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0화
1급 생도들의 눈이 번뜩였다.
“오, 그게 뭐냐?”
“네가 그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있단 말이냐?”
다들 호들갑을 떠는 가운데 빈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나일 폭포. 그리고 천과(天果)와 관련된 것입니다.”
빈첸은 베르사에게 들었던 것들을 1급 생도들에게 전했다.
본래는 헤나에게만 비밀스레 전할까 하다가 1급 생도 전원에게 오픈했다.
-어차피 현 1급 생도들 모두는 헤나 누님의 사람들이에요. 모두에게 정보를 알리는 쪽이 추후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빈첸은 설명을 끝냈다.
“……라고 합니다.”
생도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빈첸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래. 얘기 자체는 재미있네. 그런데 네 말이 진짜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거냐?”
“으하핫, 네 선배들을 기망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얘기는 제 어머니인 베르사 부인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한 기밀사항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누님과 선배님들께 말씀을 드려도 괜찮다 판단하였습니다.”
헤나가 포크를 내려놓고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러한 것들을 알려주는 연유가 무엇이냐?”
“저는 천과를 반드시 얻고 싶거든요.”
많은 생도들이 ‘천과’를 전설로 치부한다.
사실상 천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건 비단 현세대 생도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붉은 요새가 세워진 이래로 거의 모든 세대에서 그러했다.
그건 현 1급 생도와 헤나 아덴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으로써 천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누님과 선배님들이시않습니까?”
“설령 네 말대로 내가 천과를 얻는다 하여도, 그것은 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빈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정보를 드렸으니, 누님께서도 정보를 주십시오.”
“정보?”
“제 생각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천과를 발견할 수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누님은 천과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헤나가 천과를 얻든, 얻지 못하든, 그건 빈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제게 가르쳐주십시오. 그 과정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님과 달리, 저는 천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천과 같이 허황된 것에 집착하지?”
“저는 반드시 사미온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빈첸의 당돌한 말에 1급 생도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빈첸을 무척 귀엽게 바라보았다.
“패기가 제법이군.”
“나도 9급 때에는 그랬는데.”
“아냐. 쟤 벌써 8급으로 승급했잖아. 아니다. 곧 7급이겠네.”
“벌써 7급이라고?”
“그 정도면 데이아 공녀님보다 더 빠른 속도 아닌가?”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했다.
다만 헤나에게서 표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정보를 쥐어주고서, 정보를 달라 요청하는 모양새가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제가 그리도 뻔뻔한가요?”
“몹시.”
“아까 선배님들께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빈첸의 시선이 안경 쓴 한 생도를 향했다.
그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리고 누님께서는 제 도움에 대한 값을 아직 완벽히 치르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그림을 그려주시지 않았으니까요.”
헤나는 빈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엇을 원하느냐?
-누님의 그림을 선물해 주세요.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오너라. 값을 지불할 테니.”
* * *
빈첸은 헤나가 머무는 방으로 올라갔다.
꽤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역시 1급 생도쯤 되면 임무 할당비도 충분한가 보네요. 이 정도 시설이면 하루 숙박하는 데 30만 루덴 정도는 할 텐데.
헤나의 방에 들어섰다.
이후 헤나를 모시는 시종이 다가와 차를 내어주었다.
“데르소나의 명물이라 알려진 녹차잎으로 우려낸 차입니다. 좋은 시간 나누시길.”
시종이 나가고 난 뒤.
헤나가 말했다.
“초상화면 되겠지.”
헤나는 아공간에서 작은 도화지와 깃펜을 꺼내었다.
“네가 원한 것이다.”
헤나는 빈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 빚을 ‘그림 따위’로 갚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았으나, 빈첸 스스로가 원한 것이기에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빈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헤나는 그림을 완성했다.
“값은 치렀다.”
“고맙습니다.”
빈첸은 헤나가 전해준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마치 마법으로 기록한 것처럼 정교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 기쁘군요.”
