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2화
카곤이 검을 들고 외줄 앞에 섰을 때.
빈첸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너는 그 줄을 자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
카곤은 망설임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율리안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님. 근데 이거 진짜 괜찮죠?
‘그래. 놈은 나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니까.’
사실 율리안도 빈첸과 같은 생각이기는 했다.
율리안이 파악한 카곤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아. 진짜 강심장이라니까.
그래도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여전히 바람은 강했고,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뎌도 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빈첸도 홍련을 들었다.
검 끝으로 카곤을 가리켰다.
“와라.”
그 모습은 승자가 도전자를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카곤이 씨익 웃었다.
빈첸과 율리안의 생각대로, 카곤은 외줄을 자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빈첸이 올라선 외줄 위로 올라왔다.
-다른 길로 이동하지도 않네요.
율리안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생각 중이었다.
카곤이 사미온의 이름을 걸고 고지점령전에 참여한 만큼, 다른 무엇보다 고지점령에 혈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었다.
‘거봐라.’
그러나 빈첸은 달랐다.
빈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로 온다고 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무인들은 희한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놈의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가끔은 자존심이 밥보다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또한 이곳에는 보는 눈이 무척 많아. 여기서 줄을 먼저 끊게 되면 아주 우스워지는 짓이지.’
그래서 카곤은 정면승부를 택했다.
카곤은 그리 어렵지 않은 모양새로 외줄을 타고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빈첸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제법 중심을 잘 잡는군.”
이 훈련을 이미 수차례 받았었던 빈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카곤은 외줄 위에서 걷는 것이 그리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
카곤에게는 낯선 환경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곤은 천부적인 자질로 어색한 환경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봐라, 율리안. 저게 천골이다.’
마나를 제대로 머금은 천골.
천골은 무학과 관련된 것은 물론, 천부적으로 신체를 활용하는 감각을 타고난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조차 자질로서 극복해내는 것. 네가 처음부터 마나를 익혔다면 저 몸을 가졌을 거야.’
-우리 시대에는 아무도 그렇게 안 하거든요.
‘아무도 그렇게 안 하긴.’
살아 있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빈첸이 그랬고, 멀린도 그랬다.
‘네가 아는 두 명이 이 방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전 세계 인구 중에 두 명이면 퍼센트로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당연히 모르지.’
-하아.
카곤이 어느덧 빈첸 앞에 섰다.
카곤이 물었다.
“나를 막아선 이유는?”
“나는 유리나와 동맹을 맺었거든.”
카곤의 시선이 빈첸 어깨너머 절벽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멀리, 유리나가 고지를 오르고 있었다.
“유리나를 고지로 보내고, 너는 나를 막겠다?”
휘잉-!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외줄이 위태로이 흔들렸고 빈첸과 카곤은 각자의 중심을 잡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카곤이 물었다.
“고지점령전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건 너도 마찬가지기에 내 앞에 마주 서고 있는 것 아닌가.”
이곳에 모인 수많은 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빈첸도 그걸 알고 카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호흡 하나마저도 사방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내 시작선언을 기억하나?”
“기억하지. 너는 아덴카가 아닌 붉은 요새의 이름을 걸고서 출전했더군.”
사실 카곤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빈첸 ‘아덴카’는 패배하면 안 되지만, 빈첸 ‘생도’는 패배해도 괜찮으니까.
마치 빈첸이 패배를 기정사실로 하고서 참여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실망했었어. 나에게 패배를 준 아덴카의 후계자가, 겨우 여기서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거든.”
빈첸이 피식 웃었다.
카곤이라면 저렇게 말할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빈첸 아덴카로서 너를 막아서려 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이곳을 격전지로 선택한 건 환경적 우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군.”
빈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카곤도 대답을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내심 저번의 패배가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조금 불리하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오늘의 승리는 더욱 값질 것이다.
카곤이 검을 내질렀다.
“이쪽에서 먼저 가지.”
왼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이곳이 외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빨랐다.
빈첸은 홍련으로 카곤의 검을 쳐냈다.
챙!
검명이 들려왔다.
‘틈!’
빈첸이 거리를 좁혔다.
아덴카 정검 기본 2식.
깊게 찌르기.
정검은 기본을 추구한다.
화려하지도 않고 쾌속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정직하고 곧은 찌르기였다.
그렇기에 ‘외줄’ 위라는 환경에서는 제격이었다.
카곤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요? 외줄은 처음일 텐데.
빈첸이야 많은 훈련을 통해 외줄에 익숙해져 있다지만 카곤은 아니었다.
카곤은 지금 천부적인 감각만으로 경험의 열세를 극복하는 중이었다.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직까지는 호각이네요.
‘그러나 점점 더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카곤의 적응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몇 분의 시간만 더 주어지면, 외줄이라는 환경의 이점은 사라지게 될 것 같았다.
카곤의 적응속도는 빈첸에게 허탈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익숙한 감정이기도 하지.’
천재 위의 천재를 마주했을 때의 상대적 박탈감.
그것은 빈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이미 500년 전에 뼈저리게 느꼈던 감정이기에.
빈첸과 카곤은 서로 거리를 벌린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네 신비로운 검은 언제 보여줄 거지?”
“딱히 그 검을 사용할 필요를 못 느끼겠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못했다.
이능검격을 펼치기 위해서는 ‘검로’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녹록지 않았다.
