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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13화 (113/184)

환생의 정석 113화

천장으로부터 전달된 빛이 1층을 통하여 지하까지 전달되었다.

그 빛은 폐쇄된 이동관문과 반응하여 특별한 문양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포르세딘의 가호?

광장에도 새겨져 있는 문양.

매년마다 천창을 통한 빛줄기로 만들어지는 문양.

그리고 지금, 이동관문 위로 피어오르고 있는 문양.

이 모두가 포르세딘의 가호였다.

빈첸을 뒤따라온 헤나는 피어오르는 가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누님. 포르세딘의 가호가 틀림없습니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빈첸은 홍련을 쥐고서 가호 앞으로 다가섰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저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전에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있을 때에, 저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힘?”

“바로 이것입니다.”

빈첸은 미전류 특성을 이끌어냈다.

홍련에 약한 뇌기가 실렸다.

“뇌력거인의 힘 말이냐?”

“예. 본래 이 힘은 제 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뇌력거인의 가호로부터 발현시킨 특성이며, 본래는 말론 아덴카의 힘이었다.

헤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빈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빈첸은 눈을 뜨고 가호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얼마나 유지되겠느냐?’

-날마다 달라요. 통상 15분 정도 유지된다고 알고 있어요.

빈첸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몇 분의 여유는 있었다.

‘말론의 가호를 흡수한 것은 우연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우연으로부터 배웠다.

가호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말론 아덴카 때에 느꼈던 감각이 지금도 느껴지고 있었다.

‘프란시스 에일롬이 나를 위하여 가호를 준비해 주었을 리는 없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프란시스 에일롬은 예술가였다.

지금의 저 빛으로 이루어진 문양도 예술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 문양이야말로, 프란시스가 남긴 최고의 역작이었겠죠. 그러니까 회고록에 용왕의 은총이니 뭐니 언급한 것일 테고요.

지난 200년간,

지하에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거다.

이곳을 관리하던 헬라임은 이 현상을 알고 있었겠으나 대중에 발표하지는 않았다.

-헬라임도 이 문양이 용왕의 은총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겠네요. 여지껏 비밀로 해왔던 걸 보면.

200년간 헬라임도 헬라임 나름대로 ‘용왕의 은총’에 대해 연구했겠으나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역시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니까.

율리안도 입을 다물었다.

빈첸의 집중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침묵을 유지했다.

빈첸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우연히 이루어졌던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하여.

‘검로를 만든다.’

빈첸이 검을 여러 차례 휘둘렀다.

헤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검격이 간결하고 절도가 있구나.’

일반적인 다른 무인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빈첸의 검은 상당히 깔끔했다.

마치 ‘특성 없는 검’을 아주 오랜시간 다뤄온 것 같은.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 왔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못난이 빈첸이라 조롱받던 그 시절부터 꾸준히 몸에 배게 했을 것이다.

‘심상이 없으므로 기본에 충실했던 건가.’

현대무인에게 있어서 심상을 익힐 수 없는 체질은 곧 저주였다.

화가라는 꿈을 꾸는 것보다 더한 저주.

그런데 빈첸은 그 저주를, 단순하고 지루한 노력으로 주파한 듯 보였다.

헤나는 묵묵히 빈첸의 모습을 계속 눈에 담았다.

그녀는 자신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닫았지만, 빈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빈첸의 모습은 헤나의 마음이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얼마나 많이 같은 검을 휘둘렀느냐.’

그리고 그때,

빈첸이 눈이 번뜩였다.

‘뭔가가 부족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해일의 신 포르세딘의 가호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무엇이 부족한가.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검로가 틀렸나?’

아니었다.

검로는 정확했다.

-형님. 알 것 같아요.

‘뭐지?’

-형님이 맨 처음 말론을 베었을 때를 생각해봐요. 그때에는 뇌력거인의 가호를 흡수하지 못했어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무인이 함부로 제 손목을 걸면 쓰나.

말론은 그때 손목을 잃었고, 이후 바르곤과 신관의 도움을 받아 회복했었다.

그때에는 분명 가호를 흡수하지 못했었다.

가호를 흡수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말론이 악령과 계약하여 생도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그때였다.

빈첸은 악령계약을 마친 말론과 대적하면서 말론의 검을 잘라냈었다.

-빈첸, 네 이놈! 무슨 술수를 벌인 거냐!

이후,

오른 손목부터 시작된 잠식이 말론을 잡아먹었었다.

-그때는 ‘악령계약’이라는 조건이 있었어요.

빈첸은 단순히 말론을 벤 것이 아니었다.

악령계약을 맺었던 말론을 벤 것이었다.

-아무래도 가호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악령계약’이라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악령계약자의 피가 필요하다거나, 악령계약자의 몸에 가호를 먼저 이식하고 빼오거나.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빈첸은 홍련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빈첸은 폐쇄된 이동관문에 그 피를 떨어뜨렸다.

신기한 건, 빛으로 이루어진 문양 위에 그 피가 묻는다는 점이었다.

‘지금.’

빈첸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순식간에 ‘피 묻은 가호’를 베었다.

“누님. 호법을 부탁합니다.”

곧장 그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 * *

한 차례.

두 차례.