“나가 보거라.”
“이토록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첸은 헤나가 그려준 그림을 소중한 보물처럼 다루었다.
헤나는 그러한 빈첸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빈첸은 헤나에게 인사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근데 뭘 하고 계신 거예요? 그림은 왜 받았어요?
‘좀 솔직해져라. 너도 좋잖냐?’
10년 전, 헤나가 그려준 초상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율리안이다.
실제로 율리안은 지금 제법 기뻐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동조율이 높아져서는. 쳇. 그래서 속셈이 뭐예요?
‘그림을 그리는 누님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더군.’
-아름답다고요?
그것은 외양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빈첸의 시선에서 보면 헤나는 아직 10대의 아이였다.
‘가슴 속에 꿈을 간직한 아이의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법이 아니겠느냐?’
-와, 방금 진짜 영감님 같았어.
‘네 눈에는 어땠지?”
-검을 쥐었을 때보다 훨씬 더 즐거워 보이기는 했어요.
게다가 헤나는 아공간에 도화지와 펜을 가지고 다녔다.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만의 꿈을 숨겨놓았다는 뜻이었다.
-누님은 여전히 무인보다는 화가가 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덴카는 정통의 무가(武家)다.
‘화가의 꿈’ 같은 건 쓸모없기 짝이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진즉에 꿈을 포기했다.
아덴카의 이름을 이었으므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무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네?
빈첸은 율리안의 몸에 내재된 기억들을 끄집어내었다.
‘10년 전의 너는 분명히 헤나를 응원했었다. 헤나에게 그림을 선물 받은 너는 크게 기뻐하며 활짝 웃었었지. 그때 헤나의 얼굴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아무리 환생을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히 기억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만큼 율리안의 기억이 강렬했다는 소리였다.
‘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헤나도 웃었다. 10년 전에는 분명히 그랬는데 지금은 감정 없는 인형이라 불리고 있지. 마음 아프지 않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누님의 감정을 되찾아주자? 꿈을 응원해 주자? 뭐 그런 거예요?
‘이래저래, 헤나를 신경 써주고 싶은 건 사실이군.’
-왜요?
‘원한은 두 배로 갚되, 은혜는 열 배로 갚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네게 잘해준 몇 안 되는 사람이지 않느냐?’
그리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마음이 있었다.
‘나는 이 가문 아이들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아덴카.
이 가문은 아슬란이 빈첸을 위하여 안배한 가문이다.
그는 아덴카와 성배를 남겼으며, 붉은 요새와 천과마저 준비했다.
그리고 헤나는 아슬란의 핏줄이었다.
‘내 적이 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라도 이 아이들을 돕기로 마음먹었거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 꿈을 포기하고 억지로 칼을 쥔 아이가 어떻게 큰 무인이 되겠느냐? 어차피 헤나는 무인으로서 대성은 못 해. 그럴 바에야 헤나의 꿈을 응원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율리안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형님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율리안은 빈첸이 조금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감정과는 별개로, 율리안은 율리안의 일을 해야 했다.
-형님은 형님의 일을 해요. 나는 합리적인 전략으로 우리에게 최대한 이득 되는 방향을 생각해 볼 테니까. 헤나 누님의 환심을 살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도 무척 좋을 거예요.
* * *
헤르카는 짐을 싸며 투덜거렸다.
“여기 꿀이었는데.”
현재 데르소나에는 많은 무인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각지의 유력가문들이 ‘헬라임 도시들의 안정’을 위하여 무인들을 파견한 상태.
덕분에 헤르카는 방 안에 누워 빈둥거릴 수 있었다.
“안 돌아가면 바르곤 경이 쥐 잡듯이 날 잡겠지?”
바르곤은 행정업무가 밀려 있어 어제 붉은 요새로 복귀했다.
떠나면서 신신당부했다.
제발 딴 길로 새지 말고 복귀하라고.
