 비급이겠네요?

‘너. 네디아가 나의 스승이었다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느냐?’

-어라? 그렇네요?

빈첸의 성취가 높아지면서 율리안이 더 깊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데이븐이다. 들리느냐?’

-아악! 영감님! 하지 말랬죠! 머리 깨지겠어요!

빈첸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에 대한 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까불지 말거라.’

-까분 적 없는데요! 제가 언제 까불었다고요!

‘그건 그렇군.’

-억울해! 짜증 나!

‘뭐라고?’

-존경한다구요, 헤헤.

한 달이 흘렀다.

반지의 공간에 들른 아넬린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와, 완전 멀쩡하네? 아니, 뭐, 한 달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 네 정신력이야 일반적인 인간들을 훨씬 초월했으니까.”

빈첸은 이능검격의 상승검술에 집중했다.

비급에 따르면 기존의 이능검격은 반쪽짜리 검술에 가까웠다.

‘내가 감옥에 갇힌 이후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것 같다.’

책을 보며 깨달았다.

이건 네디아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슬란을 비롯하여 라엔므고와 베사툴 등, 당대의 영웅들이 깊이 관여하여 도와준 것 같았다.

-놀라운 건, 검술에 신성력을 일부 접목했다는 거예요.

신성력을 다른 말로 하면 신기였다.

빈첸은 ‘성배’를 통하여 신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을 살리는 신성력이 이능검격에 접합되면서 효율이 엄청나게 좋아지는 구조군요. 흥미로워요.

중간중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율리안이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알려주었다.

율리안의 시야와 관점은, 말하자면 해석본을 제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검식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심장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단단한 마나가 버티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일반적인 몸은 이러한 검술을 구사하기도 전에 몸이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체질이 바로 형님이 말하던 ‘천골’이고요.

2달이 흘렀다.

빈첸은 ‘이능검격’의 상위검술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약간은 익힐 수 있었다.

‘보다 간단해진 검로. 심지어는 검로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이능 검격.’

훨씬 쉽고 간결해진 이능검격을 익혔다.

이것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3달이 흘렀다.

-간결해진 이능검격은 다른 검식과의 융합이 무척 쉬워지네요. 그리고 특히 아덴카의 연환검과 호환이 대단히 뛰어나고요.

네디아가 남긴 것들은 마치, 애초에 아덴카의 연환검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검식 같았다.

안쪽 세계 기준으로 약 6달.

바깥 세계 시준으로 약 3달이 흘렀다.

“이제는 뭐, 더 놀랄 것도 없어 보인다.”

사실 들어올 때마다 조금 조마조마했다.

빈첸이 미쳐 버리는 것 아닌가.

보통 이러한 환경에서 홀로 수련에 매진하다 보면 미쳐 버리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빈첸은 너무 멀쩡했다.

오히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다.

8달이 흘렀다.

“너, 키도 꽤 큰 거 같다?”

“그렇습니까?”

아넬린은 빈첸이 어디까지 성장하나 궁금해졌다.

“식사배달용이라는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됐어. 그냥 내기했을 뿐이니까. 굶겨 죽이는 건 또 정 없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넬린이 달마다 제공해 주는 음식과 물은 모두가 최상급이었다.

그녀의 마법력이 가미된 상자로 제공되는 음식들은 거의 영약에 달하는 진귀한 것들이었다.

용이 아니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그것은 빈첸의 신체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이러한 식재료들을 구해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요, 저 할머니가 생각보다 꽤 정이 있어요.

1년이 흘렀다.

1년 동안, 빈첸을 몰라보게 훌쩍 컸다.

아넬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편지를 전해주라고? 식사배달용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집배원용이냐?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친절하고 위대한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이라 생각합니다.”

“오, 정확히 봤군.”

아넬린은 빈첸의 편지를 종종 바깥으로 전달해 주었다.

가끔은 붉은 요새로 편지를 보냈고, 또 가끔은 아덴카가로 보내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셀비라와 연락도 주고받았고, 헤나의 안부도 주기적으로 물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내가 잔심부름꾼이라니.”

