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00화
율리안이 말했다.
-변수에는 더 큰 변수로 대응하는 것. 가폰소 아저씨가 전략을 잘 짰네요.
설마하니 사미온의 귀공자가 고지 점령전에 참여할 줄이야.
-근데 가폰소는 확신이 있는 걸까요? 유리나가 카곤마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하이데스 회동의 가장 큰 목적은 헬라임가의 힘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지 점령전의 승자는 유리나가 되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폰소가 카곤의 출전을 받아들인 것이 의외이기는 했다.
고지 점령전을 주관하게 된 헬라임의 무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헬라임 아룡검대원 유리나입니다.”
“붉은 요새 8급 생도 빈첸입니다.”
“사미온 6공자 카곤 사미온입니다.”
빈첸은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카곤은 자신을 사미온의 6공자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 사미온의 6공자로서, 사미온의 이름을 걸고 출전한 것이다.
‘반드시 이기려 들겠군.’
-그러게요.
무인이 말했다.
“고지 점령전에 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고지 점령전은…….”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 참여자들이 아니라 고지 점령전을 구경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설명이었다.
“……하여, 선언 하시겠습니까?”
가장 왼쪽에 있던 유리나가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예. 유리나 본인은 아룡검대의 명예를 걸고서, 정의롭고 공정한 경쟁을 치러갈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빈첸과 카곤도 같은 선서를 이어갔다.
차이가 있다면 빈첸은 스스로를 ‘붉은 요새의 생도’로 선언했고, 카곤은 ‘사미온의 6공자’라 선언했다.
율리안이 빈정거렸다.
-난리도 아니겠네요. 둘은 아룡검대랑 붉은 요새를 걸었는데, 쟤는 사미온을 걸었어요. 형님을 방해하는 쪽이 아니라 그냥 승리 쪽으로 마음먹은 것 같아요.
지금의 이 말은 마법통신을 통하여 수많은 곳에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소식지 기자들의 펜은 무척이나 바빠졌을 것이고, 사미온과 관련되어 있는, 혹은 사미온에게 관심이 많은 수많은 무가들이 이 상황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소리 없는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아까도 설명 드렸다시피, 각자 시작 위치가 다를 것입니다. 간이 이동관문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유리나가 빈첸과 카곤을 바라보았다.
“공자님들이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 할지라도, 팔룬산에서는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나는 헬라임의 아룡검대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간이 이동관문을 통해 사라졌다.
다음은 빈첸 차례였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이동관문 쪽으로 향했다.
카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말했었지, 이제는 내가 컨텐더(*도전자)라고.”
“…….”
빈첸이 이동관문 위에 올라섰다.
“오늘부터는 달라질 거다, 빈첸.”
카곤의 목소리를 끝으로 빈첸은 어느 한 지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얼마 후.
탕!
마력 탄환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지 점령전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아니.’
이곳의 원래 주인공은 유리나였다.
유리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무대.
거기에 카곤이라는 커다란 변수까지 주어졌다.
‘고지 점령전에서 이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의외네요. 또 융통성 없이 무인의 사전에 패배란 없다, 라고 고집 부릴 줄 알았더니.
‘어차피 다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감상을 말한다는 건, 그냥 나한테 면박 주고 싶은 거냐?’
-티 났어요?
율리안이 킥킥 웃었다.
-제법 많이 똑똑해졌네요. 처음에는 일기장의 내용도 믿어버리는 순수한 영감님이었는데.
빈첸은 홍련을 휘둘렀다.
고블린과 같은 하급 마물들이 종종 습격해 왔고 빈첸은 어렵지 않게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면 되겠어?’
그들의 방향은 어젯밤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하루 전.
빈첸과 율리안은 팔룬산의 지도를 한참이나 관찰했다.
그를 통해 둘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파악한 시작 포인트는 총 여덟 곳이거든요.
고지 점령전이다.
