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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09화 (109/184)
  • 환생의 정석 109화

    빈첸은 한 단어에 집중했다.

    “선택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그래.”

    빈첸은 율리안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베르사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천과도 중요하거니와 자신의 친어머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척 큰 것 같았다.

    이럴 때 보면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남아 있어 다행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천과수는 흔히 생각하는 나무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거대한 용이지.”

    “예?”

    빈첸은 눈을 크게 떴다.

    용이라니.

    용은 애초에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대부분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는 상태다.

    “정확히 말하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무언가다. 어쩌면 용의 신체를 빌어 누군가 만들어낸 권능일지도 모르지.”

    “권능이라면…….”

    “진짜 생명체가 아니란 뜻이다. 내가 말한 ‘선택’은 천과수가 자아를 갖고 의지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신기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천과수는 나무가 아니며, 실제 용도 아니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미지의 그것은 배 속에서 ‘천과’를 만든다고 했다.

    “특별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천과수는 천과를 뱉는다.”

    “어떤 조건인지요?”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해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제 친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군요.”

    “그래.”

    베르사가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헬라임 마엘 검대 소속의 어린 무인이었다. 네 친어머니인 사르비나는 붉은 요새의 2급 대표생도였고, 네 아버지는 1급 대표생도였다.”

    빈첸은 물론이거니와 율리안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1급 생도들이 파성무인이 되기 전, 반드시 거치는 절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설명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나일 폭포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붉은 요새는 험준한 지형에 자리 잡은 요새이고, 내부에는 거대한 폭포도 존재했다.

    그중 가장 거대한 폭포가 나일 폭포였다.

    폭 700미터, 높이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엄청나게 커다란 폭포.

    “1급 생도들은 폭포로 들어가 폭포 조개의 진주를 캐오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폭포 조개라면…… 폭포 안에만 서식한다는 3급 어패종이겠군요.”

    “잘 아는구나.”

    폭포 조개는 폭포에서만 서식하는 특별한 조개였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껍질과 명검보다 날카로운 촉수들을 가지고 있다.

    “폭포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는 능력을 갖고 있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울뿐더러 물을 사용하여 공격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래. 놈은 물을 빨아들여 대포처럼 쏘아낸다. 무척이나 성가신 마물이지.”

    무척 성가시다.

    그 말이 딱이었다.

    1급 생도들이 합심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아주 성가신 정도.

    율리안이 거기서 이상함을 짚어냈다.

    -1급 생도들에게 불가능한 임무는 아니네요. 그런데 이걸 관례처럼 지켜오고 있는 건 이상해요.

    폭포 조개의 진주는 보물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색깔도 탁하고 냄새가 역해서 말이 진주지, 보석으로 쓰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하기 번거로운 것에 비하여 얻는 것은 너무 없었다.

    “그냥 관례가 아니라……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던 거군요. 그게 천과였고요.”

    “사르비나와 네 아버지는 폭포 안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동굴을 발견했다. 네 친어머니의 왕성한 호기심 덕분이었지.”

    보통의 1급 생도들은 ‘임무’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폭포조개를 사냥하고 진주를 캐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서 ‘붉은 요새’는 지나치는 관문이었을 뿐.

    ‘파성무인’이 그들의 진정한 시작이었으니까.

    매년 이어지는 이 관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네 친어머니는 늘 밝고 명랑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보았고 많은 꿈을 꾸었어. 그녀는 2급 대표생도였으나 실력은 1급 생도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실력은 네 아버지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짐이 없었다.”

    “…….”

    이 또한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아덴카에서 사르비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친어머니는 네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 더 이상 무인으로 살지 않았다.”

    “……어째서입니까?”

    “나일 폭포에 함께 들어갔던 그 시점에, 사르비나는 무인으로서의 힘을 대부분 소실했다.”

    “…….”

    “어떤 연유인지, 사르비나는 그 안에서 발견한 용을 천과수라 확신했던 것 같다. 스스로 용의 입 속에 뛰어들었어. 우리는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 후, 그녀는 스스로 용의 입을 벌리고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사과 모양의 과실이 하나 들려 있었어.”

    “그게 천과였습니까?”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게 천과였던 것 같다. 네 어머니는 반강제적으로 네 아버지에게 천과를 넘겼다.”

    “아버지께서 천과를 섭취하셨겠군요.”

    “아니. 가주께서는 천과 섭취를 거부했다. 그것은 네 어머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르비나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고, 천과는 아덴카의 흑색금고에 보관되었지.”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고 했다.

    사르비나는 점차 야위어갔다.

    “그녀가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반드시 천과를 섭취해 달라고.”

    칸은 결국 유지를 받들어 천과를 먹었다고 했다.

    베르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는 사르비나가 천과를 얻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감수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왜 힘을 잃었는지. 왜 그토록 빨리 죽었어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어. 다만,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자리 잡았다는 것만 알았다.”

    일종의 저주라고 짐작했다.

