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8화
빈첸이 헤나에게 직접 설명했었다.
-프란시스는 일곱 살부터 천재적인 그림실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즈음부터 극사실주의를 표방하여 자신의 자화상과 주변 지인들을 그려주었다고 하는데…… 아, 저기 있다. 저기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저 그림은 당시 유명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상이더라…… 레일……뭐였는데.
프란시스가 11살에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 레일트라 상을 수여받았다고 했었다.
지금 눈앞의 저 여인은 그 초상화과 똑 닮아 있었다.
“공자는 마치 제 얼굴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한 예술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프란시스가 그린 초상화를 말하는 것이겠군요.”
프란시스는 200년 전 활동했던 예술가였다.
그 예술가가 그린 ‘어머니’의 모습과 ‘용아인들의 어머니’의 모습이 똑같았다.
“혹시 초상화 속 여인의 후예입니까?”
단순히 후예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똑같았다.
용아인들의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율리안은 천부적인 기억력으로 초상화를 떠올렸다.
-눈과 입 주변의 작은 주름 모양과 각도마저도 똑같아요. 저 정도면 동체 모양까지도 똑같겠어요.
빈첸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혹은 동일인입니까?”
“꼭 닮은 사람이라고 해두죠.”
용아인들의 어머니는 이렇다 저렇다 정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저는 용아인들의 어머니, 나이메르 에일롬이라고 해요. 빈첸 공자.”
프란시스 에일롬.
나이메르 에일롬.
성이 같았다.
그녀는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선 뒤, 오른쪽 손을 가슴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 또한 붉은 요새의 방식으로 빈첸에게 경례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빈첸도 같은 방식으로 화답했다.
“마차에 오르시겠어요? 저희들의 도시로 안내하겠습니다.”
빈첸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은 생각보다 넓고 편안했다.
나이메르가 말했다.
“빈첸 공자. 용아인들은 사실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전쟁…… 말입니까?”
“데르소나에 납치된 우리 동족들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요.”
나이메르는 동족들의 헛된 죽음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
용아인들의 성지인 ‘용림(龍林)’에서 용아인 전사들을 소집하고 있었다고 했다.
헬라임과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 빈첸과 베르사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빈첸 공자가 전쟁을 막아준 셈이죠. 일단은.”
어느덧,
빈첸은 나무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벽 앞에 도달했다.
‘엄청난 규모군.’
숲 속에 지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요새였다.
빈첸이 물었다.
“나무성벽은 화공(火攻)에 취약하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빈첸 공자 옆의 소녀가 알고 있겠군요.”
빈첸의 시선이 세리에게로 향했다.
세리는 말을 해도 되나 잠시 머뭇거렸고,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세리. 말해봐.”
“이 숲에는 정령력이 가득해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정기가 느껴져요. 저 성벽도 정령의 도움을 받은 것이 틀림없어요. 자세히 보면 성벽에 옅은 물길이 흐르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썩지 않고 있었다.
정령으로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소녀의 말이 맞아요. 용아인들 중에는 뛰어난 정령사가 많거든요. 이로써 대답이 되었나요?”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빈첸은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다.
요새를 지키는 전사들의 기세도 상당했다.
‘나도 그렇고, 헬라임도 그렇고, 용아인들의 저력을 우습게 본 모양이야. 이런 저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이들이 정말로 용림을 벗어나 헬라임과 전쟁을 벌였다면?
빈첸이 말을 이었다.
“용아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 아니었다면, 헬라임의 모든 도시들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겠군요.”
“…….”
나이메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 수많은 용아인들이 나와서 헬라임의 시민 혁명대를 상징하던 노란기를 들고 빈첸을 맞이했다.
요새의 문을 지나자 양옆으로도 강인한 기세의 용아인 전사들이 검을 빼어 들고 빈첸과 나이메르를 환영했다.
그들은 동족을 구해주고 헬라임을 멸망시킨 빈첸을 향해 목소리를 드높였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마차는 계속하여 대로를 따라 달렸다.
용아인들의 도시는 규모가 굉장히 컸다.
“저 천년수가 곧 나의 집입니다.”
빈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의 나무가 보였다.
마치 하늘을 덮은 이불처럼 거대한 잎이 펼쳐져 있었다.
“천년수가 자신의 몸을 일부 내어주었어요. 속이 텅 비어 있는 부분들을 제 집으로 쓰고 있지요.”
나무는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큰 성 같았다.
마차가 나무 안쪽으로 들어섰다.
빈첸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저녁 만찬을 즐겼고, 이내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저만치 앞에는 높은 계단과 ‘왕좌’라고도 불리는 어머니의 자리가 있었으나, 나이메르는 계단 아래에 서서 빈첸을 맞이했다.
그것이 빈첸을 대하는 나이메르의 자세였다.
“저녁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제 시종이 말하길, 용아인들은 모두 뛰어난 예술가이자 요리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이었다.