‘고지’를 향해 가는 길목의 난이도가 엇비슷해야 한다.
-이 중 두 곳으로 선택이 될 거예요.
‘가장 쉬운 길은?’
-여기. 이 포인트요.
빈첸은 붉은 펜을 들어 한 지점을 체크했다.
‘가장 어려운 길은?’
-여기요.
다른 지점을 체크했다.
‘유리나는 가장 쉬운 포인트에서, 나는 가장 어려운 포인트에서 시작하겠군.’
-저도 그렇게 봐요.
‘한 번 더 꼴 가능성은? 유리나에게 가장 어려운 길을, 내게 가장 쉬운 길을 준 뒤 결계나 마법등으로 나를 방해할 가능성은?’
-그런 꼼수를 부리긴 어려워요. 왜냐하면 6마탑주가 형님을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하루가 흘렀다.
율리안의 예측이 약간은 빗나갔다.
카곤이라는 변수가 추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어려운 길을 카곤에게 내줬네요.
그러나 빈첸과 율리안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지도. 머릿속에 있지?’
-당연하죠.
‘지금 포인트는 어디야?’
-제가 체크했던 8개의 포인트 기억나요? 유리나의 포인트를 기준으로 해서 카곤의 포인트 방향으로 세 번째 포인트. 거기로 추정돼요.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형님. 어떻게 추정했는지 물어봐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말이 맞겠지.’
-물어봐주라고요!
‘네 잘난 척을 별로 듣고 싶지 않구나.’
-궁금할 텐데? 그럴 텐데? 분명 궁금할 텐데? 궁금해 줘라, 제발.
빈첸이 피식 웃었다.
‘현재 시각. 해의 위치. 그에 따른 그림자. 현재 분포된 수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겠지.’
-나 이 영감님 싫어.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면 되겠어?’
-몰라요.
‘사명은 까먹은 모양이지?’
-시선을 좌측으로 15도 정도 틀어보세요. 저기 높은 곳에 왕벚꽃나무 보이죠? 저쪽을 기준 삼아서 가야 해요. 아마도 방향감각을 어지럽히는 결계 같은 것이 있을 테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고요. 형님, 힘내세요!
빈첸은 율리안이 말해준 방향으로 움직였다.
중간중간 가벼운 결계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정신계열 마법이었다.
이 정도 정신계마법은 빈첸에게 큰 무리를 주지는 못했다.
-육체는 좀 물렁물렁한데, 정신은 확실히 단단하네요.
율리안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아무리 가벼운 결계들이라고는 하나, 빈첸에게는 터럭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율리안은 새삼스레 빈첸의 정신력에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시대를 살아온 건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왕벚꽃나무 앞에 도착했다.
‘어때요? 흔적 있어요?’
이 포인트는 유리나의 포인트와 빈첸의 포인트가 만나는 지점이다.
빈첸은 일부러 ‘고지’가 아닌 유리나의 경로 쪽으로 합류했다
‘나뭇잎이 부서져 있어. 먼저 올라간 모양이다.’
-거 더럽게 빠르네. 그래도 괜찮아요. 걔는 각종 결계랑 마물들을 파훼하면서 가야 하고, 형님은 그냥 뒤쫓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체력관리만 잘하면 되겠군.’
빈첸은 홍련을 갈무리한 뒤 유리나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첸은 원숭이 형태의 마물들과 대치하고 있는 유리나를 발견했다.
“유리나.”
그 말에 원숭이 마물들이 빈첸 쪽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틈이 생긴 유리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쏘아냈다.
갈퀴가 달린 밧줄이었다.
그녀는 밧줄을 이용해 나무 위로 올라섰다.
‘고맙다, 빈첸!’
빈첸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길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너희 같은 귀공자들이 팔룬산에서 아룡검대원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빈첸이 마물들의 시선을 끌어준 덕택에 그녀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구역에서 가장 빠른 건 나야.’
지름길도 모두 외우고 있다.
