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117화 (117/184)

환생의 정석 117화

율리안이 설명을 이었다.

-요새장님이 주신 기록 영상을 살펴보면, 빛에 일정한 흐름이 관측돼요. 마치 마력자전을 하는 것처럼요. 그 빛을 마력이라고 가정할게요. 그리고 형님, 이 광장에서 유일하게 정확하게 묘사된 문양이 뭔지 아시죠?

‘포르세딘의 가호.’

-맞아요. 그걸 기준점으로 삼을 거예요. 형님은 홍련에 가호가 이식되어 있으니 홍련을 기준으로 삼아보세요.

‘홍련을 기준으로 하여 마력 지도를 구상하란 얘기군.’

빈첸은 눈을 감은 채 그만의 작은 세계를 떠올렸다.

그 세계에서 중심은 홍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포르세딘의 가호가 새겨진 홍련.

‘홍련이 기준이고 시작이다.’

그곳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홍련을 꺼내 들어 왼손에 쥐었다.

‘왼손의 정맥을 타고 마력을 흘린다.’

율리안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그저 영상에 기록된 마나의 흐름만 기계적으로 알려주었다.

‘팔꿈치를 지나 두 갈래로 갈라진 마력은 하나는 어깨 위를 향하고, 또 다른 하나는 어깨 아래 간을 두 바퀴 지나…….’

빈첸이 그려낸 작은 세계에서 마력이 자전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빈첸의 심장에 머물고 있는 마나는 스스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포르세딘의 힘을 꺼내 쓰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변화하는 것처럼.

스스로 심상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율리안은 빈첸의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을 관측했다.

‘진짜 괴물 같은 형님이라니까.’

저절로 심상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결 모양의 심상.

‘저런 모양의 심상은 흔하지 않은데.’

가호와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별’ 모양의 심상을 가장 완벽한 형태의 심상이라 부른다.

그게 현대 무학 이론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빈첸을 보며 그 정설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가장 완벽한 심상은, 심상이 없는 거야.’

물론 저기까지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은 안다.

사망률이 무려 50퍼센트가 넘는 미친 짓.

제정신이 박힌 현대인이라면 아무도 저런 방식의 수련을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빈첸의 방식은 완전히 사장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을 대성하기만 하면…… 지금 형님처럼 사기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심상이 없으니 모든 종류의 심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강화된 신체’와 ‘미전류’ 특성을 발현시켜본 경험이 있는 빈첸이다 보니 이번에는 그 작업이 훨씬 빠르고 수월한 것처럼 보였다.

‘몸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모든 종류의 가호와 특성을 자유자재로 익히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

빈첸의 몸에서 흐르는 마력들이 심상을 자극하였고, 그것은 이내 다시금 홍련으로 흘러 들어가 포르세딘의 가호를 자극했다.

율리안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가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무엇인가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완성된다면, 분명히 특성이 발현될 것이다.

포르세딘의 가호를 지녔던 자들은 모두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이었다.

용왕 아벨탄처럼.

한편, 헤나는 먼발치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도 모르게 명상에 빠져든 모양이군.’

그녀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검을 뽑은 뒤 주변에 기감을 흩뿌렸다.

이렇다 할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하게 뭐하는 짓이냐, 빈첸. 네게는 심상이 없지 않느냐?’

심상 없이 마력을 운용하는 건 자살행위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저 상태에서 아주 작은 자극만 가해져도 빈첸의 마나는 폭주할 것이다.

세리가 옆에 있다고는 하지만, 헤나의 눈에 세리는 완벽한 호법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빈첸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의 몸은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생도복은 땀에 절어 있었고, 유난히 소금기가 많았다.

“세리.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9시간가량 지났어요.”

세리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아공간을 열어 물과 수건.

그리고 깨끗하게 다린 생도복을 하나 내밀었다.

“여벌 생도복까지 챙겨 다니는 거야?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

“혹시 몰라 몇 벌 들고 다니는 것뿐이랍니다.”

세리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성취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제 예감이 맞나요?”

“길은 봤어. 시간만 있으면 완성할 수 있을 거야.”

“축하드려요! 역시 공자님은 대단하세요.”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잖아.”

“대단한 걸 하셨겠지요.”

세리는 무한한 믿음과 신뢰를 담은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받아본 적이 없던 빈첸은 괜스레 조금 민망해졌다.

빈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무 뒤쪽으로 가서 제복을 갈아입고 나와 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9시간째 호법을 섰던 헤나 쪽이었다.

빈첸이 그곳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세리는 뭔지도 모르고 그저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빈첸에게 고마운 사람이면 자신에게도 고마운 사람이니 따라서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헤나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빈첸과 세리는 미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 * *

빈첸의 온몸이 땀에 젖었듯, 헤나도 마찬가지였다.

9시간째 호법을 서는 것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기감을 상당히 넓게 퍼뜨려 9시간 동안이나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으니까.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거 보면, 남매의 우애가 좋다고 해야 할지.”

“그저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제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래. 중간보고까지만 했으니까.”

“요새장님은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음, 한 30분 전?”

헤르카가 회복포션을 하나 건넸다.

“몸에 좋은 거야. 마셔.”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빈첸이 왜 다시 저기로 가는지는 알고 있어?”

“예.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어쩌면 빈첸은 저기서 진짜 ‘용왕의 은총’을 가지고 올지도 몰라. 샘나지 않겠어?”

“저는 요새장님께 저희의 임무 과정이 어땠는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헤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예. 저는 빈첸의 지휘를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게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중간보고는 빈첸이 대표하여 올릴 것입니다.

