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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24화 (124/184)

환생의 정석 124화

빈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제 친구를 이곳으로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친구요?”

“네. 붉은 요새의 9급 생도입니다.”

“인간들이 용림을 자유로이 왕래했던 것은 200년 전이 마지막이에요. 그러나 빈첸 공자의 친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나이메르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죠? 이곳에 꼭 와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 친구라면 나이메르 경을 꼭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저를요?”

“예. 역사에 무척 관심이 많은 친구거든요.”

빈첸이 언급한 친구는 바로 셀비라였다.

역사학자를 꿈꾸는 생도.

“200년 역사의 산증인께서 이곳에 계시니, 아마 무척 즐거워할 겁니다.”

“좋아요.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나이메르는 즉시 용아인 마법사들을 불렀다.

이동관문의 파장을 조정하는 스크롤을 받아 빈첸에게 건네주었다.

“셀비라 생도에게 전해주세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의 이동관문을 통하여 이곳에 당도할 수 있을 거랍니다.”

“감사합니다, 나이메르 경. 셀비라에게는 서신을 보내놓겠습니다.”

나이메르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빈첸에게서 무언가 다른 것을 느낀 것만 같았다.

“빈첸 공자. 단순히 친구의 꿈을 위한 부탁이었나요?”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있다.

정보는 은폐되었다.

사람들은 옛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아주 먼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빈첸이 보아온 셀비라라면, 그 역할을 잘 해내 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뜻이 있나요?”

“역사를 잊은 자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메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대답이 무척 옳군요.”

공자라면, 비틀린 모든 것들을 바로잡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이메르와의 작별인사가 얼추 마무리되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칼백이었다.

빈첸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스승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공자.”

“검은 바다를 전승하여 주셨는데 스승이 아니면 달리 뭐라 부른단 말입니까?”

율리안이 키득대며 웃었다.

-저봐요, 칼백 경 귀 빨개졌네요.

예리하고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칼백은 수줍음을 많이 탔다.

특히 빈첸이 ‘스승님’이라 부를 때면 더욱 그랬다.

“크흠.”

칼백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서 본론을 꺼냈다.

“용왕의 유품을 완성하러 간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스승님.”

“아, 그러니까, 스승님이 아니래도…….”

“알겠습니다, 스승님.”

“끄응.”

칼백은 반쯤 포기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용왕의 유품을 온전히 얻을 수 있도록 돕지요. 그곳에 그림자를 다루는 암살자들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정확히는 영살자들입니다, 스승님.”

“…….”

“아무튼 저는 그자들이 영 의심스럽습니다. 용왕과 맹약을 맺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긴 하겠지요. 스승님은 용맹한 용아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인이시니.”

“그러니까 그 호칭 좀 제발!”

그는 낯간지러움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나이메르가 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 칼백은 수줍음이 많은 사내이니 그만 놀리시지요.”

“어머니. 어머니도 저를 놀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눈치챘단 말이에요? 눈치가 무척 빨라졌네요.”

“…….”

용아인 전사 칼백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빈첸이 말했다.

“마음은 무척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공자.”

“왜요? 제가 사랑스러운 제자라서 그렇습니까?”

칼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조금 더 놀렸다가는 검을 뽑아 들 것만 같아서 빈첸도 그쯤 하기로 했다.

“농담입니다. 어쨌든 저는 혼자 가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약속의 일족입니다.”

맹약으로 맺어진 일족.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일족이다.

“제가 칼백 경과 함께 간다면, 저는 그들의 약속을 존중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사미온 직계에 가장 가까운 방계였다.

사미온의 직계들이 아스비온 일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알고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들을 잘 압니다.

그림자에 맹세를 맺었으니, 스승님이 계시지 않아도 안전에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나는 빈첸 공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 의지는 존중하겠습니다. 공자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대화를 끝낸 빈첸이 천년수 앞으로 나갔다.

용아인들이 용아후를 터뜨렸다.

또한 그들은 시민혁명대를 상징하는 노란 기를 들고서 빈첸을 송별했다.

뿌우우우-!

여기저기서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메르가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리 용아인들은 빈첸 공자의 앞날에 빛이 있기를 기원할 것입니다. 또한, 빈첸 공자의 언약이 언젠가 성취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 또한 천년수 앞에서 맺었던 약속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빈첸이 자신을 향해 노란 기를 흔들고 있는 용아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빈첸은 마차에 올라탔다.

어느덧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으로 향하는 이동관문에 도착했다.

세리가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용아인 마법사들이 파장을 잘 맞추어 주었고, 빈첸과 세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의 이동관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 * *

빈첸은 깜짝 놀랐다.

“누님?”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 지하 1층.

그곳에 헤나가 있었다.

헤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빈첸을 슬쩍 훑어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구나.”

“…….”

빈첸은 왜 헤나가 이곳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누님을 잠시 잊고 있었구나.’

헤나는 융통성이 없다.

헤나가 7개월 전에 받은 임무는 ‘용왕의 은총을 찾고, 빈첸을 보호하라’였다.

