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4화
시민 대혁명에 묻혀 프란시스 미술관의 200주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상태.
그러나 오늘을 기억하는 자들도 몇 있었다.
그들이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어? 저기 보세요.”
“저게 뭐지?”
땅 밑에서 빛줄기 몇 가닥이 뿜어져 나왔다.
“잘못 본 건가?”
“아니. 저도 분명히 봤어요.”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으나 분명히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땅 밑에서 빛이 나오지?”
그 사람들 중에는 붉은 요새의 요새장 헤르카도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봤다.
‘빈첸이 또 뭘 하고 있는 거야?’
호기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숙련된 무인인 그녀는 빛의 방향을 읽어냈다.
‘빛이 나와서 한 방향으로 향했어.’
그녀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빛은 분명히 광장 쪽으로 움직였다.
“흐음.”
육안으로 봤을 때 크게 특이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헤르카는 턱을 매만졌다.
“여기에는 특별한 문양이 있다고 했는데.”
광장바닥에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상급신들의 가호를 형상화하였으리라 짐작되는 그것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눈에 들어온다고 했었지?”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높이 뛰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헤르카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헤르카는 공중에 뜬 채 바라보았다.
‘신기한 게 보이기는 하네.’
아까 땅에서 빠져나온 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문양들 사이를 빠르게 비집고 움직였다.
‘개중에서 정확히 밝혀진 문양이…… 어디 보자.’
해일의 신 포르세딘.
그의 가호는 거대한 파도와 삼지창을 형상화한 문양이다.
‘저게 빛나고 있네?’
이게 무슨 현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200년간 이런 현상을 발견한 사람도 없었고.
“내가 봐야 뭘 알겠어?”
헤르카의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헤르카는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근처의 나뭇가지를 감싼 뒤 낙하하던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다시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럴 땐 역시 영상기록이지.”
그녀는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을 영상기록석에 담아 보관했다.
공중에 뜬 채 광장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던 헤르카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는 일하려고만 하면 일 빼고 다 재밌나 몰라. 다들 그런가?”
* * *
빈첸이 물었다.
“가보시겠습니까?”
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헤나의 몸은 이미 이동관문 앞이었다.
“무엇하고 있느냐? 어서 오지 않고.”
빈첸은 피식 웃었다.
지극히 헤나답다고 생각했다.
“이동하지요.”
빈첸과 헤나는 나란히 이동관문에 올라섰다.
저절로 마력이 구동되어 둘을 어딘가로 이동시켰다.
‘여긴 어디지?’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인위적으로 구현된 공간입니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마법사가 만들어낸 던전일 확률이 높았다.
굉장히 어두워서 시야확보가 불가능했다.
“누님. 제가 느껴지십니까?”
“목소리는 들리는구나.”
빈첸은 헤나를 느낄 수 있었으나 헤나는 빈첸을 느끼지 못했다.
“너는 내가 느껴지느냐?”
“예.”
“정말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구나.”
헤나는 품 안에서 범용 마정석 하나를 꺼내어 마나를 불어 넣었다.
화악-
상당히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범용 마정석입니까?”
“그래.”
“범용 마정석치고 성능이 엄청난데요.”
마치 빛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용 마정석 같았다.
어지간한 마법횃불보다 더한 밝기를 자랑했다.
“1급 생도가 되면 지급받는 물건이다.”
“그렇군요.”
범용 마정석에도 등급이 있기 마련이었고 헤나가 지닌 것은 상당한 품질의 범용 마정석이었다.
“왜? 탐이 나느냐?”
“여러모로 쓰임새가 좋을 것 같습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선물해 주마.”
“정말입니까?”
“그래.”
“왜 제게 선물을 주십니까?”
“이유는…… 딱히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이제 내게는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것이 이유가 되겠군.”
헤나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빈첸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어두웠던 이 공간은 기다란 통로 형식이었다.
‘결계 등은 느껴지지 않아.’
이렇다 할 함정도 보이지 않았다.
“누님. 인공 던전은 마법사들이 자신의 보물을 숨기거나 자신의 마법력을 뽐내기 위하여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두 경우 모두, 던전 주인들이 온갖 마법과 결계를 펼쳐놓는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든.
마법력을 뽐내기 위해서든.
“보통은 통로에도 트랩 등을 숨겨놓기 마련인데…… 그러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요.”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이렇게 긴 인공 공간을 구현하려면 상당한 마법력을 지닌 마법사였을 텐데요.”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마법 트랩들이 삭아 없어졌거나.
혹은 마법력을 분산하지 않고 한곳에 강력한 함정을 심어놓거나.
어느덧 거대한 문 앞에 닿았다.
“느껴지느냐?”
“느껴집니다.”
문 안쪽에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헤나가 빈첸에게 마정석을 건네주었다.
“네가 맡아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마나를 일정 농도로 유지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빈첸은 마정석을 받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헤나는 움찔 놀랐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헤나의 마나와 빈첸의 마나는 다르다.
헤나의 마나가 끊겼을 때, 빛도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빈첸의 손에 들린 마정석은 계속해서 빛이 났다.
빈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원리는 모르겠으나 꽤 무리했구나.”
“누님께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유지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원리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네가, 나를 가르친다?”
“원리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헤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율리안이 소리쳤다.
-형님! 누님이 웃었어요! 웃었다고요!
‘그게 뭐?’
-10년 동안 한 번도 웃는 걸 본 사람이 없어요!
빈첸은 율리안의 호들갑을 무시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문 앞.
헤나의 등 뒤에 섰다.
