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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11화 (111/184)
  • 환생의 정석 111화

    [붉은 요새의 요새장이 1급 생도에게 전한다.]

    라고 시작되는 임무 하달서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두 가지였다.

    [1. 헬라임 잔당으로부터 빈첸을 보호할 것.]

    [2.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보물을 찾을 것.]

    임무 하달서를 읽은 헤나는 곧바로 검을 챙겼다.

    “가지.”

    “지금 바로요?”

    “보물을 빼앗길 수는 없지 않느냐?”

    그녀는 임무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용왕의 은총이 정말로 있다고 믿으십니까?”

    “무인에게 그것이 중요하느냐?”

    보물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보물을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임무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완전히 배제하는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약간 이상한 임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헤나는 임무에 대해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빈첸은 헤나를 떠보았다.

    “만약 보물이 있었다면 헬라임에서 먼저 찾았을 거예요. 그리고 사방에 유력 명가의 무인들이 깔려 있는데 헬라임 잔당들도 제게 큰 해코지를 하지 못하겠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 요상한 임무이지 않습니까?”

    “무인은 임무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하지 않아.”

    그녀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저 행할 뿐이다. 완수하느냐, 실패하느냐, 그것만이 존재한다.”

    빈첸은 헤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거리는 시민 혁명대의 행진으로 분주했다.

    그들은 투철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총의 부작용으로 몇몇 사람들이 발작하기는 했지만 금방 제압되었다.

    “누님, 프란시스 에일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름 정도는.”

    “저는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셀비라가 보내준 서신에 적혀 있던 ‘프란시스 에일롬’이라는 이름을 기억조차 못했다.

    빈첸에게는 별로 중요한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무인 100명에게 물으면 100명 모두 모른다고 답할 겁니다.”

    “…….”

    헤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이 뚝뚝 끊겼으나 빈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공간에는 도화지와 깃펜이 들어 있었지요. 누님은 여전히 꿈을 간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쓸모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재주가 있구나.”

    빈첸이 말을 이었다.

    “임무 수행을 위하여 공부를 좀 해왔는데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하루만 공부해도 대부분의 것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빈첸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율리안이 기억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프란시스 에일롬이 사실은 용아인의 피를 이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숨겨놓은 보물도 ‘용왕의 은총’이라고 불린다는 얘기가 있지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프란시스 에일롬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니. 다만 그가 상당한 예술적 교양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예로부터 용아인들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져 있었거든.”

    빈첸과 헤나는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미술관의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민대혁명’에만 주목하느라, 200주년을 맞은 프란시스 기념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이렇다 할 행사도 벌어지지 않았다.

    “광장을 통해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구조에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다양한 문양들이 보인다고 해요.”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군.”

    “어떤 모양들인지 궁금하지는 않으신가요?”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상급신들의 가호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하더군.”

    “개중 가호를 정확히 구현한 문양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신지요?”

    “해일의 신.”

    해일의 신 포르세딘.

    역사적으로 포르세딘의 이름은 몇 번 등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세딘은 최상급신으로 분류되었다.

    약 200여 년 전, ‘용왕(龍王)’ 아벨탄이 포르세딘의 가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왕 아벨탄은 용아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입지전적인 영웅이라 들었습니다. 얼마나 강했을까요? 아버지보다 더 강했을까요?”

    “그는 이미 죽었으니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빈첸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헤나와 함께 걸었다.

    미술관 입구에 도착했다.

    여전히 관리인은 보이지 않았다.

    “200년 역사를 지닌 곳인데, 관리자가 아무도 없네요. 로랑 경에게 말해서 얼른 조치를 취하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

    미술관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미술관의 천장이 굉장히 높았다.

    천장은 불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들여 흩뿌리는 구조였다.

    “매년 5월 31일. 정확히 낮 12시가 되면, 이 투과되는 햇빛이 특별한 문양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마침 오늘이 5월 31일이었다.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은 헬라임과 그 역사를 같이 했으니, 하이데스 회동과 날짜가 거의 겹친 것이었다.

    “몇 시간 후면 볼 수도 있겠군요.”

    “…….”

    곁눈질로 헤나를 살펴보았으나. 헤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면 프란시스는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군요.”

    빈첸은 헤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헤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햇빛이 만들어내는 문양이 포르세딘의 가호의 모양과 같다고 해요. 혹시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

    벽면에는 프란시스가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란시스는 일곱 살부터 천재적인 그림실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즈음부터 극사실주의를 표방하여 자신의 자화상과 주변 지인들을 그려주었다고 하는데…… 아, 저기 있다. 저기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저 그림은 당시 유명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상이더라…… 레일…… 뭐였는데.”

    “레일트라 상.”

    “아! 맞습니다. 그 상을 열한 살에 받았다고 해요. 최연소 수상자이고, 거의 200년 동안 그 기록은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누님보다 못한 것 같은데 말이죠.”

    빈첸은 다시 한번 헤나를 살펴보았다.

    마침 헤나와 눈이 마주쳤다.

    헤나가 은은한 노기를 드러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임무를 위해서 배경설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모습에 율리안이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지금, 헤나 누님이 화내신 것 같은데요?

    ‘내가 봐도 그렇다.’

    -누님은 인형인데. 화를 낼 줄 안단 말이에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감정이 없다면, 감정을 스스로도 모르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경우뿐이다.

    빈첸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10년 전 누님이 그려주신 초상화가 더 잘 그린 것 같습니다.”

    10년 전 헤나는 9살이었다.