마력자전을 이어갔다.

‘명상을 할 때에는 역시 보이는구나.’

뇌력거인의 가호를 얻었을 때와 똑같았다.

그때에도 명상을 하면 보였다.

당시에도 홍련에 뇌력거인의 가호가 새겨졌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네요.

예전에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하나였다.

[-형님이 이능검격으로 말론을 베어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거기에 하나가 더해졌다.

-형님이 이능검격으로 가호를 지닌 악령계약자 혹은 악령계약을 베어내면 가호를 흡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짧은 시간에 형님 피를 묻힐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나도 모른다.’

그냥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다.

언제나 그랬듯, 빈첸은 직감으로 움직였고 율리안은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어 해석했다.

-부랑자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죠. 창고 직전에 악령계약을 강제로 맺게 하는 흑마법진을 통과했었잖아요.

‘그랬지.’

빈첸이 마나공명을 일으켜 그 마법진을 터뜨렸었다.

-형님의 그 무식하리만치 단단한 정신력에는 흠집도 못 내기는 했지만, 형님의 신체에 ‘악령계약’의 기운이 깃들게 한 것 같기는 해요.

그래서 그 피가 가호와 반응하였고, 빈첸이 성공적으로 포르세딘의 가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악령계약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몸에 아주 조금 잔재된 악령계약의 잔재를 형님의 피가 증폭해서 이런 기적을 일으켰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요? 형님 생각은 어때요?

그런데 빈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형님?

빈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율리안은 직감할 수 있었다.

-형님. 방금 내 목소리 안 들렸죠.

‘무슨 목소리?’

-어째서 형님 몸에서 악령계약의 잔재가 증폭되었는지,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형님 생각을 물었는데요.

그러나 율리안의 목소리는 빈첸에게 닿지 않았다.

‘말을 하거라.’

-제 말이 형님한테 전해지지 않아요.

‘그러냐?’

-별로 안 놀라네요.

‘내 목소리가 너한테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내 정체를 말하려고 했을 때에는…….’

-그만! 말하지 마요!

‘알았다, 소리 지르지 마라. 골 울린다.’

빈첸의 말이 율리안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는 듯했다.

다만 빈첸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악마 데이븐과 관련된 생각은 율리안에게 전달되지 않아. 그렇다면 율리안이 내게 하려고 했던 말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겠지.’

어째서인지.

‘대악마 데이븐’과 관련된 내용은 서로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이 또한 아슬란, 너의 안배더냐?’

여전히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충분할 만큼의 명상을 끝낸 빈첸이 눈을 떴다.

“눈을 떴느냐?”

헤나는 흐트러짐 없는 모양새로 빈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니. 나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헤나도 빈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네게 배울 점이 무척 많았다.’

빈첸은 순간, 헤나의 눈에 따뜻함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빈첸의 몸으로 살게 된 이후 이러한 감각에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다.

‘분명히, 나를 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헤나가 물었다.

“왜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빈첸이었다.

“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네 것을 네가 얻었는데 내가 왜 궁금하겠느냐?”

“보통은 궁금해합니다.”

헤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물었다.

“무엇을 얻었느냐?”

“궁금하십니까?”

“…….”

사실 헤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네가 말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저는 아무래도 해일의 신 포르세딘의 가호를 얻은 모양입니다.”

“그래.”

“반응이 별로 없으시군요. 예상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헤나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말론 아덴카가 지니고 있던 ‘뇌력거인’의 가호를 얻었으니, 다른 가호를 얻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상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헤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걸 진짜 해낼 줄은 몰랐지만.”

“저, 잘했습니까?”

“…….”

헤나는 빈첸과의 대화가 영 익숙하지 않았다.

포르세딘의 가호를 얻은 것은 분명 잘한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묻는단 말인가.

“잘했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 내 칭찬이 중요한 것이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은 좋을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다니.

헤나는 빈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게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건 알겠다. 새로 얻은 그 힘을 갈고닦아 네 갈망을 이루어보도록 하여라.”

빈첸이라면,

어쩌면 사미온을 넘어서겠다는 그 갈망을 진짜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얻은 힘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내게도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친구를 만드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약점을 잡혀 뒤에서 칼 맞기 아주 좋은 방법이구나.”

“누님은 제 등에 칼을 꽂으실 생각이 없지 않으십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제 갈망이 이루어져야 누님의 갈망도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빈첸이 높은 곳에 올라야 헤나도 자신의 짐을 덜어놓고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아닙니까?”

“말로는 널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헤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님 덕분에 저는 이곳에서 기연을 얻은 듯합니다.”

“네가 잘한 것이다.”

“칭찬해 주셨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빈첸이 씨익 웃었다.

왜인지, 헤나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저희 임무는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

“저기 보십시오.”

폐쇄된 이동관문.

아까까지 가호를 생성시켰던 그것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동관문의 마력회로가 구동되고 있었다.

“이동관문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마나 흐름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재배열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동관문의 이동 목적지가 변경된 것 같구나.”

그간 폐쇄되어 있던 이동관문이 스스로 힘을 발현하여 이동 목적지를 변경하였다.

“어쩌면 진짜 ‘용왕의 은총’은 저곳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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