‘누님은 내 안전을 확인해야만 했던 거야.’

그러니까 헤나는 장장 7개월 동안 이곳을 지켰다는 뜻이 된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심했습니다.”

“나는 그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내 임무를 모욕할 셈이냐?”

헤나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빈첸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듯 헤나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형’이라 불렸던 헤나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빈첸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누님이 변했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낭을 비롯하여 범용 마정석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숙식을 해결한 모양이었다.

헤나는 7개월의 밤낮을 이곳에서 보냈다.

“서신이라도 한 통 보냈어야 했는데요. 무척 후회됩니다.”

“…….”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헤나의 얼굴에 서렸던 노기는 사라져 있었다.

헤나가 입을 열었다.

“내게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빈첸의 짐작대로 헤나는 7개월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빈첸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임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오랫동안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는 어느새 돌아오지 않는 빈첸을 걱정하고 있었다.

“불안했었다.”

그 불편한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었다.

“지금은 안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도 함께 나는군.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나를 모르겠구나.’

빈첸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서신 한 통 보내지 않은 빈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는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며 인형이 아닌 사람 헤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에서 안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임무가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빈첸이 무사히 돌아와서 안도했다.

그렇지만 헤나는 속마음을 감추었다.

“나는 그저.”

‘너와 나의 임무이기에’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우리의 임무이기에 조금 더 인내와 신중을 기했을 뿐.”

말하는 태도는 어른이었고, 말을 하는 화자는 충분히 기품이 있었으나 빈첸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빈첸의 눈으로 본 헤나는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같았다.

“고맙습니다, 누님.”

빈첸 또한 헤나를 보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고맙기도 했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모습에 기쁘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지난 7개월. 누님의 시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 *

빈첸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헤나는 잠자코 얘기들을 모두 들었다.

“그런데 누님은 묻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제가 어떻게 사미온의 힘을 익히고 있는지를.”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래도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네게는 특별한 눈이 있다. 사미온의 마나 흐름을 파악하여 모방하는 것이 그리 의심스러울 일은 아니지.”

빈첸은 입을 다물었다.

헤나의 말이 완벽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나는 빈첸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때,

윌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자니이이이이이임-!”

헥헥 대며 빈첸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아마도 헤나의 식사인 듯했다.

“헉! 헉! 잠깐만요. 숨 좀 돌릴게요.”

윌슨은 한참 동안이나 헥헥댄 다음 말을 이었다.

그는 무척 서운했던 것 같았다.

“아니, 공자님. 7개월이나 감감무소식이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 쉬운 서신 한 장 안 보내주십니까? 이 심복 중의 심복, 시종 중의 대왕시종, 윌슨을 잊으신 겁니까?”

빈첸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윌슨이 말을 쏟아냈다.

“아주 섭섭합니다요!”

한동안 서운함을 표출한 윌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빈첸이 잠자코 들어주기는 했으나, 사실 시종이 주인에게 따질 만한 문제는 아니기는 했다.

“저는 사과 안 할 겁니다! 이건 공자님께서 잘못하신 거니까요.”

그러고서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다.

호기롭게 선포하기는 했으나 이내 겁이 났다.

“그, 그래도 좀 무례했죠? 하, 하하! 제가 공자님을 너무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제가 공자님을 너무너무 그리워하다 보니까, 그게, 그러니까…….”

윌슨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용기는 무척 짧았다.

“죄송합니다!”

빈첸은 피식 웃었다.

“일어나라. 네 마음은 알겠으니.”

윌슨은 엎드린 채 눈동자만 굴려 빈첸의 눈치를 살폈다.

빈첸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용서받은 윌슨은 자신만만하게 일어섰다.

그리고서 헤나에게 말했다.

“아참, 3공녀님. 전달된 서신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빈첸은 확신할 수 있었다.

헤나는 빈첸 자신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빈첸의 시종인 윌슨에게 매일 서신을 확인하라 명령했던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게서 서신이 올까 싶어서 그랬던 거야.’

괜스레 다시 한번 미안해졌다.

그에 반해 윌슨은 조금 불만이었다.

‘왜 맨날 확인하래?’

덕분에 서신 전달소를 매일같이 드나들어야만 했다.

전달소의 직원들이 윌슨을 상당히 귀찮아하기도 했다.

윌슨은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매일 우편함을 확인을 해야만 했고.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아덴카의 3공녀가 내린 명령인지라 성실하게 지켜왔다.

헤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앞으로는 서신을 확인할 필요 없다. 그간 수고했다.”

빈첸이 돌아왔으니, 이제 더 이상 서신은 필요 없었다.

헤나가 품 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주었다.

윌슨은 지극히 공손해졌고 품행이 단정해졌다.

절도까지 생긴 그는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다음에도 또 애용해 주십시오! 제 3공녀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자 기쁨이고 행복이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빈첸이 말했다.

“누님.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러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빈첸 또한 ‘우리’라고 표현했다.

이동관문 앞에 선 헤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는 못했다.

빈첸과 헤나가 이동관문 위에 올라섰다.

이제 진짜 ‘용왕의 은총’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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