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99화
빈첸이 말을 이었다.
“사미온의 후계자와 사미온의 가주가 참석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들이 참석하는 이유는 저를 관찰하기 위함입니다.”
“너는 네 스스로를 제법 높게 평가하는구나.”
“제가 아닌 다른 이유가 없으니까요.”
가폰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말해보거라.”
“사미온의 가주가 아덴카의 후계자를 보기 위하여 자리한다면, 아덴카의 가주께서도 가만히 있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그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하이데스 회동의 주인공은 헬라임이 아니었다.
사미온과 아덴카가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사위가 오겠구나. 맞느냐, 베르사?”
베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베르사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겉으로는 장인인 가폰소의 안부를 묻는 서신이지만, 실제로는 그도 하이데스 회동에 함께하겠다는 통보서나 다름없었다.
가폰소는 서신을 노려보았다.
서신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전에 내 초대장에는 답신조차 않더니.’
지금 이 순간, 가폰소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베르사는 그런 가폰소가 아니라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오자마자 서신을 꺼내 들지 않았던 것은 빈첸이 어디까지 알고 있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일련의 상황들을 통해 가주 칸이 참석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짐작해 낸 것 같았다.
빈첸이 또 말했다.
“그렇다면 하이데스 회동에 사미온과 아덴카가 함께하게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가폰소 경.”
“……고맙구나.”
이내 가폰소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세계 3대 무가 중 두 무가의 수장들이 함께하여 준다니 기쁘기 이를 데 없구나.”
“두 무가라니요?”
빈첸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세계 3대 무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
가폰소는 빈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바르티칸까지 온단 말이냐?”
“저와 레이븐의 관계를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아이들의 관계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로운 분이 아니시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븐의 본래 목표는 카곤이었다.
지금은 카곤이 아니라 빈첸이다.
레이븐의 과거 목표와 현재 목표가 한자리에 모인다.
그라면 분명 이곳으로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것이다.
“레이븐은 여기 오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합니다. 바르티칸 가주 폰시아노 경께서는 레이븐을 끔찍이 사랑하시죠. 그분께서도 레이븐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세계 3대 무가가 하이데스 회동에 참석한단 말이냐?”
가폰소는 여유로운 듯 하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빈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바르티칸의 서신도 도착하겠군.’
그날 밤.
실제로 바르티칸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대륙 남부에서 꽤 큰 규모의 행사였던 하이데스 회동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이목이 쏠리는 거대한 행사가 되어 버렸다.
가폰소는 사리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은밀히 말했다.
“지하를 철저히 점검하도록 하고, 집사가 직접 빈첸을 관리하고 감시하도록.”
가폰소는 사리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집사 정도의 인력을 그 꼬마녀석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깝기는 하다만.
그러나 며칠 만에 생각이 바뀌었다.
“반드시 집사가 직접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놈이 뭘 꾸미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내야 해.”
“네. 세계 유력인사들을 끌어들인 것 외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철저히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민 혁명대 쪽은 어떻지?”
“간부들 몇을 체포하여 구금시킨 상태입니다. 최근 메일튬에서 넘어온 부랑자들이 시민 혁명대에 회유된 정황이 포착되지만 크게 신경 쓸 수준은 아닙니다.”
“로랑, 그놈은?”
“현재 모습을 감춘 상태입니다.”
“골치 아프군. 그놈이 빈첸과 작당하여 뭘 꾸미고 있느냐가 관건인데.”
빈첸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
빈첸과의 대화에서, 내내 수세에 몰렸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딸인 베르사 앞에서 말이다.
베르사 앞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곧 하이데스 회동이다. 고지 점령전에서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봐. 깨끗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 * *
하이데스 회동 이틀 전.
마침 셀비라에게서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헬라임 및 데르소나에 대한 역사적 특징들을 나름대로 조사해서 보내준 서신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근현대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미술가 프란시스 에일롬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되면 한 번……]
아주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빈첸의 숙소를 찾아왔다.
“오랜만이군, 빈첸.”
붉은 머리의 미소년.
소년의 이름은 카곤이었다.
빈첸은 카곤을 바라보았다.
‘적황미력이 느껴지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틸로반 장로가 보여주었던 그 힘과 유사했다.
형태가 보이지 않는 적황미력.
틸로반의 것은 가짜였으나, 카곤의 것은 진짜였다.
‘자연스레 적황미력을 두르고 있는 수준까지 올라섰구나.’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이군.”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손이 맞닿은 순간, 빈첸은 인상을 찡그릴 뻔했다.
-왜 그래요?
‘이상하리만치 너무 익숙해서.’
카곤과 실질적으로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곤은 너무나 익숙했다.
적황미력을 몸에 두른 카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영웅왕이라 불리는 카진과 너무나 비슷했다.
그에게 찔렸던 심장이 아파왔다.
‘제기랄.’
카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이 묘한 위화감이 빈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카곤이 물었다.
“일부러 판을 크게 만든 건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냐?”
“나는 그저 내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생도로서의 임무 말이냐?”
“그래.”
카곤이 자리에 앉았다.
세리가 따뜻한 홍차를 내왔고, 카곤의 시선이 세리에게 닿았다.
세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재미있는 시녀를 두었군.”