마물 출몰 지역도, 결계와 인공마물의 배치도 모두 꿰고 있다.
‘여기서 나무를 타고 이동하면 방어마법진의 중심부를 피해 없이 통과할 수 있어.’
마물의 피만 안 묻히면 된다.
원숭이 마물들이 걸리적거리던 차였는데 빈첸이 도와주었다.
빈첸의 도움 덕택에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헉!’
밧줄을 계속해서 쏘아냈다가 회수하며, 마치 거미처럼 줄을 타고 이동하던 유리나는 크게 당황했다.
밧줄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평범한 밧줄이 아니었다.
숲 속에서 빠른 이동을 위해 고안된 밧줄.
끊어지지 않기로 유명한 백색거미의 실을 꼬아 만든 밧줄이었다.
‘이게 도대체 왜…….’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서 몇 바퀴나 굴렀다.
툭!
무엇인가와 부딪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피부 여기저기가 까지기는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젠장.’
무엇인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응? 손?’
몸을 일으킨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꺅!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너, 너, 너!”
빈첸이었다.
“어, 어, 어떻게……!”
“내가 검대원보다 빨랐나 보지.”
겉으로 여유로이 말하고 있으나 빈첸은 거친 숨을 숨기는 중이었다.
미전류 특성을 더한 설상 걸음을 사용하여 유리나를 쫓아왔다.
밧줄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유리나는 분명히 빨랐고, 빈첸도 약간은 무리를 해야만 했다.
‘최근 알약으로 마나를 늘려놓지 않았으면 힘들 뻔했어.’
부랑자 수용소에서 먹은 알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유리나가 황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죠?”
“당신에게 동맹을 제안하려고.”
“……뭐?”
“원래 고지 점령전은 그렇게 진행되는 거 아닌가?”
본래는 8명이 참여한다.
시작지점이 모두 다르지만 결국 몇몇 포인트들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여 고지로 향하게 된다.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만이 ‘고지점령’의 핵심이 아니었다.
“나는 붉은 요새의 생도이고.”
붉은 요새는 파성무인이 되기 전, 자신의 세력과 지지기반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지 점령전의 목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생도답게, 네게 동맹을 제안하는 건데.”
유리나는 반말로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빈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또한 반말로 말을 이었다.
“넌 나한테도 따라잡혔어.”
“…….”
“결국 고지 쪽 포인트들에서 카곤과 만나게 될 거야. 그때, 카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어?”
“……원하는 게 뭐야?”
“당연히 승리지.”
그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리나는 빈첸에게서 묘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건 설마……!’
본래 무취(無臭)의 꽃.
마를렌 꽃으로 만든 향수 냄새였다.
빈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지 점령전은 개개인의 무력과는 별개로 전략적인 선택들도 중요시 되는 항목이잖아.”
손가락으로 유리나를 가리켰다.
“아룡검대원인 네가 전략적인 선택들을 맡아.”
빈첸은 환생이후부터 분업의 효과를 직접 체감해 왔다.
혼자가 아닌 함께의 가치를 배워왔다.
빈첸이 홍련을 들어 올렸다.
“내가 무력을 맡을 테니.”
이제서야 빈첸 뒤를 쫓아온 원숭이 형태의 마물 무리들이 달려들었다.
빈첸은 아덴카 검식을 사용하여 마물들을 베어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유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거, 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
마물들의 녹색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유리나는 아차 싶었다.
빈첸의 검술에 놀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방어 마법진 속이잖아.’
마물의 피가 땅에 닿는 순간, 방어마법진이 극도로 활성화된다.
이 방어마법진은 적으로부터 성이나 요새등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마법진으로서, 상대를 섬멸하는 기능을 하는 마법진이었다.
‘아무리 위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방어마법진은 파룬산의 가장 까다로운 트랩 중 하나였다.
‘젠장!’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말했잖아. 내가 무력을 담당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