“제게 보고의 권리가 없었던 것처럼, 보상을 획득할 권리 또한 없습니다. 임무의 보상은 빈첸의 것입니다.”

“음, 그렇구나. 알겠어.”

헤르카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근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미리 지키고 있던 거야? 난 사실 네가 윽박이라도 질러서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저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제 임무에는 빈첸을 보호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음, 그래? 빈첸이 도와 달라 손 내밀기를 기다렸던 거 아니고?”

“…….”

헤나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은 없습니다.”

“빈첸이 네 도움 받지 않고 혼자 들어가서 좀 섭섭하고 그렇지?”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지금 드는 네 감정이 서운함이라는 거야. 헤나 생도. 뭐 아무튼, 이동관문의 좌표를 재설정해서 용아인들의 은신처로 움직이는 모양인데 말이야.”

“…….”

“지금 세리의 실력으로는 저 둘만 이동할 수 있어. 그래서 네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거야.”

“그다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을 언급하시는군요.”

“그래? 그럼 그렇다 치지 뭐. 난 가서 맥주나 마셔야겠다.”

헤르카는 또다시 키득키득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시간은 저녁 7시 30분.

슬슬 해가 지는 노을 무렵이었다.

헤르카는 콧노래를 중얼거리며 맥주 가게로 향했다.

“이 맛에 요새장 노릇도 하는 거지.”

오늘은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헤나의 성장을 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형이라 불리던 헤나에게서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헤르카의 눈에는 그게 선명히 보였다.

“빈첸 짜식. 그 어려운 걸 해내네.”

* * *

세리는 스크롤을 손에 들었다.

“파장 동기화 작업을 수행할게요, 공자님.”

그녀의 1고리가 세차게 회전했다.

마력을 뿜어내어 스크롤과 이동관문의 마력파장값을 맞추었다.

“스크롤을 찢으면 일시적으로 마력이 방출되어 미약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그래.”

세리가 스크롤을 찢자 미세한 빛과 바람이 불어왔다.

이동관문에서 푸른 빛이 위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일시적으로 좌표가 재설정되었어요.”

세리가 이동관문 위에 먼저 올라섰다.

“마력파장값 완전 일치. 이동관문 구동에도 이상 없어요.”

품에서 마정석 하나를 꺼냈다.

“제 부족한 마력은 마정석이 대신하여 줄 거예요.”

“꽤 값이 나가는 것 같은데? 어디서 훔친 건 아니지?”

“후, 훔치다니요? 로, 로랑 경에게 선물 받았어요.”

윌슨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선물 받은 게 아니라 반쯤 협박으로 뜯어냈잖아’라고 말을 했을 것이다.

“로랑 경이?”

“네. 로랑 경은 공자님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세리는 로랑과 이러한 대화를 나눴었다.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정석 두어 개 정도 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요? 공자님을 위해 사용할 거니까요.

-마정석을 받아 오라고 빈첸 공자가 시키던가?

-아니요. 공자님은 이런 소소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셔요. 자잘한 걸 챙기는 건 시녀인 제 몫인걸요.

-내 조카는 좋은 사람을 곁에 두었구나.

로랑은 세리에게 양질의 마력이 깃든 마정석을 내준 상태.

어쨌든 세리는 마정석을 도움을 받아 이동관문을 성공적으로 활성화시켰다.

“이동하겠습니다.”

이동관문에 몸을 맡겼다.

숲 내음이 물씬 나는 곳이었다.

울창한 숲속이었다.

데르소나와 시간대가 다른 것인지, 이곳은 한낮이었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새어들었다.

“세리. 내 뒤로 와.”

빈첸이 앞장서서 걸었다.

이동관문의 계단을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제 이름은 빈첸 아덴카. 용아인들의 초청을 받아 이곳을 찾았습니다. 용아인의 수장께서 저를 만나고 싶다 하였습니다.”

저만치 앞.

수풀 사이로 창과 활로 무장한 용아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총 세 명.

“당신이 정말로 빈첸 공자님이신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빈첸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초상화만으로는 확신하지 못한 듯했다.

“빈첸 공자님에게는 시작을 알리는 붉은 검이 있다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빈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라임 무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직후이니, 저토록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들은 한동안 넋 놓고 홍련을 바라보았다.

홍련에서 어떤 기운을 느낀 것만 같았다.

“그 검의 이름이 무엇인지요?”

“홍련입니다.”

홍련.

그들은 홍련의 이름을 곱씹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께 홍련은 어떠한 검입니까?”

“아덴카의 가주 칸의 시작을 알렸던 검. 명장 한센께서 제련하여주신 검. 그리고 현재는 빈첸 아덴카의 시작을 함께하는 검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점이 또 있습니까?”

“용왕의 진전을 품은 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대표로 말했다.

“은인께서 용아인들의 숲을 찾아주셨다. 뿔나팔을 불어라.”

한 용아인이 품에서 뿔나팔을 꺼내 힘차게 불기 시작했다.

뿌우우-!

그러자 숲속 멀리서 뿌우우-!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빈첸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모두 내려놓았다.

창날과 화살촉을 자신들 쪽으로 향하게 두어 적의가 없음을 증명했다.

오른손을 제 심장에 대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이것은 용아인의 방식은 아니라 붉은 요새 생도들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붉은 요새의 방식대로 빈첸에게 경의를 표했다.

“곧 마차가 당도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윽고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 안에는 용아인들의 정신적 지주.

용아인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자가 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빈첸 공자.”

빈첸의 몸이 움찔 놀랐다.

‘저 여인은……!’

얼굴이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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