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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04화 (104/184)

환생의 정석 104화

유리나가 고통스러워하며 어딘가를 향해 처절히 기어가던 그때.

빈첸은 그러한 유리나를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리나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결계에 감금된 것이 아니었다.

“정신계 마법입니까?”

“눈치가 빠르군요, 빈첸 공자.”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리나가 울컥 피를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수도 있었다.

마음은 조급해졌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진짜 마탑주인가?’

정말로 6마탑주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빈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6마탑주 헬리오스는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에요. 유리나가 눈치를 조금 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저렇게 술술 말해줄 사람은 절대로 아니에요. 게다가 세계 유력인사들이 다 모여 있는 데르소나에서 이렇게 대놓고 행동할 사람도 아니고요.

진짜 마탑주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허술했다.

일단 그거면 되었다.

빈첸은 괴로워하는 유리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상대에게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당신이 노리는 건 크게 세 가지인 것 같군요. 가장 주된 임무는 지하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도록 하는 것. 두 번째는 영상송출을 막는 것. 세 번째는 유리나가 시민 혁명대의 깃발을 꽂지 못하게 하는 것.”

헬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군요. 그런데 빈첸 공자.”

헬리오스가 마법으로 구현한 화살 한 발을 쏘아냈다.

그것이 빈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빈첸의 볼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공자가 원하는 건 고지점령전에서의 승리가 아니었소?”

헬리오스가 옆으로 슬쩍 비껴 서며 고지를 가리켰다.

“고지로 가서 붉은 요새의 깃발을 꽂으시오.”

“유리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것은 공자가 관여할 바는 아닌 것 같소.”

그가 빙그레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절충점인 것 같은데. 어떻소?”

빈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은 송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때 유리나가 중얼거렸다.

환상 속에서 무언가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어.”]

[“그 신념은 부러지지 않아.”]

빈첸은 유리나를 지나쳐 걸었다.

뒤를 돌아보며 한 번 더 확인했다.

“영상송출은 언제부터 진행됩니까?”

“공자가 일곱 걸음을 옮기면, 거기서부터 시작될 거요.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가면 되오.”

빈첸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일곱 걸음.

빈첸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변화가 있다.’

빈첸 스스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사용된 마법이 어떻게 구동되는지는 읽을 수 있었다.

심상 없이 마나를 익힌 그는, 현대의 마나의 흐름이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빈첸은 고지를 향해 뛰듯 높이 도약했다.

순식간에 홍련을 꺼내 들어 허공을 베었다.

‘이능검격.’

이능을 베는 힘.

마법을 베는 빈첸의 검격이 마나의 흐름을 베어냈다.

“꼬마 도련님이 선을 넘으시는군.”

헬리오스는 두 손으로 황급히 수인을 맺었다.

그의 몸 주변에 마법 상형문자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지금이다, 유리나.’

헬리오스가 신경 쓰는 것은 세 개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도록 봉쇄하고 영상송출을 방해하며, 유리나를 제약하는 것.

-게이트 봉쇄는 죽을힘을 다해 하고 있을 테니 그쪽은 건드리지 말고, 저자에게 유리나 제약은 쉬운 일일 거예요.

그래서 빈첸은 두 번째.

‘영상송출을 방해하는 것’에 변수를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그 당황은 실수와 빈틈을 낳는다.

“그냥 쉽게 승리를 차지하면 될 것을, 왜 먼 길을 돌아가는가!”

빈첸을 향해 마법화살이 하나 쏘아졌다.

정확도가 높지는 않았다.

지금 헬리오스가 급하다는 증거였다.

빈첸은 어렵지 않게 마법화살을 피해냈다.

“가끔은 승리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마련이므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유리나에 대한 제약 마법’이 약화되었다.

그 틈을 타고 유리나는 정신제약 마법을 뚫어냈다.

초점이 없던 동공에 초점이 생겼고, 잊고 있던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빈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않아 주어 고맙습니다. 시민 혁명대원, 유리나 경.”

유리나의 몸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유리나는 벌써 수차례의 생사를 오고 갔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나는 이겨냈다.

충분히 ‘경’의 칭호를 받을 만했다.

유리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후유증이 워낙 거세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빈첸이 다시 말했다.

“내가 시간을 벌어줄게.”

“…….”

유리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팔다리를 움직여 고지를 향해 기었다.

“고지로 가. 가서 기를 꽂아.”

유리나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 담겼다.

마를렌 향수의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빈첸이 시민 혁명대의 일원이라는 얘기는 못 들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의 신념을 돕기로 했거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희의 신념을 도우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어. 그래서 나는 저자를 막기로 한 거야.”

생도에게 내려진 임무.

아들에게 전해진 부탁.

빈첸은 그 모든 것을 완수하기로 했다.

“후우. 가지가지 하는군.”

헬리오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가지가지 하는 것은 당신 쪽이 아닌가, 가짜 마탑주?”

“내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는 건 아주 유효하다. 이능을 베어낸다는 것이 진정 사실이군.”

실제로 그는 영상송출이 되지 않도록 계속하여 마법을 운용하고 있다.

게이트를 봉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일단 그것에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

‘복구가 되질 않는다.’

