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96화
빈첸은 하이데스 회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이데스 회동은 예전 빈첸이 경험했었던 진검회동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헬라임가와 친분이 있는 가문들이 한 곳에 모여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는데, 개중에는 무가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행사도 있었다.
“예. 몇 가지 큰 행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설마 검투(劍鬪)이더냐?”
“아닙니다.”
진검회동은 아직 ‘진짜 무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린아이들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번 하이데스 회동은 달랐다.
각 무가의 진짜 무인들이 참여하는 행사였고, 빈첸은 그들과 검투를 치러 이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지 점령전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고지 점령전.
고지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 목적인, 예로부터 무가의 힘을 보여주는 행사들 중 하나였다.
고지를 점령한 무인은 그곳에 자신 혹은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기를 꽂아 승리를 선언하여야 한다.
“단순히 산을 오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는 않겠죠. 수많은 결계와 마물이 동원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게 그러한 난관을 뚫어낼 경험과 지혜가 있다고 자부하는 모양이구나.”
“…….”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모습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가폰소를 자극했다.
‘최근의 성공에 취하여 사리분별이 안 되는 것 같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빈첸은 아직 어렸고, 가진바 힘과 성취에 비해 너무 큰 성공을 연달아 해냈다.
지금은 현실의 벽을 깨닫지 못하고 망아지처럼 날뛸 때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가폰소가 말했다.
“동원되는 마물은 정교하게 구현된 마법허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가짜는 아니다.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빈첸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마법형상을 벨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폰소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본 빈첸은 애송이였다.
“아주 재미있는 힘을 가졌구나. 그런 힘을 가졌다면 마법으로 구현한 마물이 무용지물이겠지.”
“붉은 요새에 처음 입성할 때에도 비슷한 관문을 거쳤습니다. 여럿의 청안 백호를 베어냈었습니다.”
“이 할아비에게 자랑하는 것이냐?”
가폰소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마물은 그렇다 치고, 트랩과 결계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트랩과 결계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보기 좋은 모습이다.”
고지 점령전은 개인이 참여하는 무대다.
다시 말해 길잡이와 따로 고용하거나 팀으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길잡이의 특성과 무인의 힘을 모두 갖춘 자여야 승리할 수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런 자들은 흔치 않았는데, 헬라임에는 그러한 목적의 무인집단이 존재했다.
“왜 참여하려는 것이냐?”
“제가 익힌 것들이 어른들을 상대로도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맹랑한 녀석.”
가폰소는 빈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얼핏 보면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보였다.
“좋다. 허락하마. 좋은 모습을 기대하지.”
* * *
빈첸은 호화로운 방으로 안내되었다.
윌슨은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장난 아닙니다, 공자님.”
세리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빈첸이 이곳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좋아. 동선은 여기서 저기로 하고. 저쪽 벽 안쪽에 또 다른 침실이 있을 것 같으니까 저길 윌슨의 방으로 주면 되겠다.’
바닥에는 고급 양털이 깔려 있었고, 벽면에는 예술가가 그린 그림들이 즐비했다.
천장에 달린 황금 샹들리에와 대리석 기둥.
높은 천고는 헬라임가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율리안이 말했다.
-의도가 너무 투명한데요?
‘뭐가?’
-무가(武家)의 접객실이 이렇게 화려하고 높은 거 봤어요?
‘잘 모르겠다.’
-이런 형식의 건축 구성은 제라미엘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제라미엘은 햇볕 부랑자 수용소에서 일탈을 저지르던 루산 신관 일행이 압송된 심판의 탑이다.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구조적 장치죠. 심판의 탑뿐만 아니라 스위첼 군사연방(軍士聯邦)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예요.
스스로의 무예만이 본인의 힘을 증명한다고 자부하는 정통 무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였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을 억누르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봐요, 저기 저 액자도 엄청 비싼 거고, 바닥에 이 양탄자도 최상급 명품이에요.
빈첸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 공간이 왜 자신을 억누른단 말인가.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런 게 통한단 말이냐?’
-네. 보통은요.
‘이런 걸로 사람이 위축된다고?’
-그렇다니까요?
‘그게 진짜냐?’
-이 영감님이, 속고만 살았나.
율리안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최근 신기가 강해진 덕택에 빈첸과의 연결이 굳건해졌다.
그래서 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형님의 정신에는 터럭만큼의 타격도 없네요. 진짜 아예 타격이 없어서 놀라울 정도야.
율리안과 빈첸은 똑같이 높은 층고와 황금 샹들리에를 보았다.
-타격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인지 자체를 못하시네…….
그러나 율리안과 달리, 빈첸은 층고와 샹들리에를 기억하지 못했다.
빈첸에게 있어서.
천장은 그저 천장일 뿐이고, 샹들리에는 빛을 내는 도구일 뿐이었다.
빈첸은 빈첸 나름대로 진지했다.
‘내가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율리안은 답답해졌다.
빈첸도 율리안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율리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주 신기한 사회가 되었구나. 이런 걸로 위압을 줄 수 있다니.’
아마 500년 전에도 비슷했을걸요.
형님이 특이한 거지.
율리안은 허허- 웃고 말았다.
