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6화
마엘 검대의 검대장.
7성 무인 게르만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나였다.
‘로랑의 목을 벤다.’
로랑이 많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헬라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빈첸은 로랑의 속셈을 읽어낼 수 있었다.
‘로랑 경은 여기서 죽을 작정이구나.’
자신의 무덤으로 ‘고지’를 선택했다.
시민 혁명대원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들을 일으켜야 한다.
그들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강렬한 동기가 필요하다.
로랑은 그 동기를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려 하는 것이었다.
‘오늘을 위하여 눈을 스스로 베어낸 것이었어.’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람들을 불타게 만들기 위하여.
더욱 극적인 연출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으리라.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보여 주려하는 거야.’
헬라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을 통제하려 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로랑 경의 신념은 존중하나.’
이것이 최선이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빈첸이 게르만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방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헬라임 소속 마엘 검대 검대장 게르만입니다. 이는 가문 내의 일이니 참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게르만은 빈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빈첸은 그래 봐야 8급 생도에 불과하다.
목표는 오로지 로랑뿐.
‘빈첸을 지나쳐서, 로랑을 벤다.’
보법을 밟았다.
빈첸을 지나치려 했다.
‘응?’
게르만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빈첸의 검과 게르만의 검이 부딪쳤다.
‘내 검을 막았다고?’
손끝이 떨려왔다.
홍련과 부딪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8급 생도의 검이라고?’
의외의 검격이었다.
방금 빈첸의 검에 담긴 힘은 5성급 무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되네요.
빈첸은 현대무인과 달리 ‘심상’이 없었다.
그렇기에 특정한 성질의 마나가 아닌 수많은 마나를 다룰 수 있었다.
제대로 못 다루면 심장이 터져 죽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마나를 다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네가 역용을 도와준 덕분이지.’
역용을 통해 마력회로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를 기반으로 봉쇄된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를 몸에 받아들여 사용했다.
명상과 같은 이치였으나 명상처럼 안전하지는 못한 방법이었다.
마력회로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그만큼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해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7성 무인의 검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여러 번은 못 써요.
‘알아.’
무리는 금물이었다.
첫째로 호흡을 들이마신 기도와 폐가 손상될 것이고.
둘째로 심장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며.
셋째로 마력회로가 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내게도 승산은 있어.’
다행히 게르만의 목표는 빈첸이 아니라 로랑이었다.
그리고 영상송출이 재개된 상태.
게르만은 로랑을 죽일 수 있어도, 빈첸을 죽일 수는 없었다.
빈첸은 로랑 앞에 섰다.
중검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나는 로랑 경을 도우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력을 다하여 로랑 경을 지킬 것입니다.”
게르만은 마음이 급해졌다.
로랑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금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다.
생도의 실력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속도와 궤적.
분명 그래야 할 것인데.
빈첸이 새로운 검식을 펼쳤다.
아밀룬 제 4검식.
검기광막(劍氣廣幕).
빈첸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그의 검에는 ‘검기’와 비슷한 힘을 씌워져 있었다.
예전,
베르사가 보고 크게 놀랐던 힘.
적황미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푸른 힘이 홍련의 검신에 깃들었다.
베르사조차 ‘틸로반과는 그 힘의 격이 다르다’라고 표현했던 빈첸의 기운이 옅은 막을 펼쳐냈다.
‘나는 저자의 궤적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격 가능한 모든 방향을 막는다.’
‘검기광막’은 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고안된 검식이다.
주변의 검로를 모두 막아내는 특별한 검식.
그러나 시전자 본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나를 희생하여 동료들을 지켜내는 검.
그것이 아밀룬 제4검식 ‘검기광막’이었다.
‘그렇기에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오늘,
게르만은 빈첸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으니까.
“빈첸 공자. 더 이상 방해하면 반역자를 돕는 무리로 간주하여 처단하겠소.”
“누가 누구에게 반역했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당신들이 시민들에게 반역한 겁니까, 아니면 시민들이 헬라임에게 반역한 겁니까? 무엇이 옳습니까?”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소. 이다음은 진짜로 갑니다.”
그는 이내 검대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파견 나온 7명의 마엘 검대원이 비산했다.
7명 중 누가 됐든 로랑의 목을 베면 그만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때, 카곤이 로랑 뒤에 섰다.
“당신들은 로랑 경을 베지 못할 겁니다.”
카곤은 정치적인 배경 같은 건 상관없었다.
이 맹인이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지극히 옳았다.
적어도 발키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 좋은 선택이구나.’
어차피 카곤은 패배했다.
그렇다면 가장 명예롭게, 가장 멋있게 패배해야 한다.
그러려면 빈첸을 더욱 빛나게 만들고 그와 협력하여 무언가를 성취해 가야 한다.
어차피 이기지 못했다면 이것이 차선이다.
‘영웅에게는 서사가 필요한 법이니.’
그런 의미에서 지금 카곤의 선택은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카곤은 적황미력은 아낌없이 분출했다.
마치 이곳이 마지막 전장인 것처럼.
카곤 또한 로랑을 지키기 시작했다.
* * *
게르만이 로랑에게 달려들었을 때.
로랑은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기만 했다.
하모나가 로랑의 음성을 녹취한 마정석을 들어 올렸다.
그 마정석이 불타 없어지며 로랑의 음성을 흩뿌렸다.