    빈첸은 베르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을 하는 베르사에게서 여러 가지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쩌면 베르사는 사르비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불쌍히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힘을 잃었어도 그녀는 아덴카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아덴카 무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여인이었다.”

    “어머니에게, 제 친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나 또한 그녀를 존경하고 질시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나일 폭포 안에 어떠한 공간이 있고, 그 안에서 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문제는,

    500년 동안 수많은 생도들 중 그 ‘동굴’을 발견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1급 생도들의 실력으로도 찾기 어렵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겠군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그곳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막상 발견하더라도 천과수의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희생이 뒤따를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빈첸의 눈동자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여러 정황상 ‘붉은 요새’는 아슬란이 남긴 게 맞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천과 또한 나를 위하여 준비해놓은 거야.’

    500년 전의 아슬란은 오늘을 예견했다는 뜻이었다.

    아슬란은 데이븐이 ‘삭아버린 천골’을 지니고 환생할 것을 알았던 것 같았다.

    삭아버린 천골에는 천과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빈첸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치밀한 미래를 준비한 것이냐?’

    단순히 대악마로 기록된 데이븐의 명예를 위해서인가.

    어쩌면 그게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을 뒤로한 채, 빈첸이 물었다.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것들. 천과에 관한 사항은 비밀입니까?”

    “비밀로 규정된 적은 없다.”

    아덴카의 ‘어른’들은 천과 때문에 사르비나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칸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죽은 사건이니, 다들 그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을 꺼려 했다.

    빈첸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네 업적에 응당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베르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 *

    6마탑주 헬리오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선수를 친 놈들이 있었어. 예상은 했었지만…….”

    6마탑은 ‘지하’로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헬리오스 자신이 지하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몸을 사려야만 했었으니까.

    “바롬은 죽었고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사라졌습니다. 흔적을 보아하니 모두 손목이 잘린 상태라 추정됩니다.”

    “영상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영상 기록을 살펴본 헬리오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빈첸이 가장 먼저 급습하였고, 베르사가 완벽하게 마무리한 모양새군.”

    빈첸은 바롬을 죽임과 동시에 연구 자료를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러한 사태를 대비하여 복원장치들을 마련해놓기는 했으나, 그건 베르사와 그녀가 이끄는 집단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그렇습니다. 베르사 헬라임이 용아인들도 모두 탈출시킨 것 같습니다. 영상 기록은 일부러 남겨놓은 것 같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자의 이름은 알베르토.

    6마탑의 마법사단을 이끄는 사단장이었다.

    과거, 빈첸과 카곤의 ‘친선교류회’를 주도했던 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베르사도 이러한 사실들을 딱히 공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 가문의 치부이니 조용히 덮을 셈이겠지.”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유?”

    “연구원들과 용아인의 존재는 저희에게도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빈첸의 예상대로 6마탑이 헬라임의 배후 중 하나였다.

    다만 증거가 없을 뿐.

    “베르사가 그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은, 저희의 약점 하나를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나 베르사 헬라임이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베르사 헬라임은 8성의 무인이다.

    굳이 호신을 위하여 마탑의 약점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아마도 베르사는 빈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구원들과 용아인들을 데려간 것 같습니다.”

    “베르사가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지 않느냐?”

    헬리오스는 킥,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토의 분석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는 했으나 헬리오스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베르사 헬라임이다. 빈첸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사람이 아냐. 그녀가 괜히 철혈의 거인이라 불리겠느냐?”

    그 말에 알베르토는 반박하지는 못했다.

    헬리오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베르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빈첸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맞아. 사단장의 분석은 타당했다.”

    그는 다시 한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생겼다.

    “은총 연구는 이쯤에서 손을 뗀다. 뭔가를 더 건지려 했다가는 우리가 피를 보겠어. 베르사 쪽은 내가 직접 신경 쓸 테니, 사단장에게는 뒤처리를 부탁하지.”

    * * *

    빈첸은 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한편에는 한 무리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빈첸은 그쪽으로 다가가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그들은 붉은 요새의 1급 생도들이었다.

    “이게 누구야? 요란한 소문의 주인공이시구만.”

    “뭐라더라? 부랑자 수용소의 비밀을 밝혀내고 헬라임에 빛을 가져온 소년이라던가.”

    “덕분에 우리도 큰 도움을 받았어.”

    빈첸이 부랑자 수용소 사건의 시작을 해준 덕분에, 1급 생도들은 메일튬에서 공적을 세우고 치하 받을 수 있었다.

    빈첸이 의도했던 건 아니었으나 빈첸은 1급 생도들에게 꽤 큰 도움을 준 상태였다.

    그때문인지 1급 생도들은 빈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때, 각명식에서도 아주 보기 좋았다고.”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못난이로 불렸던 거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군.”

    빈첸이 머쓱하게 웃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시선을 헤나에게로 옮겼다.

    헤나는 버터 바른 빵을 작게 잘라 먹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누님과 1급 생도 선배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1급 생도들은 빈첸에게 집중했다.

    “1급 생도들이 파성무인이 되기 전,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절차가 존재합니다. 혹시 알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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