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1화
사람들의 시선은 검투가 아닌 ‘고지점령전’에 집중되었다.
그건 헬라임의 가주 가폰소도 마찬가지였다.
‘빈첸 녀석의 의도가 도대체 뭐지?’
머리가 아파왔다.
시선을 끌려는 건 알겠는데 갑자기 유리나와 동맹했다.
그리고 유리나를 도와주며 원숭이 마물을 모조리 도륙했다.
‘느껴지는 기도보다 훨씬 강하군.’
가끔 저런 녀석들이 있기는 했다.
실전에 훨씬 강한 놈들.
빈첸이 그런 유형의 사람인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방어마법진이 활성화되면 꽤 큰 부상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6마탑주 ‘헬리오스’가 다가왔다.
헬리오스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가폰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헬리오스와 인사를 나누었다.
“살다 보니 마탑의 탑주와 인사를 나누는 날이 오기도 하는군요. 영광입니다.”
“그만큼 헬라임의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허허.”
“아닙니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뿐입니다.”
“200년 동안이나 말이지요. 200년의 역사를 지닌 가문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헬리오스가 말을 이었다.
“빈첸 공자에게 이능을 베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듯하군요.”
“무슨 뜻인지요?”
헬리오스의 시선이 파룬산을 보여주는 전광판으로 향했다.
영상 속, 빈첸은 발동된 마법방어진을 깨뜨린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헬리오스는 상황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방어마법진을 통째로 베어버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어마법진을 이루는 중요한 마나흐름을 베어내 마법진을 무너뜨렸다고 보는 것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아주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은 틀림없습니다. 8급 생도가 마법진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무위를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가폰소도 예측하지 못했다.
방어마법진을 적절한 방법으로 파훼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 버릴 줄이야.
8급 생도 수준에서 이런 게 가능한 일인지도 예측하지 못했다.
“가주께서 꽤 속이 쓰리시겠습니다. 저 정도 방어마법진을 구현하기 위하여 돈이 꽤 들었을 터인데. 허허.”
“……제 손자가 그토록 훌륭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할아비인 저는 기쁠 따름입니다.”
헬리오스는 영상을 통해 빈첸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주 신비로운 힘이군요. 왜 죽은 부탑주가 바르곤을 통해 저 아이를 후원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저 힘을 역으로 분석하면 마법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보면 볼수록 놀랍습니다, 저 아이의 힘이.”
가폰소는 헬리오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빈첸에게 해코지하지 말라는 뜻이군.’
마탑은 연구를 중요시한다.
마탑에게 있어서 현재의 빈첸은 연구대상인 듯했다.
다시 말해, 연구 대상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건방진 마탑놈들.’
남의 행사에 와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상대는 마탑주였다.
“제 손자가 그토록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니. 아주 기쁩니다.”
헬리오스가 빙그레 웃었다.
“아이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하여 파룬산으로 가고자 하는데, 괜찮습니까?”
“제가 어찌 마탑주의 행보에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뜻대로 하시지요.”
“고맙습니다. 헬라임 가주.”
헬리오스는 그 자리에서 워프를 사용했다.
고지점령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
파룬산으로 이동했다.
* * *
유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방어진이 발동하지 않았어! 아냐. 발동은 했는데 사라진 거야.’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빈첸이 마법방어진을 무효화시켰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발동된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최소 두 단계 이상 실력의 격차가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1고리의 마법사가 발동시킨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최소 3성 이상 무인의 힘이 필요하다.
그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이 마법진은 5고리의 마법사들이 합심해서 만든 마법진이라고 들었어.’
상식대로라면 빈첸이 최소 7성 이상의 경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데.’
또 놀라운 건, 빈첸에게서 마를렌 향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속으로는 무척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스레 말했다.
“좋은 향수 쓰나 봐.”
“내가 존경하는 분이 선물로 주셨어.”
빈첸은 호흡을 다스렸다.
방금 이능검격을 펼치느라 많은 힘을 소모했다.
이제부터는 체력전이었다.
빈첸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이동하자.”
“고지점령전이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마법방어진을 벗어나자 급경사의 산로가 보였다.
유리나는 이미 이 급경사를 여러 번 주파했었고, 이 코스를 오르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빨리 가야 해. 카곤 공자가 얼마나 빠를지 몰라.”
“아니.”
빈첸이 고개를 저었다.
“카곤은 네 생각보다 훨씬 느릴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고지점령전은 본래 함께하는 거라고.”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곳이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어도 혼자서는 오르기 어렵다.
‘특히 카곤이 시작한 위치라면 더더욱.’
아마도 특별한 결계가 생성되어 있을 것이다.
살상력은 없지만 보다 까다로운 조건의 결계나 마법진.
이를테면 짝수의 수를 맞춰야만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트랩 등 말이다.
