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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12화 (112/184)

환생의 정석 112화

헤나가 검을 뽑은 뒤 몸을 돌려 빈첸을 바라보았다.

“내 임무가 너를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기세를 풀고 예의 있게 굴거라.”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헤나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빈첸은 여전히 기세를 풀지 않았다.

칸과 베르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빈첸이다.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용아인들은 자신들의 알을 끔찍하게 아낍니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전사들도 있죠. 그런데 당시 2급 생도였던 누님이 어떻게 수백 개나 되는 알을 구해올 수 있었을까요?”

“…….”

“누님의 임무가 애초에 왜곡되고 더러워져 있던 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헤나가 한 마디로 일축했다.

“쓸모없는 소리.”

“아뇨. 누님은 알고 계십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2급 생도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한 임무였다는 걸.”

헤나는 임무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태까지 해당 임무에 대해 깊은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뿐이지. 누님이 바보는 아니지 않습니까?”

“요점이 무엇이냐? 임무 자체가 잘못되었고, 잘못된 임무를 수행한 내가 잘못이라는 질책을 하는 것이냐?”

“그것뿐이면 다행입니다. 임무가 잘못된 수준이 아니라 아주 더럽게 변질된 계략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님은 수백 개의 알을 구해오면서, 그 알이 진짜 알로 굳게 믿고 있었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 틀리지 않았다.”

2년 전.

헤나는 분명 임무를 완수했고, 헬라임으로부터 큰 공적을 인정받고 파란 보석도 수여받았다.

그게 1급 생도로 승급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알은 분명 가짜였습니다. 누님이 경험한 모든 것들이 정교하게 구현된 가짜라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2급 생도이자 아덴카의 3공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한 마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님이 정말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을 만큼.”

“…….”

헤나의 몸이 아주 가늘게 떨렸다.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빈첸은 그 떨림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느새, 빈첸을 향한 압박감도 사라져 있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이쯤 되면 누님도 감이 오시겠지요. 누님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만큼 정교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자. 그리고 헬라임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자.”

“6마탑주 헬리오스.”

마탑과 헬라임 사이의 공식적인 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

헬리오스가 지하로 향하는 ‘게이트’를 봉쇄했다는 사실도 밝혀진 건 아니었다.

“예. 헬리오스가 맞을 겁니다. 그들은 그저 누님이라는 알리바이가 필요했을 겁니다. 알을 구해온 자가 누님이라는 알리바이요.”

“왜 그들이 그렇게 해야 했지?”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비열한 방법으로 알을 미리 빼냈을 테니까요.”

전쟁 중에도 금기시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흑마법사와 언데드를 동원하여 상대가문을 공격한다거나.

수많은 마법사들을 활용한 무차별 광역 마법으로 민간인들을 크게 희생시킨다거나.

독극물과 저주 등을 사용하여 지나치게 비인륜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살상한다거나.

“전쟁 중에도 금기시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건 전쟁도 아니고 일방적인 침략이었겠죠. 그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누님이 알을 빼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여, 그들에게는 증인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

“어쩌면 심판의 탑에서 누님의 증인출석을 요청할지도 모릅니다.”

“…….”

“저는 누님을 힐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님을 그런 식으로 이용한 그들에게는 무척 화가 납니다.”

헤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붉은요새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아뇨. 아마 아닐 겁니다.”

헤나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임무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면서, 훗날 정치적인 유불리와 상관없이 사실대로만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누님을 직접 지목한 겁니다. 직접 지목임무라면 저도 수행해 본 적이 있습니다.”

빈첸은 ‘변이 고블린’과 관련된 임무를 받았었다.

그것은 장로원을 통해 붉은 요새에 전달된 임무였고, 빈첸을 직접 지목하여 내려진 임무였다.

분명히 그런 방식의 임무전달도 존재한다.

“저를 직접 지목한 자는 아덴카의 틸로반 장로였습니다. 누님은 어떻습니까?”

“나를 지목하여 임무를 내린 자도 그자였다.”

빈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으나 그자는 사미온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흑마법에도 손을 댔었지요. 더러운 짓을 꾸미기에 충분한 자입니다. 틸로반이 누님을 지목하여 임무를 수행시켰다는 건, 어쩌면 사미온도 이번 사건에 개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깊은 고심에 빠졌다.

‘사미온, 틸로반 장로, 6마탑, 헬라임. 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라.’

이번 지하사건은 단순히 ‘지하’로 끝날 사건도 아니었다.

‘지하’ 이전에는 부랑자 수용소의 ‘창고’가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지하’는 ‘창고’의 상위개념이었다.

‘부랑자 수용소에서 악령계약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지하에서 은총을 통해 완성되었다면…… 흑마법사들도 관련이 되어 있겠지.’

율리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키워드가 스치고 지나갔다.

‘악몽.’

미지의 세력 ‘악몽’이 존재했다.