외줄이라는 환경이 그것을 힘들게 만들었고 카곤이라는 상대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사용하지 않는 건가,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이곳은 검투장이 아니다, 카곤.”
카곤이 씨익 웃었다.
“하긴. 그건 그래.”
카곤은 외줄 위에서 가볍게 점프했다.
“이제 여기도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군.”
“…….”
카곤은 외줄에 완전히 적응했다.
환경적 이점은 모조리 사라진 셈이었다.
“간다.”
빈첸은 카곤에게서 자신감을 읽어냈다.
그리고 카곤의 다음 검격을 예상했다.
‘한 번의 페이크 검격 이후로 두 번의 찌르기.’
한 번의 찌르기는 무시했다.
그 약간의 시간을 통해 마나의 성질을 변환하여 중검을 사용했다.
무거운 마나가 마력회로를 돌며 검술의 성질을 바꾸었다.
아밀룬 제3 검식.
중검첩방(重劍疊防).
외줄 위.
어차피 검의 방향은 한정되어 있었다.
두 번의 찌르기를 막아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겠지.’
사미온 검식에 누구보다 익숙한 빈첸이다.
‘나는, 네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
이 찌르기가 끝이 아니다.
뒷공간을 점하여 가상의 검이 뚫고 나올 것이다.
이것은 사미온 중급 검식 중 하나.
‘공첨격(空㦰擊)이겠군.’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으면 대처할 수 있다.
빈첸은 홍련을 외줄에 댄 채 물구나무서듯 몸을 뒤집어 올렸다.
빈첸의 몸동작은 하나의 기예였다.
중검첩방의 힘이 사미온의 검을 막아냈다.
카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나를 미리 읽어내는 것 같구나, 빈첸.”
* * *
사미온의 가주, 발키아는 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시간이 카곤의 편이라는 것을 직감하던 중이었다.
“칸. 아무래도 이번에는 빈첸이 무리한 도전을 한 것 같은데.”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그 뒤에 헤르카가 앉았다.
헤르카가 작게 속삭였다.
“언니, 오빠들. 여기서 기세 방출하고 그러면 곤란한 거 알죠? 제발요. 남의 잔치에서 행패 부리지 마세요.”
헤르카 옆에는 바르곤이 앉았는데 바르곤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칸과 발키아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헤르카의 모습이 보기 참 좋았다.
‘쌤통이군.’
발키아가 다시 말했다.
“카곤은 외줄에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빈첸의 신비한 검은 사용하기 어려운 것 같고, 그렇다면 오늘은 빈첸이 패배할 수밖에 없겠는데.”
“…….”
발키아가 씨익 웃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우리가 이길 것 같네. 아쉽게 됐어, 칸.”
그렇게 말한 순간.
빈첸이 중검첩방을 활용하여 카곤의 연속 찌르기를 막아냈다.
이후,
기예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뒤에서 찔러오는 ‘공첨격’까지 쉽게 파훼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나, 발키아?”
“…….”
이번에는 발키아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빈첸에게는 특별한 눈이 있다고.”
실력적으로 카곤에게 밀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빈첸은 아덴카 검식을 배운 지 이제 겨우 반년 남짓 되었다.
공식적으로 그 전에는 제대로 된 검식을 익힌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자질도 카곤이 훨씬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은 카곤과의 공방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발키아가 놀란 것은 그 사실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알잖아, 칸.”
“…….”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첸과 카곤의 공방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칸과 발키아는 다른 것에 주목했다.
“검첨이 외줄 끝에 닿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
홍련의 검날 끝이 외줄에 닿아 있었다.
빈첸은 홍련을 무게중심 삼아 물구나무서듯 일어섰다.
“중검으로 누르고 있는 외줄에 공첨격에 의한 반탄력과 빈첸의 체중이 더해졌어. 게다가 저 검은 한센 야장이 다듬어준 검이라며. 외줄이 끊어졌어야 정상이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다시 말해, 외줄에 뾰족한 못을 놓고 망치로 두드린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저건 빈첸이 마나로 현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칸이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저 정도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
“…….”
이건 단순히 ‘특별한 눈’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첸이 카곤을 상대로 상당한 여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빈첸이 이 검투를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이유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지금 빈첸의 모든 모습은 철저히 계산된 모습이며, 의도된 행동들이었다.
“반대의 경우?”
어느덧,
빈첸이 뇌력을 이끌어 올렸다.
발키아는 입을 다물고 빈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저 상황에서 뇌력까지 운용할 수 있단 말이야?’
사실 이건 ‘역용’의 도움이 컸으나 발키아는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럼 지금 빈첸이 보여주려는 건 뇌력 연환검?”
“그렇겠지.”
빈첸은 카곤의 검을 막아내며, 밧줄을 지켜내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칸이 짚은 것이 그것이었다.
반대로 빈첸이 공격했을 때.
카곤이 밧줄까지 신경 쓸 수 있을지.
지상에서의 싸움과 외줄 위에서의 싸움이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빈첸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덴카 정검 3식.
저번에는 신력을 연환하여 사용했었다.
그것은 하나의 연습이 되었다.
뇌력 연환.
길게 베어내기.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힘.
멀린의 ‘벽력종절’을 모사했다.
세로로 길게 베어내는, 뇌력과 연환 된 아덴카의 3검식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