“어떤 조건을 지닌 결계는 파훼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워. 방어마법진처럼 직접 공격을 하는 마법진이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방어마법진처럼 적극적인 마법진은 그만큼 마나흐름이 격렬해. 그만큼 뻔히 보인다는 얘기지. 말하자면 단단한 나무야.”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빈첸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단단한 나무도 여러 번 도끼질을 하면 부서지기 마련이거든. 그렇지만 살상력이 없이 조건만 까다로운 마법진은 달라.”
“반대로 마나흐름이 희미해서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 말하자면 물 같은 속성을 지녔지.”
물은 베려 해도 베어지지 않는다.
비살상마법진은 위험하지는 않지만 파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카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래?”
유리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명가의 자제들은 이 정도 교육을 받고 있는 걸까.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이만큼이나 보고 있는 걸까.
높다란 벽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선택해서 올라올 거야.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이동해도 괜찮아.”
“알겠어.”
그리고 유리나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천천히 이동한다며?’
그녀가 보기에도 빈첸은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여유는 누군가의 최선이기도 했다.
‘따라가기도 벅차.’
빈첸의 움직임은 굉장히 가벼웠다.
실제로 빈첸은 여유를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절대 여유로운 수준이 아니잖아!’
다시 한번 높은 벽을 느꼈다.
급경사의 길을 한참이나 올랐다.
중간중간 몇몇 마물들과 인공마물들이 나타났지만 빈첸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모두 베어 넘겼다.
그사이, 빈첸의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호흡이 거칠어진 사람은 유리나였다.
‘생각보다…… 훨씬 괴물이네.’
빈첸의 움직임은 가볍다 못해 자유로운 수준이었다.
마치 이곳을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이곳의 지형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무인들은 무학 외에 다른 것은 등한시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올라가는 모양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원이 주특기인 아룡검대원이었으니까.
‘마법진이나 결계에 대한 이해도. 지형을 파악하여 활용하는 능력. 변수에 대한 임기응변. 모든 것이 지원 임무가 주특기인 나보다 월등해.’
뼈 아프게도 그게 사실이었다.
두 개의 마법결계를 지나쳤다.
“이 다음이 마지막 코스야. 절벽과 절벽 사이. 저 외줄 보이지? 저걸 타고 이동하면 고지가 코앞이야. 내가 먼저 보여줄게.”
유리나는 시범을 보이려는 듯 먼저 외줄에 매달렸다.
익숙한 모양새로 외줄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빈첸은 조금 달랐다.
“뭐, 뭐하는 거야!”
외줄에 거꾸로 매달린 유리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빈첸이 외줄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먼저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빈첸의 속도가 더 빨랐다.
빈첸은 외줄을 성큼성큼 걸어 중간 부근에 도착했다.
유리나는 또다시 깊은 충격에 빠졌다.
‘외줄을 저딴 식으로 통과하는 정신 나간 인간이 어디 있냐고!’
아무리 균형감각이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저건 미친 짓이었다.
적어도 유리나의 기준에서는.
그러나 정작 빈첸은 평온했다.
외줄 위를 걷는 훈련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많이 겪어왔다.
-진짜 이런 훈련을 했어요?
‘나 때는 다들 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요?
‘이것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에서 하기는 했다만, 사실 높이는 중요하지 않아.’
-왜 안 중요한데요?
‘일정 수준 이상의 높이가 되면 거기서 거기야. 떨어지면 어차피 죽는 건 똑같으니.’
-하아. 그래요. 이제는 뭐 놀랍지도 않아요.
외줄은 모두 8개.
이 절벽은 모든 경로의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중간 즈음에 멈춰 섰다.
어느덧 옆줄의 유리나도 근처에 도달했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먼저 가.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바람이 불어왔다.
외줄이 위태로이 흔들렸으나 빈첸의 균형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서 마를렌 향수의 냄새가 느껴졌다.
시민 혁명대만이 느낄 수 있는 향.
시민 혁명대를 증명하는 내음이었다.
‘빈첸에게 맡겨두고, 나는 앞으로 가자.’
빈첸에게는 빈첸의 일이.
세리나 자신에게는 세리나 자신의 일이 있었다.
‘부탁할게, 빈첸.’
세리나가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곤이 절벽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었다.
마나를 담아 음성을 전달했다.
-빈첸. 뭘 하고 있는 거야?
-널 기다리고 있었지.
-어째서?
-오늘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이루기 위하여.
빈첸의 목표는 고지 점령전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빈첸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고지점령전에서 응당 보여 주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었고, 아룡검대원을 뛰어넘는 지원기량과 파악능력을 보여주었다.
유리나에게 설명했던 많은 것들은 사실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유력인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빈첸 아덴카의 모습을 똑똑히 각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빈첸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내는 절차이기도 했다.
사미온과 아덴카의 격돌.
하이데스 회동에서 이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사건은 없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네가 여전히 컨텐더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뿐이지.
카곤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다른 줄을 통해 그냥 이동하면 그만 아닌가?
그는 검을 꺼내 들고서 빈첸이 서 있는 외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면, 네가 서 있는 줄을 잘라버리면 아주 편하겠는데.
카곤이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외줄을 잘라버릴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때, 빈첸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