사미온.

틸로반 장로.

6마탑.

헬라임.

흑마법사.

이 서로 다른 5개의 키워드들이 완벽히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연결고리가 약간은 부실했다.

‘그 연결고리를 악몽이 채워주고 있다면 말이 되는데.’

빈첸이 말했다.

“누님은 알을 구해오지 못했습니다. 마법에 속아서 임무를 완수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님의 임무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임무를 성공했다고 기만당했습니다.”

“…….”

헤나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자, 자, 잠깐만요. 누님 엄청 화난 거 같은데. 이거 우리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율리안은 잔뜩 겁먹었으나 빈첸은 오히려 헤나를 더 자극했다.

“화가 난다면 화를 내십시오.”

그 말에, 헤나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흐에에엑!

돌로 만들어진 벽면에 기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빈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갔다.

빈첸은 꼿꼿이 서서 헤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님은 인형이 아닙니다.’

헤나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분노라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가슴 속이 들끓었으나 헤나는 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빈첸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분출해도 되었을 텐데.’

빈첸이 보는 헤나는 여전히 인형에 가까웠다.

검격 한 번으로 10년 동안 묵힌 감정을 쏟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도 누님이 저 정도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요. 형님 옛날에 계략에 당해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 정도 말빨이면 그럴 일 없을 거 같은데.

‘이런 건 말빨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런 거 치곤 엄청 차분하고 이성적이던데.

율리안이 흐흐-웃었다.

-아주 음흉한 영감님이야, 마음에 쏙 들어.

헤나는 무감정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며 호흡을 가다듬기만 했다.

겉으로는 그랬으나 마음속에는 뜨거운 해일이 일고 있었다.

그 해일을 가라앉히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빈첸은 그동안 잠자코 헤나를 기다려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헤나가 말했다.

“네 속셈이 이것이었느냐? 나를 자극하여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

“조금은 후련하지 않았습니까?”

“…….”

그 말은 사실이었다.

헤나는 처음으로 후련함을 느꼈다.

“아주 몹쓸 짓을 하는구나.”

헤나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았었다.

꿈을 포기한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였다.

감정을 자각하게 되면, 다시금 그 좌절감을 맛볼 것이 두려웠다.

“모두가 절대적인 무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뭐?”

아덴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말이다.

아덴카의 직계는 모두가 절대적인 무인이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누님.”

“…….”

“저는 언젠가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이고, 더 나아가 사미온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게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빈첸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갈망이었다.

“그렇다면 누님의 갈망은 무엇입니까?”

* * *

헤나와 빈첸은 다시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빈첸의 뒷모습을 보며 헤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네 야심을 응원은 하겠다.’

아버지를 넘어서고 사미온을 굴복시키겠다고 했다.

자신감을 넘어서서 패기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헤나의 눈으로 본 빈첸은 아직 어린 생도에 불과했다.

그 어린 생도가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의 갈망이 무엇이냐 물어본 혈육은 네가 처음이군.’

그리고 그것을 응원해 준 사람도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웃고 계신 것 같은데요.”

“웃지 않았다.”

“웃으셨습니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느냐?”

“누님이 웃으시니 저도 기분이 한결 좋군요.”

“왜? 내가 웃는데 네 기분이 좋단 말이냐.”

헤나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빈첸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보물 같은 건 찾지 못했으나 이곳을 찾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런데 빈첸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지?”

“기이한 마나흐름이 느껴집니다.”

“마나흐름?”

헤나는 눈을 감고 기감을 퍼뜨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헤나는 입을 다물었다.

빈첸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흐름이 느껴지지?”

“마법에 가까운 흐름입니다.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너는 이곳에서 고민해 보아라.”

헤나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형님, 정오가 됐어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

5월 31일 정오.

햇빛이 유리를 통과하여 특별한 가호의 문양을 그려내는 날.

빈첸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헤나는 그 문양을 직접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 것이다.

“1층에 새어드는 빛 문양. 그건 진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누님.”

“뭐?”

“이 기이한 마나흐름이 어디서 느껴지는지 알 것 같습니다.”

빈첸의 눈이 계단 아래를 향했다.

“폐쇄된 이동관문.”

이동관문.

현대마도공학의 집약체로서, 마나를 다루어 구동된다.

마나를 응집, 증폭, 확장, 산개 등의 수많은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그곳으로부터 기이한 마나흐름이 느껴졌다.

“진짜는 밑입니다, 누님.”

빈첸이 뛰어 내려갔다.

폐쇄된 이동관문.

그곳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렬한 마나흐름과 함께.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인지, 1층의 빛이 이곳까지 반사되어 전해졌다.

“보십시오.”

제단처럼 생긴 이동관문 위로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있었다.

율리안이 기록을 읊었다.

-빛이 이르는 곳에 용왕의 은총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분명히,

지하인 이곳에 빛이 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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