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33화
빈첸이 물었다.
“이곳을 찾은 인간들 중, 히슬리가의 피를 이은 자들이 있을 때에만 살려두었다는 것입니까?”
“반은 맞아. 정확히는 히슬리가의 피를 이은 자만 살려뒀어.”
그녀가 피식 웃었다.
“사르비나. 그 아이도 히슬리의 피를 이었었지.”
“…….”
빈첸은 잠시 침묵했다.
사르비나가 히슬리의 피를 이었다는 것은 곧 빈첸에게도 히슬리가의 피가 흐른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달리하자면 세리와 자신 또한 먼 혈족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히슬리의 피를 잇지 않았으나 살아 있는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칸.
베르사.
당시 함께했던 1급 생도들.
그들은 이곳에 들어왔다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건 히슬리의 피를 이은 사르비나가 죽음을 대신 가져갔기 때문이지.”
빈첸은 베르사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우리는 사르비나가 천과를 얻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감수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왜 힘을 잃었는지. 왜 그토록 빨리 죽었어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어. 다만,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자리 잡았다는 것만 알았다.
사르비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함께했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하여.
빈첸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에는 어떻습니까?”
자신과 세리는 히슬리의 피를 이었다.
그러나 헤나는 아니었다.
“글쎄. 고민 중이야. 원래는 죽여야 하는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기가 증폭되었다.
헤나의 발밑에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헤나가 저항하려 했으나, 그녀는 저항하지 못했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용이 마나를 동결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현대 무인에게 최악의 마법이었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그때, 빈첸이 검을 휘둘렀다.
‘이능검격.’
용의 마법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마법의 절반은 용으로부터 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정도로.
다행인 것은 용이 방심하고 있다는 것.
덕분에 ‘길’이 보였고, 빈첸은 이능검격을 통해 용의 ‘마법’을 베어냈다.
용이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너 이 검을 어떻게 익혔어?”
그녀는 빈첸의 이능검격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빈첸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홍련으로 용을 겨누었다.
“제 누이입니다.”
“흐음.”
그녀는 턱을 매만졌다.
“오케이. 일단은 살려둘게. 그러니 그 검을 어떻게 익혔는지나 말해봐.”
“이 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글쎄. 내 친구가 좋아하던 형이 즐겨 사용하던 검술과 비슷하네.”
“친구는 누구고, 좋아하던 형은 또 누굽니까?”
“말하자면 좀 긴데. 일단 내 이름부터 소개하지. 내 이름은…….”
빈첸은 머릿속으로 용의 말들을 정리했다.
‘용의 이름은 아넬린.’
아슬란과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했다.
아슬란의 친구이자 동료라고 했다.
‘아슬란의 동료였다고?’
아넬린은 총 네 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아슬란.
라엔므고.
둘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라엔므고라면 성왕의 이름이잖아요?
라엔므고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아는 편이었다.
그의 유적지도 남아 있었고, 빈첸은 그곳을 직접 다녀왔으니까.
아슬란과 라엔므고가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현재의 아덴카와 가이아 신전도 꽤 끈끈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태생이 그랬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료가 더 있었다니.’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아넬린.
베사툴.
둘은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러게요. 용이 초대가주님의 동료였을 줄이야. 놀라운 일이네요. 그 동료가 멀쩡히 살아 눈앞에 있는 것도 놀랍고요.
그 용의 이름이 아넬린.
눈앞의 이 여자였다.
아넬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뭐야, 그 반응은? 너무 위대한 이름들이라서 당황했어?”
“일단 아넬린의 이름은 잊혀졌습니다.”
“엥? 진짜? 에이, 거짓말.”
“제게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왜? 나 전성기에 좀 날렸는데. 아슬란과 라엔므고보다 내가 좀 더 유명했는데?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을 몰라?”
그녀는 자신의 이명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꽤 뿌듯한 모양새였다.
“……그렇습니까?”
“표정이 왜 그래?”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는 이명인 듯합니다.”
“왜? 멋있잖아?”
율리안이 허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다, 저 용은 진심이다.
빈첸이 대답했다.
“어떤 의미로 멋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구석도 있지만요.”
“시대가 바뀌었나? 뭘 모르겠지만 나 때는 멋있는 이름었어.”
“……그렇습니까?”
그 시대에도 그런 이명은 멋있지 않았습니다만.
빈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괜히 용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다르게 말했다.
“정말로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무것도 모르시는 걸 보면.”
“안 나갔지. 세상에 별로 관심 없어. 나는 어차피 500년 전에 마나로 돌아가려 했으니까.”
마나로 돌아간다는 건 영원한 죽음을 뜻했다.
용들은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마나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베사툴과 약속했거든. 이곳에서 천과를 지켜주기로.”
아넬린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은 베사툴이었다.
그는 당시 히슬리가의 가주이자, 아슬란의 동료였다고 했다.
-왜요? 형님도 베사툴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안다. 히슬리가의 적통이었어.’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시절.
그는 베사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슬란이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사내였다.
나이는 데이븐과 동갑.
몇 번 자리를 함께했으나 깊은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친해지기도 전에 사미온의 지하 감옥에 갇혀버렸으니까.
그가 감옥에 갇힌 이후, 히슬리가의 가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왜 히슬리가의 가주가 용에게 천과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습니까?”
“우리의 사명을 미래에 걸었으니까?”
아넬린의 표정이 아주 잠깐 어두워졌다.
“우리는 대악마를 죽이지 못했거든. 그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재워놓았을 뿐.”
“…….”
