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8화
빈첸은 노인을 알아보았다.
“바롬 영감.”
“별로 놀라지 않는군.”
빈첸이 처음부터 바롬에게서 이상함을 느꼈었다.
부랑자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미가 술집에 돌아왔을 때.
당시 빈첸은 밖에서 목소리를 들었었다.
-너, 너, 너는!
바롬 노인의 목소리에 느꼈던 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경악에 가까웠다.
마치 돌아오면 안 될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다만, 목소리로만 사람을 판단할 수 없기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너희 같은 변절자들에게 유미를 맡길 수 없다! 당장 유미를 내게 맡기거라!
그때의 모습도 유미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미를 욕심내는 느낌에 가까웠다.
어쩌면 하모나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 거야?
빈첸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물었다.
“유미도 당신 손으로 팔아넘긴 건가? 부랑자 수용소에?”
“…….”
율리안이 중얼거렸다.
-사람을 여럿 죽여 본 자의 기세가 느껴진다더니. 형님이 느낀 게 진짜였나 봐요.
연구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용아인들의 피를 뽑아내어 죽였으리라.
시민 혁명대에서 헬라임에 많은 첩자들을 심었듯, 헬라임에서도 시민 혁명대에 첩자들을 심었다.
“그래서 나와 로랑 경이 단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꺼려 했었군. 헬라임의 첩자이자 고위 연구원이었으니.”
-빈첸과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바롬은 로랑이 걱정되는 것처럼 수차례 만류하기도 했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바롬이 말했다.
“공자, 공자는 우리의 숭고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숭고한 가치?”
“우리가 진행했던 연구는, 우리 인간이, 대악마 데이븐의 힘을 가치 있게 이용할 수 있는 위대한 연구이지 않은가? 무인이 아닌 자들이, 무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아닌가?”
빈첸은 논리적으로 남자의 말을 반박하려 들지 않았다.
“네 입에 숭고한 가치를 담지 마라.”
더러운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
남자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저런 자 때문에 하모나가 그토록 울고 괴로워했단 말인가. 유미가 그렇게나 재회를 즐거워했단 말인가.’
빈첸이 홍련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숭고한 가치.
그런 말은 로랑 경과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굴러떨어진 목을 들고서 방을 나섰다.
“저, 저, 저건……!”
“최, 최고 연구원님이 주, 죽었다!”
“으아아아악!”
그들은 수많은 용아인의 목을 자르고 실험했지만, 바롬 노인의 목을 보고 기겁했다.
빈첸은 연구원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연구자료들은, 다 모았나?”
“모, 모았습니다.”
자신을 수석연구원이라 밝힌 한 사람이 많은 자료들과 기록 마정석을 순순히 내왔다.
“사, 살려만 주시면 모든 것을 다 말하겠습니다.”
“연구자료가 하나 발견될 때마다 한 사람씩 목을 베겠다.”
연구원들은 공포에 질려 뛰어다녔다.
연구자료와 마정석을 실시간으로 구해왔다.
개중 도망치려는 자들도 있었는데, 빈첸은 그들의 발목을 잘라버렸다.
“이, 이게 다입니다.”
빈첸은 연구자료와 연구기록을 담은 마정석을 한데 모았다.
연구자료는 불태웠고 마정석은 부숴버렸다.
연구원들의 숫자는 대략 30여 명.
빈첸은 그들의 발목을 모조리 잘라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만든 뒤, 밧줄로 그들의 몸을 결박했다.
-용아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기까지가 내가 할 일이다.’
얼마나 많은 수의 용아인들이 이곳에 잡혀 있을지 모른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 * *
빈첸이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고 기록되었다.
헬라임은 도시를 다스릴 권한이 없다는 여론이 거세게 끓어올랐고, 시민들은 로랑을 새로운 지도자를 내세웠다.
헬라임의 무인들은 더 이상 잔혹하게 혁명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한 명, 한 명은 약한 시민들이 모두 모여 한목소리를 내자 헬라임도 그들을 탄압할 수 없었다.
약한 힘이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6마탑주 헬리오스, 직접 진상 규명에 나서다!]
[마법사단 파견 결정.]
로랑의 고백에 따라 6마탑주 헬리오스가 직접 움직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6마탑 직속 마법사단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겠다는 소식과 함께.
그날 저녁.
베르사가 빈첸을 찾아왔다.
“내 부탁을 훌륭히 들어주었더구나.”
베르사는 천천히 걸어 와 의자에 앉았다.
빈첸도 그 앞에 앉았다.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빈첸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헬라임 외, 잔당들이 남을 줄 알았더니 누군가 모두 처리해놨더구나.”
