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5화
헬리오스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빈첸은 자신의 압박에 짓눌리지 않았다.
저 나이에는 불가능한 수준의 정신력이었다.
속으로는 꽤 놀랐으나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정말 존재한다면 외부의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크오. 그러나 공자,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고지를 빼앗길 참이오?”
어느덧 유리나가 고지에 거의 다다랐다.
유리나의 팔에는 비늘이 돋아난 상태였다.
“어서 고지를 점령하러 가시게.”
“알겠습니다. 조금 후에 여쭈겠습니다.”
빈첸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설상걸음.’
빈첸은 설상걸음을 펼쳐 유리나 쪽을 향해 뛰었다.
‘유리나가 위험하다.’
아무래도 마탑주는 유리나를 그냥 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아주 찰나였으나 분명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냥 깃발을 꽂게 하면 안 돼.’
유리나가 시민 혁명대의 깃발을 ‘고지’에 꽂기 직전.
빈첸은 몸을 던져 유리나를 밀쳐냈다.
안 그래도 지쳐 있던 유리나는 몇 바퀴나 굴러 넘어졌다.
“이게 무슨……!”
그사이, 카곤에게 기회가 생겼으나 카곤은 깃발을 꽂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깃발을 꽂지 못했다.
그는 유검제강을 펼쳐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을 막아냈다.
파스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카곤의 검을 녹였다.
“빈첸. 방금 이건 뭐지?”
“시민 혁명대원을 죽이려던 마법이었겠지.”
증거도 흔적도 남지 않는 종류의 마법이 분명했다.
마탑주가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며 발뺌할 수 있을 만큼.
“증거도 흔적도 없다. 그렇기에 위력이 약했어.”
너무 강한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정밀하게 조절된 마법이었을 거다. 딱 아룡검대원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이었을 거야.”
“…….”
아룡검대원은 죽었겠지만 카곤은 막아냈다.
카곤은 다시 한번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빈첸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에 반해 카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빈첸의 뒤를 쫓았을 뿐이고, 본능적으로 살상마법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온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전 2패군. 패배를 인정한다.”
카곤은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검을 바닥에 버렸다.
무인이 검을 잃었다.
빈첸과 더 이상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때.
빈첸이 말했다.
“시민 혁명대가 진짜 원하는 것은, 마력개방인 거지?”
유리나가 ‘가짜 마탑주’에게 가르쳐주었었다.
[“게이트가 열리면 이 공간에 상당한 양의 마나가 새어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게 시민 혁명대가 노리는 바였다.
‘지금의 나는 마탑주와 겨루어 이길 수 없다.’
빈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지하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 혁명대가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을 이루어줄 수는 있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말했잖아. 너희의 신념을 돕겠다고.”
빈첸이 검을 들어 올렸다.
먼발치서 지켜보던 마탑주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고, 카곤은 씨익 웃었다.
‘그 신비로운 검이군!’
안 그래도 보고 싶었다.
상대의 검을 알아야 하니까.
그때, 느껴졌다.
‘마탑주가 빈첸을 방해하겠는데.’
2전 2패.
오늘의 승리자는 빈첸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자에게 패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승리자인 빈첸은 밝게 빛나야 했다.
그래야 패배자인 자신이 덜 초라해진다.
‘오늘은 내가 돕겠다, 빈첸. 네 최초의 패배는 내 것이어야만 하니까.’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갔다.
마탑주를 향해 뛰었다.
그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아공간에서 또다른 검을 꺼내 마탑주를 겨누었다.
“마탑주님은 제 검의 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언제고 벨 수 있다.
마법사와의 전투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거리’에 있다.
마법사는 원거리전에 능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검이 닿을 정도의 거리.
게다가 마탑주는 게이트의 봉쇄에 신경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제 검투장을 더는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마탑주를 향하는 카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카곤의 경쟁자는 오로지 빈첸뿐이었다.
빈첸과의 전장을 방해하는 모든 자는 적이다.
마탑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곤 공자, 기세가 무척 날카롭군. 6마탑을 적으로 돌리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요?”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요.”
헬리오스는 기분이 무척 나빴다.
아무리 사미온의 귀공자라고는 해도, 마탑주의 눈으로 본 카곤은 아직 풋내기였다.
‘건방진 놈이.’
그러나 그는 기세를 풀 수밖에 없었다.
마나에 담긴 목소리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마탑주. 당신이 무슨 수작질을 하든 크게 신경은 안 써.
헬리오스는 누가 이 목소리를 전달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마나의 발원지를 역산하여 그도 음성을 전달했다.
-발키아 경?
-나는 데르소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엇이 숨겨져 있든 관여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영상송출은 하도록 해.
아까,
헬리오스는 영상송출을 복원한 듯 행동했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여전히 영상은 송출되지 않는 상태.
-왜 영상송출에 집착하오?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의 모습이니까.
발키아는 빈첸과 카곤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랐다.
좋은 모습이든 좋지 못한 모습이든.
어떠한 모습이 됐든, 저들의 행보는 반드시 알려져야 했다.
-영상송출만 제대로 한다면 나도 마탑주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헬리오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상대는 사미온의 발키아다.
-영상송출은 방해하지 않겠소. 대신 당신도 약속을 지켜야 하오. 나를 방해하면 안 되오.
-사미온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영상송출을 시작하겠소.
헬리오스는 영상을 재송출하기 시작했다.
대신 게이트의 봉쇄에는 더욱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빈첸이 이능검격을 발현시켰다.
그러나 마탑주의 마법력으로 봉인된 게이트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한 번으로는 안 돼.’