그때, 빈첸이 찾아왔다.
“요새장님. 임무 하나만 내려주시면 안 됩니까?”
“임무?”
헤르카는 관자놀이를 살살 긁었다.
“바르곤 2세야. 무슨 임무를 내려줄까? 혹시 뭐, 내가 동행해야 한다거나?”
“그게 아니고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에 견학을 좀 가보고 싶습니다.”
“프란시스? 그게 뭐야?”
“근대 미술사의 거장, 프란시스 에일롬을 기념하는 미술 기념관입니다. 헬라임가와 역사를 같이했기에 곧 2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하더군요.”
“너 그런 것도 알아?”
빈첸이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건 며칠 전 셀비라가 보내주었던 서신이었다.
당시 카곤이 찾아오는 바람에 주의 깊게 읽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근현대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미술가 프란시스 에일롬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되면 한 번……]
“여기에 프란시스 에일롬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빛이 이르는 곳에 용왕의 은총이 있으리라는 글귀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헤르카가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뭐? 빛이 이르는 곳에 용왕의 은총? 푸하하! 그거 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상술이야. 설마 그걸 믿냐?”
“…….”
“그런게 진짜 있었으면 헬라임이 이미 꿀꺽했겠지.”
“헤나 누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왜?”
“헬라임 잔당들이 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무섭습니다.”
헤르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부랑자 수용소에 혼자 잠입해서 창고를 개박살 낸 네가요? 그때 살왕을 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하이데스 회동에 세계 3대 명가를 불러들여 일을 이렇게 크게 키운 네가요? 무섭다고?”
“견학이 끝나면 반드시 대면보고 드리겠습니다. 1급 대표생도의 보고는 직접 받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생도에서 파성무인이 되어가는 시점.
지금은 여러모로 예민한 시기였고, 1급 대표생도의 보고는 요새장이 직접 받는다.
그렇다는 말은 붉은 요새로 복귀가 좀 늦어져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빈첸 생도. 요새장의 권한으로서 임무를 부여하마. 지금 당장 1급 대표생도와 함께 프란시스 미술관에 가보아라. 거기 용왕의 은총이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빈첸이 한 마디를 더했다.
“바르곤 경께는, 생도들의 교양과 안목을 넓히기 위한 숭고한 임무였다고 변명하시면 될 겁니다.”
“그, 그런 변명이 먹힐까?”
“예. 마법사들은 무인들이 공부하기를 원하거든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무인들은 마법사들이 신체를 좀 단련하기를 원한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헤르카는 곧장 바르곤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보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하달하였으며…… 와 더불어…… 교양과 안목을 갖추어 진정한 무인이 되기 위한 교육과정의 하나로써…… 하여…… 복귀가 늦어질 것 같으니 양해를 부탁해, 바르곤 경.]
쓰면서도 헤르카는 반신반의했다.
“아, 진짜로 이런 허술한 변명이 먹힌단 말이야?”
괜히 더 피 보는 거 아냐?
잔소리 때문에 귀에서 피 날지도 몰라.
“그래도 바르곤 2세의 계략이니 괜찮겠지.”
얼마 후.
서신을 전송받은 바르곤이 미소 지었다.
수작질이 뻔히 보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꽤 흡족스러운 제안이었다.
“이제야 헤르카가 요새장다운 생각을 좀 하는군. 1급 생도와 8급 생도의 조합도 신선하고. 상당히 발전적이야.”
교양과 지식.
지적 능력 함양을 중시하는 마법사는 약간 흥분하고 말았다.
“이왕이면 정규과정에 넣으면 좋겠는데. 오늘로 선례가 생겼으니 나중에 정식으로 건의해 봐야겠어.”
그는 곧장 교육 커리큘럼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빈첸은 임무 하달서를 들고서 헤나의 방으로 향했다.
“누님, 요새장님으로부터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저와 연합 임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