아넬린은 1년 전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바깥세계 기준으로 1년 반이 흘렀다.

빈첸은 미치지 않았고 꾸준히 수련을 이어갔다.

아넬린도 계속 빈첸의 뒷바라지 해주었다.

“힘드네.”

아넬린은 빈첸에게 음식과 물을 전해준 뒤, 바깥으로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빈첸에게 티 내지 않았으나 아넬린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진작에 마나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빈첸이 어디까지 버틸까 싶어 억지로 생명줄을 부여잡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어지러워서 피도 뽑기 힘들다.”

빈첸이 마시는 물에는 ‘용혈(龍血)’이 담겨 있었다.

빈첸에게 가르쳐주지는 않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첸의 마나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 아끼면 똥 되지.”

반지 속 공간 기준으로 6년의 시간이 흘렀다.

바깥 세계 기준으로는 거의 2년가량의 시간이었다.

아넬린은 깨끗하고 단정한 흰색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넬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6년을 버티네. 미친놈인가 봐.”

“고맙습니다.”

6년 전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넬린이 쿡쿡 웃었다.

“이제는 제법 수컷 냄새가 난단 말이야.”

어느덧 빈첸의 골격은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깥 세계 기준으로는 16살이지만, 신체적으로는 20살이었다.

“이제 이 공간도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운 것 같군요.”

“그래. 이 공간을 부수고 나가면 돼.”

아넬린이 빈첸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네 힘이면 어렵지 않게 부수고 나갈 수 있겠네.”

“예.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빈첸이 홍련을 꺼냈다.

스릉-

맑은 검명이 울렸다.

아넬린이 다시 한번 뒷걸음질 쳤다.

“검 조심히 뽑아. 지금의 네 검은 용의 피부도 베어낼 수 있을 테니. 검에 아주 살벌한 기운이 맺혀 있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능검격의 힘을 감지했다.

“그 정도로 성장했습니까?”

“어지간한 마법사를 상대로는 절대 지지 않겠어.”

“용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분명히 그렇겠군요.”

“됐어. 얼른 해보기나 해봐. 내가 기감으로 느끼는 거랑 네가 직접 선보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이 공간은 이능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빈첸은 이능을 베는 검을 지니고 있었다.

“제 검의 이름은 본래 이능검격이었으나, 수련을 통하여 조금 더 발전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따라 혀가 왜 이렇게 길지? 얼른 보여주기나 하라니까.”

“마지막으로, 위대한 흑염룡께서 이능검격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척 자랑스러울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종말과 파괴의 초월검격으로 할까 했는데 말이야. 사실 종말과 파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주기는 좀 애매하지? 종말과 파괴는 내 거니깐.”

아넬린은 후후후 웃고서 말했다.

“많이 아쉽겠지만 초월검격으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빈첸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아넬린을 향한 예를 갖추었다.

“네디아의 비급을 통해 창안되었고, 아넬린에 의하여 제게 전달되었으며 빈첸 아덴카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이 검의 이름은 초월검격입니다.”

빈첸이 검을 휘둘렀다.

아덴카의 검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능을 베는 본연의 힘을 사용하여 공간을 베어냈다.

빛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2년 만에 마주하는 바깥세상의 빛이었다.

“그리고 빈첸 아덴카는 엄숙히 맹세합니다.”

빈첸은 홍련을 땅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오랜 신의를 지켜온, 위대한 용에게…….”

아니,

그녀가 좋아하는 이명을 부르기로 했다.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에게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되겠습니다. 초월검격의 이름을 지어주신 아넬린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넬린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까 입고 있던 깨끗하고 하얀 수의가 곱게 접혀 놓여 있었다.

-형님…… 앞을 봐요.

묵념을 끝낸 빈첸이 고개를 들었다.

빈첸 앞에는 거대한 뼈가 보였다.

용의 형체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뼈.

용골(龍骨)이었다.

아넬린이 빈첸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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