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3화
길게 베어내기.
멀린의 벽력종절을 모사한 뇌력 연환검은 카곤의 몸을 양단할 듯했다.
찰나의 순간, 카곤이 해내야만 하는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빈첸의 검을 무리 없이 막아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줄을 지켜내는 것이다.
빈첸은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잘 해내었다.
그렇다면 카곤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야 한다.
‘한 가지, 한 가지는 쉽다.’
두 가지를 한 번에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내야 했다.
그래야 겨우 동률이다.
사미온 검식 제1장.
유검제강(柔劍制剛).
그의 몸에서 적황미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곤의 검에 붉은 기운이 깃들었다.
그의 검이 원을 그렸다.
‘부드러운 검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작은 원을 그려 빈첸의 뇌력을 옭아매어 옆으로 흘려냈다.
아덴카 검식에 담긴 마나와 뇌력.
사미온 검식에 담긴 마나와 적황미력.
빈첸과 카곤의 기운이 융합된 검기가 옆으로 뻗어 나갔다.
옆 밧줄들을 차례차례 두 동강 내기 시작했다.
서걱-!
무려 4개의 외줄이 잘려 나갔다.
반 토막 난 외줄은 바람결을 따라 위태로이 흔들렸다.
빈첸의 기운을 튕겨낸 카곤이 짧게 감탄했다.
“실력이 무척 늘었군.”
예전에 보여주었던 그 ‘신비한 검술’ 외에, 이러한 능력까지 갖추고 있을 줄이야.
“칭찬은 아직 이른 것 같은데.”
카곤 입장에서 애석하게도, 빈첸은 카곤이 ‘유검제강’을 통해 방어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빈첸은 유검제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빈첸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아덴카 정검 제1식.
반월 베기.
유검제강의 기운은 끊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희미한 마력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유검제강을 스스로 사용한 카곤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기운이었다.
카곤은 의아했다.
‘뭐지? 의미 없는 공격인가?’
그러나 아니었다.
빈첸의 ‘반월 베기’는 단순히 카곤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검에는 방금 외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했던 성질의 마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베는 게 아니다?’
빈첸의 검은 베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중검첩방의 무거운 마나가 아덴카 정검에 실렸다.
성질이 다른 마나로 다른 검식을 구현하여 사용했다.
마나를 회로공식에 대입하여 사용하는 현대무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이었다.
‘튕겨낸 거야.’
그렇다면 무엇을?
그제야 카곤은 빈첸의 속셈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유검제강의 기운이다!’
옆 외줄들을 잘라버린 저 기운.
그 기운이 이어진 끈을 튕겨냈다.
그 끈은 끊어지지 않고 주욱- 늘어났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채찍과도 같았다.
예리한 날이 세워진 채찍.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피해야 한다!’
카곤이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서걱-!
외줄이 잘렸다.
빈첸은 카곤의 공격을 막아냈고 외줄 또한 수호했으나, 카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외줄이 양단되면서 서로가 멀어지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빈첸은 심상을 자극하여 최대한의 마나를 뿜어냈다.
‘설상걸음.’
미전류의 특성을 담아 폭발적인 힘을 일으켰다.
하락하는 외줄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기예였다.
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발키아가 입을 열었다.
“또 졌네.”
그녀의 눈에 두 아이의 모습이 담겼다.
한 아이는 묘기와도 같은 모습을 선보이며 다른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레일사의 설상걸음에 뇌력을 덧입혀 사용했어. 미치겠군, 저 녀석이 아덴카의 못난이 빈첸이라니.’
다른 한 아이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아쉽게도 떨어진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빈첸이 왜 못난이라 불렸던 거지? 아니, 됐다. 과거가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 빈첸의 저 모습이 중요한 거지.”
발키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칸이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그래도 아들이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몸 상태는 확인하러 가야지.”
다행히 카곤은 절벽 중간 즈음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위를 바라보았다.
빈첸은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 패배다.’
가슴이 쓰려왔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짙은 패배감이 밀려들었다.
단순히 검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쟁에서 져버린 것이다.’
검투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졌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비록 패배하더라도, 끝까지 가야 했다.
그는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아룡검대원 유리나는 시민 혁명대의 일원이었다.
아룡검대의 깃발이 아닌, 시민 혁명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꽂기 위해 걸었다.
고지가 코앞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을 위하여 나는 내 친구들을 짓밟아 왔어.’
아룡검대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시민 혁명대원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누구보다 아룡검대원으로서의 활동을 열심히 해왔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깃발을 꽂기 직전.
그녀는 선언을 시작했다.
“제 이름은 유리나. 시민 혁명대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그때,
카곤을 따돌리고 고지를 향해 움직이던 빈첸은 인상을 찡그렸다.
‘결계가 펼쳐진다?’
마법 영상의 송출을 방해하는 결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아마도 영상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쩌면 ‘제 이름은 유리나.’라는 말조차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의 사태까지 대비해놓은 모양이군.’
그러나 점차 결계가 걷히기 시작했다.
“허허, 재미있는 일이로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6마탑의 마탑주 헬리오스였다.
“이렇게 신속 정확한 결계를 펼치다니. 이건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한 것 같군요.”
마탑주의 주변에 둥그런 마나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마나막에 닿은 몇몇 공격 마법들이 소멸되었다.
“헬라임은 왜 헬라임의 명성을 드높인 이 소녀를 해하려 하는지? 방금 여기로 펼쳐진 건 분명한 살상마법이었소.”
마탑주의 보호를 받게 된 유리나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데르소나의 지하에는 수많은 용아인(龍兒人)들이 갇혀 산 채로 죽어가고 있어요! 은총의 미명하에 무차별적인 희생이 이어지고 있어요.”
