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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07화 (107/184)

환생의 정석 107화

빈첸은 갈등했다.

로랑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위하여 로랑의 죽음을 지원하여야 하느냐.

혹은 그러한 신념을 가진 로랑의 생명을 지켜야 하느냐.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정답은 없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야겠지.’

그것이 무예를 익힌 자들이 가야 할 길이다.

빈첸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인가.’

마나를 머금지 못한 천골로 꽤 많은 무리를 해왔다.

그나마 수많은 요소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상황을 끌고 왔다.

‘집중해야 한다.’

로랑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파괴욕에 잡아먹힌 로랑이건만, 그는 빈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의지를 끌어모아 빈첸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로랑 경이 기어이 만들어낸 몇 초의 시간을, 나는 헛되이 쓰지 않겠습니다.’

예전의 경험에 집중했다.

이전에 한 번 갔던 길은 조금 더 수월하게 갈 수 있다.

빈첸은 이미 악령계약자를 베어본 적이 있다.

‘내가 베었던 악령계약자는 살았다.’

원래 악령계약자는 말살하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의 형.

말론 아덴카가 그 증거였다.

‘그때처럼.’

그때는 의도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그때는 우연이었으나 이번에는 기적을 만들기로 했다.

‘말론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야 해.’

그때 지녔던 의지.

그때 사용했던 마나 흐름.

그때 따라갔던 검로.

‘아직.’

꿈틀. 꿈틀.

로랑의 손가락이 꿈틀 거렸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순간.

로랑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마법사들의 블링크 같았다.

그를 막아선 사람은 카곤이었다.

사미온 검식 제1장.

유검제강(柔劍制剛).

카곤이 로랑의 손톱을 막아내었다.

적황미력이 깃든 그의 검이 로랑의 손톱과 부딪치자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네가 보이고자 하는 것을 보여 봐라, 빈첸.”

카곤은 궁금했다.

오늘 자신을 이긴 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떤 길을 걸으려고 하는 것인지.

카곤이라는 변수가 끼어들면서, 로랑에게서 틈이 보였다.

‘지금!’

빈첸은 이능검격을 펼쳤다.

악령계약자 본인을 베는 것이 아니다.

‘계약을 벤다.’

그 ‘계약’이라는 이능을 베어내기로 했다.

말론 때에는 우연이었으나 이번에는 필연인 검로를 구현했다.

서걱-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베었다.

분명히 느껴졌다.

‘베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 * *

칸은 잠자코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빈첸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빈첸은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여전히 홍련은 꽉 쥔 채로.

그리고 로랑은 쓰러졌다.

몸에서 새어 나오던 불길한 기운은 사라졌다.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가 칸 옆으로 다가왔다.

“칸. 네 아들이 뭘 한 거냐?”

“계약을 베었다.”

“그게 뭔데?”

“악령계약자에게서 악령을 떼어냈다고 표현하면 이해할 수 있나?”

“오, 그렇구만…… 엥?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네 눈으로 보고 있을 텐데.”

폰시아노 옆에는 레이븐이 서 있었다.

레이븐의 눈에는 강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빈첸……!’

빈첸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보여주었다.

무인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그리고 어떤 힘을 보여주어야 할지.

빈첸은 로랑을 죽이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한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지 점령전에 공식적인 승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두 소년과 한 소녀는 승리의 신호탄을 쏘아냈다.]

[도시 곳곳에서 시민들이 노란기를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고지점령전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주 큰 이슈가 되었다.

소식지 기자들은 헬라임의 참상을 밝혀내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랑의 신념에 공명한 시민들이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곳에서 헬라임과 혁명대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는 턱을 쓰다듬었다.

“선 채로 기절한 것이 꼭 내 젊은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안 그래, 칸?”

“…….”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칸. 빨리 대답해 봐. 내가 아들 앞에서 허황된 농담이나 지껄이는 허풍쟁이가 되어도 괜찮은 거냐?”

“…….”

“아들아. 정말이다. 나도 여러 차례 서서 기절했지. 나의 단단하고 강인한 신념이…… 칸, 어디 가는 것이냐? 야, 칸! 무시하냐! 너 지금 이거 선 넘는 거다! 야! 야! 칸!”

폰시아노는 다소 경박한 모양새로 칸을 여러 차례 불렀으나 칸은 점차 멀어졌다.

“짜식.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구만.”

“아버지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데요.”

“더워서 그런 것이다. 으하하핫!”

폰시아노는 얼굴이 붉어진 채 호탕하게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 모자라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의 눈만큼은 매서웠다.

‘칸이 여기 온 이유가 빈첸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 확실해졌군.’

칸은 본인의 무학을 갈고닦는 것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적어도 폰시아노가 봐왔던 칸은 그러했다.

‘그런 칸이 여기까지 귀한 몸을 이끌고 와서 열심히 관찰했다?’

그것만으로도 칸이 빈첸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뭐, 내가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빈첸이 칸의 마음에 작은 파도를 일으켰다.

폰시아노는 칸의 저러한 모습을 살면서 딱 한 번 봤다.

칸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사르비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그때, 칸은 딱 저런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빈첸의 친어머니가 사르비나였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폰시아노가 씨익 웃었다.

‘그래. 빈첸이 사르비나의 친아들이었어.’

칸의 고요한 마음에 풍랑을 일으켰던 여인.

그 여인의 친아들이 오늘도 또 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듯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무척이나 기대되는구나, 으하하핫!”