    “만약 출품하기만 했다면 최연소 수상자의 명예는 누님께서 거머쥐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건 명예가 아니다.”

    적어도 ‘아덴카’에서는 그랬다.

    아덴카의 무인에게 있어서 ‘레일트라 상을 수여받았다’라는 명예는 명예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무학을 게을리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그럼 노틀베리 상은 어떻습니까?”

    빈첸이 알기로 그림 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바로 노틀베리 상이었다.

    1년에 한 번, 노틀베리 가문에서 선정하여 상을 수여한다.

    “저는 누님이 노틀베리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치 귓가에서 앵앵대는 모기 같구나.”

    빈첸이 화들짝 놀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크, 손바닥에 맞아 죽지 않으려면 조금 떨어져야겠군요.”

    “…….”

    율리안은 점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가 아는 누님의 모습이 아닌데요. 지금 분명히 화를 내고 계세요.

    1급 대표 생도 헤나 아덴카.

    검을 쥔 그녀는 분명히 ‘인형’이었다.

    그런데 프란시스 미술기념관을 찾은 헤나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인형의 껍질을 깨고 본연의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다.

    빈첸은 다시금 헤나 옆에 따라붙어서 말을 꺼냈다.

    “여기서부터는 10대 중반에 그렸던 그림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가 회고하기를, 작가병에 걸려 있던 시기라고 하더군요.”

    형형색색의 난해한 그림들이 보였다.

    어떤 것은 점과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초록색 점 하나가 찍혀 있는 이건 무슨 작품인가요?”

    작품의 제목은 ‘눈물’이었다.

    헤나는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하여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누군가를 소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았다고 하더군.”

    “예술의 세계는 참 심오하군요.”

    “…….”

    헤나가 걸음을 멈춰 섰다.

    프란시스가 20대 중반에 그린 그림이었다.

    은색 갑옷을 입은 한 남자가 수많은 시체 위에 올라서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용왕 아벨탄을 그린 그림이군요. 사실 프란시스는 용왕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해요. 순수 상상으로 그려낸 것인데, 실제 용왕과 무척이나 흡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요. 아참, 저기 쓰러진 자들 중에 특별한 게 있다는 건 아시죠?”

    수많은 시체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

    아덴카를 상징하는 ‘태양’이 그려진 제복을 입은 자였다.

    “당시 용왕이 아덴카의 가주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요. 당시의 가주께서 피를 많이 흘려 용왕의 발을 적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용아인들은 그렇게 믿더군.”

    여전히 헤나는 무표정이었으나 그림에 머무는 시선의 시간이 많이 길어졌다.

    미술관이라는 환경과 빈첸의 계속되는 질문이, 그녀 안에 꼭꼭 숨겨져 있던 꿈을 연신 자극하고 찔러댔다.

    빈첸과 율리안은 그걸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누님. 누님은 용아인에 대해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

    헤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벽면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었다.

    헤나는 그곳에 손바닥을 대고 마나를 일으켰다.

    “뭐하십니까?”

    그 말과 동시에 벽면이 옆으로 회전했다.

    이 그림 자체가 하나의 회전문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길?’

    헤나가 앞장서서 걸었다.

    “가자.”

    “이 길을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혹여 정말로 보물이 있다면 이곳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

    “이 길은, 혹시 2년 전 누님의 임무와 관련이 있습니까?”

    시민들이 서로 분열하여 적극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던 그때가 2년 전이었다.

    헤나가 헬라임으로부터 ‘파란 보석’을 받았을 때와 일치했다.

    헤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2년 전 임무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 통로를 통하면 폐쇄된 이동관문이 있는데, 그걸 살려서 용아인들의 마을로 갔다는 것입니까? 헬라임도 그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고요.”

    “그래.”

    “2년 전, 누님은 용아인들의 알 수백 개를 훔쳤고요.”

    “내게 부여된 임무는 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게 용아인들의 알이지 않습니까!”

    용아인들은 사람과 거의 똑같다.

    화가 나면 비늘이 돋기도 하고 파충류처럼 눈이 가늘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나 아주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헬라임은 누님으로부터 알을 받고, 파란 보석을 건네준 것이었군요.”

    그리고 헬라임을 알을 가지고서 용아인들을 협박했다.

    ‘알’을 극도로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습성을 이용하여 용아인 전사들을 감금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헬라임은 용아인들을 납치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사실상 연구는 마무리 단계였을 겁니다. 마지막 재료가 용아인이었을 뿐이겠죠.”

    그를 통해 ‘은총’을 완성시켰고 결국 악령 군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빈첸이 자리에 멈춰 섰다.

    “누님은 임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임무는 완수하느냐, 실패하느냐,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셨죠. 그러나 그때에도 과연 그러했습니까?”

    빈첸의 기세를 읽어낸 헤나도 멈춰 섰다.

    빈첸의 기세가 자못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예의 있게 굴거라. 내 적이었다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누님은 누님이 구해왔던 알들이, 사실 용아인들의 알이라는 것을 설마 몰랐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말투가 꽤 공격적이었다.

    “수많은 용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분열하여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면서 많은 자들이 죽었고 로랑 경은 눈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

    “시간이 더 흘렀다면, 수많은 자들이 악령 군대가 되어 희생되었을 것이고 세계는 혼란에 휩싸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누님의 임무 이후로 시작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까? 그때의 헤나 아덴카는 진정 옳았습니까?”

    율리안은 빈첸을 말리지 않았다.

    빈첸의 태도는 상당히 감정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계산하에 이어진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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