빈첸의 몸이 움찔했다.
“대악마라면 데이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대악마 데이븐. 그래도 그 얘기는 전승되었나 보네.”
빈첸의 몸이 다시 한번 움찔했다.
아넬린은 500년 전 과거를 직접 경험한 세대다.
그 아넬린이 분명히 대악마 ‘데이븐’이라고 언급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데이븐은 분명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었는데.
어째서 아넬린이 대악마를 일컬어 ‘데이븐’이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사실 난 대악마 같은 게 어찌 되어도 상관은 없었는데. 내 친구들이 무척 간절했단 말이야.”
아슬란과 라엔므고.
그리고 베사툴.
세 사람은 미래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위대한 예언자가 예언했어. 언젠가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나타나 대악마를 진짜로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빈첸은 성왕으로부터 ‘진실을 추구하는 자’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인가.
-이 날이 왔는가.
“뭐 나는 그 예언자인지 머시깽이인지를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았는데, 나머지 애들은 믿더라고.”
“예언자가 누구였습니까?”
아넬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이름이 뭐더라…… 생각이 날듯 말 듯한데. 잠깐만 기다려봐.”
빈첸도 함께 생각에 빠졌다.
그 정도로 유명했던 예언자라면, 빈첸도 이름을 들어봤을 법했으니까.
한참의 시간을 고민하던 아넬린이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마 이름이 율 뭐였던 것 같아. 율리안?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 * *
율리안이 말했다.
-별일이네요. 저 할머니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용이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빈첸은 빈첸 나름대로 아넬린의 말을 정리했다.
‘데이븐은 죽었다. 그러나 대악마 데이븐은 실존했으며,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봉인되었다.’
역사는 두 위인을 기록했다.
‘아슬란은 아덴카의 초대 가주가 되었다. 라엔므고는 성왕이 되어 성왕의 무덤을 남겼다.’
그리고 역사는 나머지 두 영웅을 잊었다.
‘베사툴은 히슬리가의 가주였으나 히슬리가와 함께 세상에서 잊혀졌다. 아넬린은 용이었고, 베사툴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서 천과를 지켰다.’
아넬린이 하아암- 하고 크게 하품했다.
“아슬란의 피와 히슬리의 피를 동시에 이은 녀석을 봐서 그런가 너무 들떴네. 옛이야기를 너무 많이 떠든 모양이야.”
“고맙습니다. 많은 배움이 되었군요.”
“뭔가 참 재수 없는 듯하면서, 또 예의는 겁나 바르단 말이야. 요즘 애들 같지 않게. 그래서? 너 아직 대답 안 한 거 알지? 그 검을 어떻게 알고 있어?”
빈첸은 사실과 진실을 교묘히 섞었다.
“열세 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검의 길이 보이고, 그 검의 길을 따라 검을 휘두르면 이능을 베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가능해?”
“500년간 여기서 천과를 지키고 있는 용도 있는데 그게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그 용이 무려 파괴와 종말의 흑염룡쯤 되는데요.”
“야. 틀렸잖아.”
“예?”
아넬린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이다.”
“…….”
“종말이 앞이라고. 파괴가 뒤고.”
“……그게 중요한 것이었군요.”
“당연하지. 종말이 더 세 보이잖아. 앞으로 실수하지 마.”
빈첸은 잠시 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제가 [진실을 추구하는 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네가? 푸, 푸하하하핫! 500년도 더 된 옛날 얘기를 너처럼 진지하게 경청하는 애도 처음 보고, 그걸 또 믿는 것도 신기하네. 너 나 놀리냐?”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 검을 구사하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는 불가사의하고 놀라운 일이 많다고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흐음,
빈첸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한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이 검은, 초대가주님이 좋아하던 형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그 형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형의 이름은 빈첸이 잘 안다.
그 이름이야말로 ‘데이븐’이었다.
사미온의 지하감옥에서 죽어간 데이븐 말이다.
“그게…….”
아넬린이 방긋 웃었다.
“잘 기억이 안 나.”
“용이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습니까?”
“용이 무슨 신이냐? 다 기억하게.”
아넬린은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캐물어도 소용없을 듯했다.
“자, 그럼. 이제 네 얘기를 좀 해봐. 바깥세상 얘기도 좀 해보고. 뭐가 많이 바뀐 것 같네.”
“간단하게 할까요, 빠르게 할까요?”
“둘 다 비슷한 말 아니냐?”
“그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빈첸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비교적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덴카의 초대가주인 아슬란은 후대에 무언가를 남겼다.
그리고 빈첸 자신은 아슬란의 발자취를 좇는 중이었다.
아덴카의 후계자들이 거쳐 가는 관문들이 모두 그랬고.
빈첸에 지나온 ‘성왕의 무덤’이 그랬다.
그리고 이곳.
나일 폭포에 숨겨진 동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가 결국 이곳에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과를 얻기 위해서.”
“뭐, 꽤 흥미롭기는 한데, 천과는 없다니까. 다시 과실을 맺으려면 몇십 년은 더 있어야 돼.”
“인위적으로 과실을 맺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빈첸은 성왕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슬란의 말이 맞구나.
-이것을 받으라.
-훗날, 그것이 그대를 천과(天果)로 안내할 것이다.
500년 전.
네 명의 영웅이 미래에 무언가를 걸었다면.
오늘의 이 날을 이토록 정교하게 예비했다면.
후대의 누군가가.
그러니까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천과를 얻도록 준비했다면.
어쩌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종말과 파괴의 흑염룡인 당신께서 천과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