빈첸은 직감했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베르사가 직접 움직였을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더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처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의 역할을 제가 빼앗은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베르사의 시선이 빈첸을 향했다.
잠시 동안 빈첸을 바라보았다.
“빼앗다라.”
‘빈첸이 빼앗았다’라는 말을 반대로 하면, ‘베르사가 빼앗겼다’라는 뜻이 된다.
“자식에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율리안은 크게 당황했다.
-혀, 형님? 베르사 부인에게 그런 말을 해도 돼요?
베르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베르사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사도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둘의 시선이 무겁게 오갔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구나.”
“예.”
“무엇이냐?”
“6마탑의 헬리오스 경이 진상규명에 나선다 들었습니다. 6마탑에서 조사단을 파견한다고도 들었고요.”
“그래.”
“고지 점령전에서, 헬리오스 경은 분명 게이트를 봉쇄하려고 했어요. 지하를 숨기려고 들었습니다.”
“…….”
“그들은 ‘지하’와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높은 확률로 6마탑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놀라지 않는 모양새였다.
“어머니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나의 가문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빈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베르사가 알고 있다면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빈첸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베르사가 다른 말을 꺼냈다.
“내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가폰소 경이 어머니를요?”
“내 방문 앞에서 살려 달라 빌더구나.”
헬라임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빈첸과 로랑이 일으킨 물결이 시민들로 하여금 해일을 일으켰다.
그 해일이 헬라임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가폰소는 베르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이제 그는 수많은 시민들과 용아인을 학살하고 악령군대를 만들려던 책임을 지고 심판의 탑에 올라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베르사라고 생각했고, 베르사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사죄의 대상이 잘못된 것 같군요.”
“그래. 잘못되었지.”
가폰소가 사죄해야 할 대상은 베르사가 아니라, 헬라임 도시의 시민들이었다.
그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했다.
베르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잠시 깃들었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빈첸은 베르사의 마음을 헤아렸다.
베르사는 지금 제 손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무너뜨렸다.
가폰소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그 말에 율리안은 기함을 토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다.
철혈의 거인 베르사에게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베르사는 약간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게 하는 말이냐?”
“네.”
“…….”
무겁고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식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어지러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베르사는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빈첸은 그 아이러니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머니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간,
누군가가 베르사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베르사는 기계가 아닌걸.
아주 오래전,
그런 말을 해주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빈첸의 친어머니 사르비나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가.’
베르사는 빈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볍게 웃었다.
그제야 율리안은 긴장을 풀고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사는 잠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거리는 노란 깃발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들을 보자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의 선택이었고, 내가 응당 짊어져야 할 짐이다.’
머지않아 헬라임은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헬라임은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빈첸이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오늘은 마침 세리가 특선 메뉴를 선보이겠다고 했거든요. 저와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
베르사의 몸이 움찔했다.
자식에게 식사 초대를 받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다.
“맛이 없으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세리는 성심을 다하여 요리를 준비했다.
정성껏 손질한 새싹채소들과 훈연한 연어 요리가 메인이었다.
혹시나 베르사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세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참이나 눈치를 살폈다.
“…….”
“…….”
빈첸과 베르사 사이에는 그다지 대화가 없었다.
그동안 세리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식사가 끝난 뒤.
베르사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세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음식솜씨를 지녔구나.”
“가,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니 다음부터는 마음 졸이지 말거라. 몹시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니.”
“감사합니다!”
베르사는 가볍게 웃은 뒤 입을 열었다.
“빈첸.”
그녀가 마나를 흩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네가 너의 모든 것을 걸고 나의 부탁에 임하였으니, 나도 너를 위하여 내가 지켜왔던 것을 어기려 한다.”
베르사는 후계자 후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준 적도 없다.
베르사는 아덴카에서 그러한 원칙을 고수해 왔다.
오늘은 그 원칙을 깨기로 했다.
빈첸이 보여준 것들이 그 원칙의 가치보다 컸으므로.
합당한 보상을 주어야 했다.
그게 베르사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베르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천과(天果)에 관하여 말해주려 한다.”
빈첸의 ‘천골’을 회복시킬 수 있는 단초.
그 이름이 베르사에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한 이것은 네 친어머니. 사르비나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
빈첸은 율리안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안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깊은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보니 율리안의 친어머니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제 친어머니…… 말입니까?”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주 오래되어,
세상에서 잊혀진 이야기들이었다.
“그녀는 천과수(天果樹)의 선택을 받아 천과를 얻었다. 당시 나는 그것을 직접 지켜보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