빈첸이 잘라낸 허공은 복구가 되지 않았다.

마치 구멍 난 마력회로 같았다.

그것을 컨트롤하느라 그는 많은 심력과 마법적 힘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래서 눈앞의 빈첸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네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겠지.”

헬리오스의 몸이 사라졌다.

짧은 순간 이동마법인 블링크를 사용했다.

‘윽?’

헬리오스는 황급히 마법사용을 취소했다.

‘저놈이!’

헬리오스는 사실 빈첸을 공격하기 위해 블링크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빈첸은 둘째 문제다.

빈첸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유리나에게 가까이 이동하려 했다.

빈첸이 말했다.

“아쉽군. 미리 검을 찔러 넣었는데.”

헬리오스가 블링크를 펼치는 그 시점에, 빈첸은 이미 헬리오스의 생각을 읽었다.

그래서 헬리오스가 나타날 그 지점에 미리 검을 찔러 넣었다.

그것을 느낀 헬리오스는 블링크를 취소했다.

상당한 양의 마나가 역류하여 헬리오스의 ‘고리’를 타격했다.

“예정된 계획에서 훌륭한 성취를 보이나 임기응변에 약한 것 같군. 공부는 많이 했으나 실전 경험은 별로 없는 타입인가.”

“……애송이가.”

헬리오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그의 몸 앞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상당히 강렬한 마나흐름이 느껴졌다.

‘광역 공격마법?’

아무래도 빈첸과 함께 유리나를 동시에 공격할 생각인 것 같았다.

빈첸은 상황판단을 끝냈다.

‘유리나를 지키면 내가 다칠 것이고, 내가 막으면 유리나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말했다.

“고지점령전에 난입한 자다, 카곤!”

그 말과 동시에 붉은 마력이 헬리오스의 몸을 덮쳤다.

헬리오스는 황급히 광역마법을 방어마법으로 변환시켰다.

마법진이 커지는가 싶더니 둥근 마나막을 형성하여 헬리오스를 보호했다.

쾅-!

커다란 폭발음이 났다.

사미온의 적황미력과 헬리오스의 마나가 부딪쳐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빈첸?”

카곤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맨손으로 절벽을 오른 대가였다.

“아무래도 이곳에 마법사들이 원하는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마법사들이 원하는 것?”

“나도 정확한 건 몰라. 지하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저자는 그걸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지금 영상송출도 막힌 상태야.”

“영상송출이 막혔다?”

율리안은 우려를 표했다.

-카곤이 우리 편에 설까요?

‘반드시 그럴 것이다.’

카곤이 절벽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

카곤에게 서린 승부욕과 분노를 읽어냈다.

그것은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자신의 눈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욕망이었다.

반드시 카진을 넘어서고야 말겠다던 자신의 눈.

그 눈을 카곤에게서 보았다.

‘카곤은 나와의 결투를 방해하는 요소를 극도로 싫어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빈첸 자신이 그랬으니까.

‘게다가 영상송출까지 중지되었지.’

‘영상송출을 중지한다’라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빈첸이 말했다.

“우리의 전장이 오염되었다.”

“…….”

“무척이나 불쾌한 일이군. 무슨 더러운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카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홀로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절벽을 기어오른 보람이 없지 않은가.”

카곤의 몸에서 적황미력이 피어올랐다.

“아덴카와 사미온이 격돌하는 장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가 저 노인이냐?”

“그래.”

“그렇다면 죽여야겠군.”

헬리오스는 빈첸 아덴카와 카곤 사미온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헬리오스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것들이 많은데 사미온의 귀공자까지 함께하게 됐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말로 불쾌하군.”

화르륵-!

불길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악!”

헬리오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빈첸과 카곤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탑주?’

진짜 마탑주.

헬리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사칭하는 더러운 놈이 있다니, 공자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됐소.”

빈첸은 직감했다.

‘진짜 마탑주다. 가짜 마탑주를 순식간에 불태워 죽여 버렸어.’

아까의 헬리오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절대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느껴졌다.

무인과는 다른 유한 기운.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기세였다.

그가 손을 휘이- 내저었다.

“이제 영상송출이 제대로 시작될 거요.”

손짓 한 번에 모든 것을 정상화시켰다.

진짜 헬리오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아직 고지점령전이 끝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소만. 두 공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빈첸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율리안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네요. 마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나타난 것처럼.

가짜 헬리오스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게나 말이다.’

경지가 워낙 높아서 제대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마탑주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지점령전이 끝나고 하는 것이 어떤가?”

무형의 기운이 빈첸을 압박했으나 빈첸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어떤 거대한 도시 밑에 거대한 지하가 있다면, 그곳에서 어떠한 대규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면, 마법사들의 도움 없이 그것을 비밀리에 유지할 수 있습니까?”

“마도공학의 도움 없이는 힘들겠지요. 그걸 왜 내게 묻소?”

칸의 기운이 빈첸을 주눅 들게 하지 못했듯,

마탑주 헬리오스의 기운도 빈첸을 억누르지 못했다.

빈첸은 압박감을 흘려내며 말을 이었다.

“지하로 들어가는 게이트가 수시로 바뀌는 형태로 운용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헬라임의 기술력으로 가능한 일인지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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