최고급 명품 양탄자도, 황금 샹들리에도, 번쩍이는 벽면에 걸린 예술품과 온갖 휘황찬란한 사치품들도, 빈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빈첸 일행은 짐을 풀었다.
빈첸은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2주 뒤.’
하이데스 회동.
그곳에서 시민 혁명대가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그게 아마도 분수령이 되겠지.
한차례 마력자전을 끝내자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여기도 부랑자 수용소의 창고 같은 시설이 존재하겠지?’
-그렇겠죠.
분명히 ‘은총’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남은 2주 동안 그곳을 찾는 데 주력할 생각이었다.
빈첸은 5일 동안 데르소나를 샅샅이 돌아다녀 보았다.
호위의 명목으로 헬라임의 무인들이 따라붙었으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창고 같은 건물은 없는 것 같군.’
-철저하게 숨긴 것 같아요. 아마 점조직 형태로 운용될 것 같아요.
5일이 지났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뭐, 형님이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시선은 꽤 끌 수 있을 테니까요. 하이데스 회동같이 큰 행사를 앞두고 있으면 아주 작은 변수도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거든요.
빈첸이 이곳에 온 목적은 ‘로랑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로랑이 요구한 것은 그저 헬라임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달라는 것뿐이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빈첸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참고로 윌슨과 세리도 따로 움직여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중이었다.
세리는 세리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했다.
“공자님. 제가 정말 맛좋은 식당을 알아냈어요.”
돼지고기를 부드럽게 쪄내어 채소와 함께 먹는 식당이었다.
빈첸 일행은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헬라임가의 무인들이 동행했다.
세리는 눈치 보지 않고 빙긋 웃었다.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 목소리가 제법 커서 무인들은 그녀에게 신경이 집중되었다.
세리는 일부러 마나를 활용하여 빈첸에게 음성을 전달했다.
-데르소나의 지기(地氣)가 무척이나 약해요.
-그래?
-지반이 얕은 경우 보통 이런 느낌이 있어요. 이를테면 지하가 있다거나 하면요.
-그 이상은 알아보기 어렵지?
-죄송해요. 제 실력으로는 더 밑까지 살펴볼 수가 없어요.
-아냐. 큰 도움이 됐어.
무인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세리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는 듯했다.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신 겁니까?”
빈첸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가 주위를 닦고서 무인을 바라보았다.
“네 임무가 무엇이지?”
“공자님과 공자님 일행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무에나 집중해.”
“…….”
빈첸과 무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무인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알았다면 다행이군.”
윌슨은 고개를 박고 음식을 먹는 척하면서, 빈첸을 말을 따라했다.
‘그렇다면 임무에나 집중해, 짜식아. 알았다면 다행이다, 짜식아!’
사실 윌슨도 빈첸처럼 하고 싶었지만 무인들이 무서워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세리와 빈첸은 마나를 담아 대화를 나누었고 무인들은 상당히 불편해하며 그 자리에 함께했다.
무인들이 불편해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이 상황.
세리와 빈첸이 일부러 연출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들은 가폰소에게 보고되어 가폰소의 심기를 어지럽힐 것이다.
-세리가 참 든든하네요. 눈치도 빠르고.
방으로 돌아온 빈첸은 이번에도 세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기가 약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마치 땅 안쪽이 텅 빈 것 같아요.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소나.
이 도시 지하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율리안. 이 도시 밑에 뭔가가 있을 수 있을까? 거대한 지하 도시같은 거.’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는 한데요. 그게 가능하려면 토목과 건축의 뛰어난 기술자들이 대거 필요해요.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는구나.’
-헬라임에는 그런 기술자들이 많지 않단 말이에요. 여기가 뭐 엄청 큰 교역도시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기술자들이 대거 동원되면 소문이 나기 마련이란 말이에요. 공사기간도 최소 2년은 걸릴 거고.
‘2년?’
빈첸은 하모나의 말을 떠올렸다.
-결국 시민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된 거야. 그게 2년 전이고.
2년 전부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년 전. 헤나 누님께서 이곳에 파견 왔었지.’
당시 임무가 어떤 임무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헤나가 ‘파란 보석’을 받을 만큼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누님한테 편지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빈첸이 씨익 웃었다.
빈첸은 헤나 아덴카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하여 윌슨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윌슨. 이 서신을 메일튬의 헤나 누님께 보내거라.”
“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마침 차를 달여 내오던 세리가 걱정스레 말했다.
“윌슨이 칠칠맞아서 걱정이에요.”
“제 역할을 다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세리.”
세리는 순간 직감했다.
빈첸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윌슨을 보내신 거야.’
윌슨을 감시하는 무인들은 분명 서신을 확인하려들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서신의 내용을 파악하겠지.
그리고 세리 자신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저지했을 것이고.
‘서신의 내용이 새어 나가길 바라신 거구나!’
세리는 빙그레 웃으며 빈첸에게 홍차를 따라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공자님은 무엇을 보고 계신 걸까?’
아무래도,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보고 계신 것 같아.’
윌슨은 윌슨의 역할을 하고 있을 테니, 세리는 세리 자신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궁금한 척 물었다.
“공자님. 서신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