모든 음식이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 사이, 용아인 시종들이 의자를 세 개 가져왔다.
나이메르.
빈첸.
세리.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이메르였다.
“공자가 전쟁을 막았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지요?”
“예. ‘일단은’이라고 하셨지요.”
“용아인들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일족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동족들이 살해되었다.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전쟁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강경파들이 여럿 존재해요. 수많은 백성들이 그 의견에 동조하고 있고요.”
“헬라임은 이미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헬라임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뒤에 분명 누군가 더 있어요. 어쩌면 공자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6마탑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나이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도 보셨다시피 우리는 이미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상대가 6마탑 하나라면요.”
나이메르는 비교적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6마탑과의 전쟁은 치를 수 있다.
어쩌면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빈첸이 말했다.
“그러나 다른 마탑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군요. 게다가 6마탑은 많은 무가(武家)들과 깊은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용아인이 6마탑을 치면, 다른 세력들이 용아인들을 치겠지요. 6마탑은 이미 헬라임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버렸을 겁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용아인들에게는 명분이 없어요.”
“알고 있어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빈첸이 말했다.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단순히 제 공적을 치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맞아요. 어쩌면 우리와 6마탑의 전쟁은 용아인과 인류의 전쟁으로 확장될 수도 있어요. 나는 도의적인 의무와 책임을 지고서, 공자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리려 해요. 어떤 전쟁은 누군가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하죠. 이 전쟁이 빈첸 공자에게 이득이 되기를 바라요.”
“제가 배신하여 6마탑에 정보를 흘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승리를 위한 전쟁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우리도 모두 알고 있어요.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멸족할 거라는 것을.”
그들은 헬라임과 마탑의 수작질에 의하여 수백 개의 알을 빼앗겼다.
수많은 동족이 납치되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그 시점에서, 이미 용아인들은 그들의 긍지와 가치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다만, 명예를 남기고 싶은 것이지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세대는 비겁한 평화를 바랐던 세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세대 아이들과 동족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던 세대로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
빈첸은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나이메르 경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용아인들의 어머니도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까?”
“저는…….”
“저는 나이메르 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제게 전쟁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이메르의 몸이 움찔했다.
“이미 우리를 도와준 은인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할 만큼 염치없는 자는 아니랍니다.”
“제게 도와달라고 말하세요.”
“……네?”
“용아인들의 어머니가 빈첸 아덴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는 그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빈첸은 아덴카의 무인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였다. 나아가 헬라임과 결탁하여 인륜과 도리를 어긴 6마탑을 무너뜨렸다. 저는 훗날, 이렇게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
“제 명예를 위하여.”
“……공자는 진심이군요.”
나이메르는 한동안 고민했다.
실제로 그녀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공자가 우리의 은인인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공자에게 경의를 보내고 있으나, 이미 전쟁을 결심한 전사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거예요.”
“용아인들에게는 특별한 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빈첸이 홍련을 내밀었다.
이동관문을 지키고 있던 용아인들이 홍련을 보더니 빈첸에게 마음을 열었다.
“제 홍련에 새겨진 포르세딘의 가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더군요.”
“맞아요. 저희는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느껴요.”
“용왕의 진전을 이은 자라면, 용아인들의 민심을 가라앉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말이라면 들어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나이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벨탄의 진전을 이었다고 하기에는, 그 흔적이 너무 미약해요.”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이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한 달 안에. 용왕의 힘을 이끌어내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길은 보았다.
광장에 마력흐름이 새겨져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반복 숙달뿐이었다.
강화된 신체와 미전류 특성을 발현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미 두 번이나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더욱 쉬울 터.
율리안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용왕의 힘을 증명한 뒤, 용아인들 앞에 엄숙히 맹세하겠습니다. 용아인들의 핍박과 반인륜적인 연구에 앞장선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빈첸 공자.”
“자격에 대한 증명은 용왕 아벨탄의 힘으로, 단죄에 대한 약조는 아덴카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나이메르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공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입니까?”
전쟁은 누군가에겐 비극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희극이다.
누군가는 전쟁 고아가 되고, 누군가는 전쟁 영웅이 된다.
누군가는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누군가는 거상으로 거듭난다.
누군가에게는 위기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빈첸이 이렇게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무인이 무학을 익히는 이유는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군가를 파괴하려는 것으로부터 자신과 주변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게 무학의 기본이다.
“또한 그것이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나이메르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
빈첸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율리안이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형님아.
‘왜?’
-내 포지션까지 노리지 말아줄래요? 형님은 그냥 멋진 영감님만 하란 말이에요.
빈첸이 용아인들의 전쟁을 막고자 했던 이유는 그저 그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 혹은 ‘무인이기 때문에’ 만은 아니었다.
-영감님이 똑똑하게 계략까지 쓰면 어쩌잔 말이에요?
빈첸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매우 실리적인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