“무엇이 명예로운 것인가. 무엇이 헬라임의 명예인가. 헬라임의 명예는 통제와 권력에서 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명예를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로랑의 유언이기도 했다.
“도시의 주권은 시민들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헬라임은 기본을 잊었다. 시민들은 헬라임의 강압적인 통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나는 나의 보잘것없는 죽음을 바쳐, 시민 혁명대의 신념을 완성할 것이다.”
마정석에 녹음된 말이 모두 퍼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로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빈첸이 검기광막으로 로랑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가.’
그는 죽음을 준비하느라 앞선 얘기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데.’
죽어야 했다.
자신이 죽어야 그림이 완벽해지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 않아도 완성될 수 있습니다, 로랑 경.”
놀랍게도,
빈첸은 게르만의 검을 막아내면서 말했다.
“내가 받은 부탁은 로랑 경을 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랑 경의 죽음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빈첸이 홍련이 다시 한번, 게르만의 검을 막아냈다.
게르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내 검을 네 차례나 막았다고?’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쩔 수 없다.’
그는 헬라임의 무인이었다.
그러므로 헬라임을 위하여 살아야 했다.
‘빈첸을 죽인다.’
빈첸을 살려놓은 상태로는 로랑을 베기가 지나치게 힘들 것 같았다.
시간이 생명이다.
녹음된 마정석이 많은 것을 말했다.
더 이상 말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헬라임의 명예를 위하여.’
그가 크게 명령했다.
“모든 책임은 마엘 검대의 검대장 게르만 본인이 진다. 반역자를 돕는 모든 자를 사살해도 좋다. 이는 헬라임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헬라임의 명예를 위하여!”
“헬라임의 명예를 위하여!”
그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마엘 검대와 게르만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빈첸 공자. 길을 트십시오.”
“헬라임에게 지킬 명예가 남아 있습니까?”
빈첸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말했다.
“정작 당신들이 지키려는 헬라임에서, 명예를 잊지 않은 자는 둘뿐입니다.”
한 명은 베르사 헬라임.
또 한 명은 로랑 헬라임.
빈첸이 아는 한, 명예를 잊지 않은 헬라임을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첸. 그렇게 말해주어 진심으로 고맙구나. 나는 네 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맙다.”
로랑에게서 폭발적이고도 불길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는 무인이 아니다.
이런 기세를 낼 수는 없었다.
‘설마?’
반사적으로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7성 무인 게르만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벼락같이 달려들어 로랑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응?’
게르만의 검은 로랑의 목을 잘라내지 못했다.
로랑의 목에는 검은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눈은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까맣게 물든 눈동자.
사이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이는 악령계약자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로랑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이는 본래 하모나의 임무였으나.”
하모나가 이곳에 함께 온 이유.
‘은총’의 부작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은총을 지속적으로 섭취하여 최상급 시민이 된 그 이후.
종국에는 자연적으로 악령계약자가 된다.
“제가 대신하여 보이겠습니다. 이것이 은총의 실체입니다.”
로랑은 두 손가락으로 게르만의 검을 잡았다.
그의 온 몸에 검은 비늘이 덮여 있었다.
유리나의 몸에 돋아 있는 비늘보다 훨씬 촘촘하고 두꺼웠다.
그것은 마치 비교적 최근 멸족했다 알려진 ‘용아인’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종국에는 인간을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며, 헬라임은 특별한 파장의 소리를 통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헬라임의 최종목적이다.
용아인의 신체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악령계약자들을 대거 양성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 것.
“나는 무예를 익힌 적이 없고, 눈이 보이지 않으나.”
그가 손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게르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7성 무인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게르만은 7성 무인답게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검기를 담았다.
로랑의 팔이 잘렸다.
로랑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정했으므로.
“만약 내가 무예를 조금이라도 익힌 무인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강했을 것입니다.”
빈첸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로랑이 하는 말들에는 분명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무의 경지와는 상관없는 기백.
극도로 단련된 정신력과 숭고한 가치의 신념을 지닌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
게르만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더러운 술수와 독사 같은 혀로 헬라임의 명예를 더럽히는구나!”
라디옥센 검식 제8장.
유성검우(流星劍雨).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검식을 사용하였다.
수십 가닥의 검기가 유성우처럼 떨어져 로랑의 몸을 난도질하였다.
어느덧 로랑은 악기(惡氣)에 잠식 당해버렸다.
이지를 완전히 잃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파괴욕과 살심뿐이었다.
마엘 검대와 게르만이 그를 둘러쌌다.
“죽여주마.”
그때,
하모나가 빈첸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검을 뽑아야 하는 경우.]
예전 로랑과 약속했었다.
-검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검을 뽑을 것이고. 피를 흘려야 한다면 피를 흘릴 것입니다. 저는 시민 혁명대가 아니라 8급 생도 빈첸 아덴카이기 때문입니다.
-아덴카의 이름으로 맹세해 줄 수 있겠나?
-맹세하겠습니다.
귓가에 옅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력을 다하여 보내는, 로랑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부탁이니, 나를 죽여다오.
로랑은 명예로운 자의 손에 죽고 싶었다.
빈첸에게 보내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빈첸은 그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게르만 검대장. 제 숙부입니다. 제가 직접 베겠습니다.”
“빈첸 공자가 말이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빈첸의 진짜 속셈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