“누님.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혹시라도 제가 제 의지로 불을 꺼뜨리게 된다면 말입니다.”
실수로 꺼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불을 껐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때부터 제가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헤나는 빈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은 지켜주마.”
헤나 뒤쪽으로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응당 그림자가 생겨야 할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빈첸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 * *
문 안쪽에는 보물을 지키는 ‘가디언’이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골렘?’
재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크기 약 4미터쯤 되는 골렘이 주먹을 내리쳤다.
육중한 몸에 비해 굉장히 민첩한 몸놀림을 지니고 있었다.
헤나가 빈첸의 몸을 밀었다.
“피해.”
빈첸을 밀어낸 뒤, 그녀는 도약하여 골렘의 주먹 위에 올라섰다.
빈첸은 뒤로 한 발 빠졌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1급 생도의 움직임은 다르군.’
각명식 때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직 생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명의 어엿한 정식 무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빠르다.’
헤나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골렘의 관절들에 검을 찔러 넣었다.
‘누님은 어떤 가호를 지니고 있느냐?’
-조각의 신 미켈리안의 가호를 지녔어요. 미치광이 조각가라는 다소 특이한 이명을 지닌 상급신이에요.
‘미켈리안?’
5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호였다.
-누님은 미켈리안의 가호에서 쾌검류의 특성들을 발현시켜왔어요. 그리고 아덴카의 7개의 묘리 중 쾌(快)와 폭(爆)을 중점으로 익힌 무인이에요.
빈첸은 헤나의 검을 견식했다.
헤나는 확실히 빨랐다.
육중한 골렘은, 그 덩치치고는 빨랐으나 헤나의 움직임을 전혀 쫓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골렘의 공격을 수월하게 피해낸 뒤 관절들에 여러 차례 검을 찔러넣었다.
빈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을 찌르는 게 아니군.’
얼핏 보면 한 번 찌르는 것처럼 보이나, 그 한 번의 찌르기에는 최소 7번 이상의 검격이 담겨 있었다.
‘관절을 하나하나 공략하고 있다.’
헤나에게 공격당한 관절에는 마나가 잔류해 있었다.
그때,
골렘이 우어어-! 괴성을 질렀다.
주변의 마나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골렘의 눈에 붉은 기운이 깃들었다.
그 기운은 가히 폭발적인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노리는 것이 헤나가 아닌 빈첸이었다.
“빈첸!”
헤나는 즉시 공격을 멈추고 빈첸 앞으로 이동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골렘의 눈에서 붉은 광선포가 쏘아졌다.
아덴카 폭검(爆劍) 제5식.
방탄굴절(防彈屈折).
헤나는 골렘의 광선포를 튕겨냈다.
아덴카의 마나가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골렘이 쏘아낸 광선포의 방향을 왜곡시켰다.
최소의 힘으로 최고의 효율을 추구했다.
그녀의 방어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곳이 인공적으로 구현된 공간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뿔싸!’
천장으로 굴절된 광선포가 천장과 부딪쳐 다시 아래로 쏘아졌다.
수직 방향으로 반사된 광선포는 처음부터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듯했다.
그 사이,
골렘의 거대한 주먹이 헤나를 향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둘 다 방어는 못 한다.’
광선포로부터 빈첸을 보호해 주든,
골렘의 주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든.
찰나의 순간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광선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튕겨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충격을 받아내어야 저 광선포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런데,
빈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뭘 하는 것이냐!’
빈첸은 오른손에 마정석을 들고, 왼손으로 홍련을 쥐었다.
그리고 하나의 검식을 운용했다.
아밀룬 제3검식.
중검첩방(重劍疊防).
쾅-!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빈첸의 홍련이 골렘의 주먹을 막아냈다.
충격이 어찌나 큰지 빈첸은 한 움큼 피를 토해냈고, 골렘의 몸은 한참이나 진동했다.
그사이 헤나가 광선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 무슨 위험한 짓이냐?”
“누님이라면 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일 것 같았습니다.”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한 번은 막았으나 두 번은 막기 어려울 것 같았다.
상당히 강한 가디언이었다.
“그럼 누님은 제가 지켜야지요.”
헤나는 재빠르게 움직여 멈춰버린 골렘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빈첸은 신기한 눈으로 헤나의 검을 눈에 담았다.
‘잔류된 마나들이 서로 공명하며 연결되고 있다.’
각 관절에 남아 있던 마나들.
그것들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골렘의 마력회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마나가 서로 부딪친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강력한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헤나가 검을 뻗었다.
아덴카 폭검 제7식.
폭음세계(爆音世界).
골렘의 신체 내부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골렘의 단단한 몸이 모조리 박살 났다.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헤나는 빈첸 앞에 서서 묵묵히 충격파를 막아주었다.
“골렘을 이렇게 부숴버리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은 핵을 찾아서 부술 텐데요.”
몸과 함께 핵 전체가 박살 나버린 모양이었다.
가공할 만한 힘이었다.
“8급 생도가 저 정도 골렘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손에 빛을 내는 마정석을 든 채로 말이다.
마정석에 마나를 계속해서 불어넣고 있었다는 뜻이다.
빈첸은 지금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냈다.
“일격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내 말을 저버리지도 않았구나.”
헤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마 더 놀라셔야 할 겁니다.”
“뭐?”
빈첸은 왼손으로 통하는 마나를 끊어버렸다.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헤나는 아까의 약속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제가 제 의지로 불을 꺼뜨리게 된다면 말입니다.
-그때부터 제가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빈첸이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크게 말했다.
“영살자들은 모습을 드러내라. 너희 아스비온을 다스리는 자가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