“흠, 그렇군. 계속 말해보시게.”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계속해서 바뀌어요. 원리는 잘 모르지만 뛰어난 마법이 적용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데르소나 ‘지하’의 비밀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은총’을 통해 헬라임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리고 오늘 이 시각. 바로 이 ‘고지’가 입구입니다.”
유리나는 지령을 받은 대로 바닥을 향해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녀의 오른팔에 비늘이 돋아났다.
마탑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 아무런 변화도 없군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지하로 가는 게이트가 열려야 한다.
연거푸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벌어지지 않았다.
유리나는 당황한 채 말을 이었다.
“으, 은총에는 커다란 부작용이 있어요. 강한 중독성을 가져서, 사람들이 은총에 미치게 만들어요. 헬라임은 그를 통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려 하고 있어요.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을 통제하고, 시민들끼리 분열시켜 헬라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그 말에 거짓은 없소?”
“거짓은 결단코 없어요. 신께 맹세할 수 있어요.”
유리나는 마탑주 헬리오스가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상마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고, 갑자기 펼쳐진 결계를 걷어 내준 은인이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유리나. 당신이 손에 쥔 것은 아룡검대의 깃발이 아니지 않소?”
“이것은 시민 혁명대를 상징하는 깃발입니다.”
시민 혁명대의 정신은 비폭력, 비저항이다.
그를 상징하는 노란색 꽃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다.
“시민 혁명대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원해요. 은총 없이도, 우리는 잘 살아낼 수 있어요. 은총 때문에, 시민들끼리 분열되어 싸우고 서로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참상을 용납할 수 없어요. 또한 수많은 용아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어요. 생김새가 다르다뿐이지, 그들 또한 사람이니까요.”
“숭고한 정신이군요.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소?”
“지하로 가는 게이트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그걸 열어서 데르소나의 참상을 알려야 해요.”
“그걸 열기만 하면 되오? 그럼 뭐가 달라지오?”
“네.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게이트가 열리면 이 공간에 상당한 양의 마나가 새어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유리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바깥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6마탑주를 믿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뒤쫓아온 빈첸이 소리쳤다.
“그만! 마탑주는 뛰어난 마법사야!”
“빈첸 공자?”
순간,
유리나의 시야가 약간 어두워졌다.
마탑주가 가벼운 결계를 펼쳐 공간을 분리했다.
헬리오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중요한 순간에, 고지를 빼앗으려는 방해꾼이 등장했군.”
그리고 유리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빈첸의 한 마디.
‘마탑주는 뛰어난 마법사야’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 유리나의 뇌리에 꽂혔다.
‘뛰어난 마법사?’
처음 유리나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
그 순간, 영상송출을 막은 마법이 펼쳐졌다.
헬리오스가 직접 말해주었다.
-이렇게 신속 정확한 결계를 펼치다니. 이건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한 것 같군요.
그리고 그 이후.
또 다른 살상마법이 펼쳐졌다.
마탑주는 그 마법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 또한 마법이었다.
유리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시민 혁명대가 무엇을 꾸미는지 알아내고자 했던 것 같아.’
헬리오스가 피식 웃었다.
“이런. 눈치챘군.”
“6, 6마탑주님……?”
“시민 혁명대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연구가 망가지는 것이 싫거든.”
유리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6마탑주가 한패였어.’
어쩐지.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마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탑주에게 마음을 열게 만든 뒤, 시민 혁명대가 무엇을 꾸미는지 알아내려는 함정이었던 것 같았다.
“말해.”
“…….”
유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준비해 왔다.
“제법 강단이 있는 아이구나.”
마탑주가 손을 튕겼다.
그러자 유리나가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마탑주는 그런 유리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은총이 제법 효과가 있군.”
방금 마탑주는 정통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은총’을 먹은 자들은 특별한 파장의 소리에 반응한다.
‘은총’은 그렇게 설계되었다.
방금 마탑주가 만들어낸 소리가 그 소리였다.
“정말 재미있는 연구야. 이론상으로는 불에 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 텐데. 어때? 버틸 만한가? 실제로 해보는 건 처음이군.”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면 모든 것이 편해질 거다, 아이야.”
“…….”
“혁명대를 배신하려무나. 큰 권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게다.”
유리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헬리오스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유리나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컥!
피를 토해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죽는 건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의식의 끈이 멀어졌다.
“마음대로 정신을 잃을 수도 없을 게야.”
그녀는 정신을 잃지 못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꺽꺽대며 괴로워했다.
유리나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점차 사라져 갔다.
“자. 아이야. 말해보아라. 모든 것이 편해질 것이다. 부자가 될 수 있어. 로랑이 뭘 꾸미고 있느냐?”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
유리나는 여러 번 혼절하고 깨어났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녀는 영원의 지옥에 갇힌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헬리오스마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게지?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느냐?”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어.”
대답을 하는 유리나의 동공에는 초점이 아예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과 정신에 새겨진 대답이 절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신념은 부러지지 않아.”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낼 권리가 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 속에서, 유리나는 시민 혁명대원들을 떠올렸다.
비폭력으로 저항하던 많은 동료들이 잡혀갔고 고초를 겪었고 죽었다.
‘나는…… 가야 해.’
고지로 가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가야 해.’
가서 고지에 시민 혁명대의 기를 꽂고,
시민 혁명대원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고지로 가야 해.’
그녀는 바닥을 기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으나, 그래도 어딘가를 향해 기었다.
어디로 움직이는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않아 주어 고맙습니다. 시민 혁명대원, 유리나 경.”
빈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