빈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사용해야 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형님. 생각은 잘 알겠는데요, 몸이 박살 날지도 몰라요. 알죠?
율리안은 빈첸에게 ‘사실’을 전달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많은 체력을 소모했고 더 이상 무리하는 것은 몸에 커다란 부담을 줄 거에요.
‘사실’을 전달하는 대신, 열정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말리지 못하겠네요.
율리안의 눈에도 보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여기까지 기어온 시민 혁명대 유리나의 모습이.
유리나는 빈첸보다 더한 고지를 넘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본 율리안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대로, 형님을 도울게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빈첸에게는 빈첸의 일이 있고.
율리안에게는 율리안의 일이 있었다.
-이왕에 하는 거 멋있게 보여줘요. 유리나의 신념이 우스워지지 않도록.
율리안은 평소와 다른 선택을 했다.
‘신기를 조금 소모하면서 역용을 돕는 거야. 신기는 성배로 회복할 수 있으니까. 내가 역용을 도우면 이능검격을 한두 번 정도는 더 펼칠 수 있겠지.’
평소 걱정이 많은 율리안이었으나 오늘은 걱정을 모두 내팽개쳤다.
그것이 지금의 빈첸과 유리나를 존중하는 율리안의 방식이었다.
빈첸이 홍련을 휘둘렀다.
‘이능검격.’
작은 흠집이 났다.
이능을 베는 검.
그것이 작은 틈을 만들어 ‘지하’로부터 마나가 뿜어져 나오도록 유도했다.
‘이능검격!’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유리나의 처참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홍련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토해냈다.
‘틈을, 만든다.’
우웅-!
검은 주인의 의지에 공명했다.
홍련은 빈첸과 공명하여 빈첸의 몸과 홍련의 검신에 각인된 특성.
‘강화된 신체’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홍련과 공명하는 ‘강화된 신체.’
신기의 도움을 얻은 ‘역용.’
의지를 한껏 끌어올린 ‘이능검격.’
‘벨 수 있다.’
빈첸은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아니. 베어야 한다.’
예전과 다르다.
‘강화된 신체’는 레반 아덴카로부터 받았다.
‘역용’은 세르쿤 집사에게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율리안이 사력을 다해 도와주고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므로.’
홀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라면 할 수 있다.
‘함께’라는 가치가 빈첸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고, 더욱 정순한 검격을 이끌어내었다.
‘이능검격!’
다시 한번 펼친 이능검격.
이능을 베는 힘은 결국 틈을 만들어냈다.
그 틈 사이로 마나가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됐다.’
마탑주가 커다란 마나를 소모하여 봉쇄하고 있었다.
그만큼 게이트에는 많은 마나가 응축되어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뿜어졌다.
마치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이동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간이 이동관문?’
이곳의 마나를 활성화시켜 여기까지 한 번에 워프를 한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로랑 헬라임’이었다.
‘고지점령전은 결국 로랑 경이 이곳으로 오기 위한 안배였구나.’
로랑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누군가가 로랑의 손을 잡고 빈첸 앞에 섰다.
그 사람은, 예전에 빈첸을 습격했었던 하모나였다.
* * *
며칠 전.
하모나는 로랑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도움이 되고 싶어요.”
바롬 노인에게 돈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받았을 때.
그녀는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로랑은 하모나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나를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할게요.”
“헬라임은 내 입막음을 하기 위해 당신과 나를 공격할 가능성이 큽니다. 죽을 확률이 무척 높아요.”
“…….”
“아니, 반드시 죽을 겁니다.”
하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꼭 저를 데려가 주세요.”
“무엇이 당신을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길러준 영감님이 있어요.”
“바롬 노인이겠군요.”
이틀 전.
바롬 노인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체에는 작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헬라임의 반역자.
이것은 헬라임의 무인들이 시민 혁명대를 죽일 때에 남기는 표식이기도 했다.
하모나는 시체를 끌어안고,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
“영감님이 꿈꾸던 세상에 함께하고 싶어졌…….”
“…….”
“거짓말이에요. 난 그딴 거 관심 없어요.”
예전부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헬라임의 통치 아래에서, 헬라임이 주는 은총을 통해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모나의 눈이 붉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영감님을 그렇게 죽일 이유는 없었잖아요.”
하모나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시민 혁명대의 지부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그렇게 죽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무리 슬퍼해도, 바롬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모나는 울부짖듯 말했다.
“헬라임에게 복수할 거예요. 숨기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까발릴 거라고요.”
그래서 오늘.
로랑과 함께 이 자리에 섰다.
로랑의 손을 잡고 빈첸 옆까지 걸어갔다.
“로랑 경. 빈첸 옆에 도착했어요.”
빈첸 옆에 선 로랑이 말했다.
“제 이름은 로랑 헬라임. 헬라임의 또 다른 아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상태.
로랑이 말을 이었다.
“또한 시민 혁명대의 대장이기도 합니다. 저는 헬라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로랑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헬라임 통치하에 있는 수많은 도시에서 행진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숨죽여 있던 시민 혁명대의 대원들이 도시 곳곳에서 노란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
“시민 혁명대는 헬라임으로부터 독립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때.
헬라임의 무인들이 고지를 에워쌌다.
헬라임의 정예 병력.
‘마엘 검대’가 파견되었다.
마엘 검대를 이끄는 자는 7성 무인 게르만이었다.
“로랑. 당신을 사회의 안전을 심히 위협하는 반역행위자로 즉시 처형하겠다.”
그는 7성 무인다운 기세를 내뿜으며 검을 뽑았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7성 무인 게르만.
그 앞을 8급 생도 빈첸이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