* * *

빈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세리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오늘 이후로, 헬라임에서 빠져나가는 놈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들의 동선을 추적해.”

“제, 제 힘으로 가능할까요?”

세리는 빈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세리라면 충분해. 그들은 무인이 아닐 테니까.”

어차피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인’들은 시민 혁명대 제압 건으로 여기저기 파견이 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의 관심이 크게 쏠린 상태에서, 자유로이 이동할 수도 없을 것이고.

지금 헬라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무인이 아닌 자들뿐이다.

“그들은 연구원들일 거야. 은총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자들.”

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녀는 정령을 불러내어 헬라임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빈첸의 말대로,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몰래 빠져나가는 인물들이 있었다.

‘새벽 3시인데.’

정령이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들은 정령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간 뒤 자취를 감추었어요.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아요.”

빈첸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부요새장이자 빈첸의 후원자인 바르곤이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도와주십시오, 바르곤 경.”

어쩌면 이번 사건은 6마탑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르곤도 순순히 협력했다.

“가지.”

빈첸과 바르곤은 세리가 가르쳐준 여관으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여관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확실히.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는구나.”

바르곤은 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다.

‘6마탑의 방법이야.’

6마탑 출신의 바르곤에게 꽤 익숙한 흐름들이 느껴졌다.

6마탑의 마법사들이 만든 이동마법 스크롤을 사용한 것 같았다.

“이동 스크롤을 사용하여 이동한 것 같다.”

“그들을 추적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바르곤이 고리를 회전시켜 마나를 끌어냈다.

공간에 마법언어들이 새겨지기 시작했고 추적마법과 이동마법이 동시에 구현되었다.

작은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 이동 마법진을 유지해야 한다.”

“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세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공자님, 저도 같이 갈게요.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빈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해야 할 일이야.”

바르곤은 빈첸에게서 진득한 살기를 느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제 방식으로, 제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려 합니다.”

빈첸이 걸음을 옮겨 마법진 안에 들어섰다.

이동마법을 통해 어두운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이 데르소나의 지하라면 많은 결계와 보안장치들이 허술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관리자 놈들도 도망쳐야 하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통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거대한 지하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첸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피비린내.’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구속도구와 묵철(墨鐵) 쇠사슬로 결박된 자들이 보였다.

‘용아인이군.’

파충류 같은 비늘이 돋아나 있는 인간들.

최근 멸족했다 알려진 용아인들이었다.

몇몇 칼을 든 자들이 용아인들을 가차 없이 찔러 죽이고 있었다.

‘증거 인멸이라.’

또 몇몇은 이동장치로 보이는 것에 용아인들을 옮기고 있었다.

또 몇몇은 여기저기서 어떤 자료들을 재빨리 빼내는 중이었다.

조사단이 ‘지하’에 들어오기 전에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모든 죄를 헬라임에 뒤집어씌우고, 정작 연구를 진행한 너희들은 증거를 지우고 도망치려는 속셈인가? 그리고 또, 제2, 제3의 헬라임에서 다시금 연구를 진행하려는 것이겠지.”

빈첸의 목소리가 ‘지하’에 쩌렁쩌렁 울렸다.

“너, 넌 누구냐!”

그들은 무인이 아니라 연구원들이었다.

개중 무학을 가볍게나마 익힌 자들도 있기는 했으나 빈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빈첸은 용아인의 심장을 찌르려던 자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로랑 경과 시민 혁명대 같은 숭고한 자들은 너희 같은 자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지.”

빈첸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다른 자의 손목을 잘랐다.

그자는 서류 더미를 들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그러므로 나 같은 자도 있는 것이다.”

로랑과 시민 혁명대의 가치는 존중한다.

그들의 신념은 분명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빈첸의 방식은 아니었다.

“제, 젠장! 원하는 게 뭐냐! 돈이냐?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

빈첸은 남자 앞에 섰다.

남자의 손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그에게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그는 용아인들을 여럿 죽인 상태였다.

“아, 아니, 은총이냐? 최상급으로 만든 은총을 주겠다. 이건 부작용도 무척 적고 네 힘을 엄청나게 끌어올려 줄 거다. 순식간에 상급 무인의 힘을 얻을 수 있어! 원하는 걸 다 주마!”

그는 뒷걸음질 쳤다.

“그 은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아인들을 희생시켰나? 얼마나 많은 시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나? 얼마나 많은 시민 혁명대의 시민들이 고통을 받았어야 했나?”

“오, 오지 마.”

저들은 ‘은총’의 부작용을 가리기 위해 시민들끼리 분열을 일으켰다.

저들의 목표를 위하여, 시민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고 본질을 흐렸다.

빈첸의 검에 자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크아아아악!”

연구원들의 손목을 모조리 잘라 버렸다.

율리안조차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도 죽이지는 않네요.

‘저들이 살아 있어야 이곳의 참상이 정확히 알려질 테니까.’

‘헬라임’은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이 ‘연구자료’들이 존재하는 한, 같은 비극은 언제고 일어날 것이다.

컨트롤 가능한 악령군대를 손에 넣고 싶은 자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연구자료를 모조리 없애버리기로 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가 연구한 모든 자료를 모아놓아라. 그게 너희를 살려두는 이유다.”

빈첸은 한 차례 으름장을 놓은 뒤, 높은 곳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한 방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당신이 책임자인가?”

연구 책임자로 보이는 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영상석을 통해 빈첸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빈첸이 그자 앞에 도착했다.

“얼굴이 낯이 익군.”

빈첸도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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