“뭐?”
“아무것도 아냐. 그저 나는 마법을 익힌 자가 시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
카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법사에게서 왜 정령의 냄새가 나지?”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좀 특별한 구석이 있잖아.”
“무형(無形)의 적황미력을 온몸에 두르고 호흡하고 있는 지금의 네 모습보다 특별할까?”
“…….”
“아덴카의 장로가 가짜 적황미력을 익히고 있던데. 그것도 아주 특별한 일인데 어떻게 생각하지?”
“…….”
카곤의 몸이 움찔했다.
무형의 적황미력.
이것은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영역의 기운이었다.
카곤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곱절로 얻어맞았군.”
카곤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세리는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방 밖으로 나갔다.
카곤은 홍차를 한 입 마신 뒤 말했다.
“네 임무가 혹시 시민 혁명대를 도우라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냥, 이런저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그래. 베르사 부인, 아니 베르사 헬라임께서 여기 오신 것도 수상하고. 너도 알다시피 그분은 어지간해서는 헬라임의 도시에는 발을 들이지 않으시잖아.”
“꽤 그럴싸한 추론이군.”
카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야. 역시 빈첸은 대단하네.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게 아주 망부석 같아.”
빈첸의 말대로 카곤은 적황미력을 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적황미력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선사한다.
어떤 이에게는 중압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빈첸은 적황미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정말 희한한 기분이야. 분명 성취는 내가 더 위인데, 이상하게 너랑 싸우면 이길 거란 확신이 들지 않는단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가 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 중이거든. 내 얘기 좀 들어주겠어?”
카곤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방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이란 말이지.”
“왜 그걸 고민하지?”
“말했잖아. 나는 널 경쟁자로 생각한다고. 내가 올라서는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내 스스로 높이 올라서거나, 또 다른 하나는 내 경쟁자를 무너뜨리는 거지. 그중 더 쉬운 방법이 뭔지 알지?”
내가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남을 떨어뜨리는 게 더 손쉬운 일이다.
빈첸이 대답했다.
“너는 그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겠지.”
“응? 왜 그렇게 생각해?”
“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빈첸이 판을 이렇게 크게 벌였다는 사실도.
빈첸의 임무가 시민 혁명대를 돕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빈첸과 시민 혁명대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세리가 마법사임과 동시에 정령사라는 사실도.
빈첸이 적황미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 카곤은 빈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 내가 아는 너라면, 나를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거다.”
“이번에 방해하면 너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데?”
세계 3대 무가가 함께하는 회동이 되었다.
여깃 빈첸이 겨우 아룡검대원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붉은 요새의 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카곤에게는 크나큰 오점이 될 것이다.
“아직 나락으로 떨어지기에 내 위치가 너무 낮거든.”
“음?”
“내가 아는 너라면, 나를 더욱 높이 올릴 것이다. 때를 기다리겠지.”
“왜? 우리가 선의의 경쟁자라서?”
“아니.”
빈첸은 저 눈과 저 기운을 가진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카곤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것은 카진과 똑같다.
“더 높은 곳에서 추락시키는 게 더 즐거울 테니까. 내가 아는 너라면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군.”
카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는 빈첸의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카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첸. 건투를 빈다.”
그가 몸을 돌려 걸었다.
“또 보자, 친구야.”
* * *
하이데스 회동의 날이 밝았다.
헬라임의 힘을 과시하고 200주년을 축하하며 여러 행사가 열리는 하이데스 회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하이데스 회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데르소나로 향했다.
헬라임의 가주 가폰소가 귀빈들을 향해 개회사를 읊었다.
“……하였습니다. 귀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며, 하이데스 회동의 시작을 선언합니다.”
하이데스 회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행사가 이루어진다.
하이데스 회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행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교파티였고, 또 다른 하나는 검투였다.
그러나 계획은 헬라임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 곧 시작하겠다. 얼른, 얼른 가자.”
“마리아 수석기자님. 검투 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고지 점령전 쪽으로 가야지!”
정치적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사교 파티.
무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검투.
그 두 가지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곳은 바로 ‘고지 점령전’이 이루어지는 데르소나 내 팔룬산이었다.
팔룬산으로 향하면서 마리아는 몇 가지를 연거푸 확인해 보았다.
“다른 무가의 일원들은 기권했고.”
결국 고지 점령전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아룡검대원 유리나, 또 다른 한 명은 빈첸 아덴카 생도네. 재미있겠어.”
팔룬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소식지 기자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이 되어 있었고, 마법으로 만들어낸 커다란 소식판도 허공에 떠 있었다.
“음? 수석기자님. 저기 보세요.”
조수가 소식판을 가리켰다.
허공에 뜬 마법영상에는 고지 점령전 참여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두 명이 아닌데요?”
또 다른 한 명이 있었다.
마리아가 입을 쩍- 벌렸다.
“카곤 사미온? 카곤 공자가 고지 점령전에 참여했다고? 이렇게 갑자기?”
같은 시각.
헬라임 가주 가폰소는 검투장에 VIP석에 앉아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었으나 정신은 팔룬산에 쏠려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변수를 만들어 왔다면, 나도 변수를 만들어 주어야겠지. 안 그런가,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