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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95화 (95/184)

환생의 정석 95화

길을 잘 알고 있는 하모나가 안내를 해주었다.

데르소나까지는 3일이 걸렸다.

이제 한 번의 이동관문만 더 타면 데르소나의 입구였다.

하모나가 부러운 듯 말했다.

“내 안내는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좀 그래. 내 얼굴을 아는 상위 시민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속마음을 감추었다.

‘어쩌면 내 배신은 이미 알려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더 이상 은총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난 사실 두려워.’

그녀는 이제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그래도…… 네가 유미를 구해줬으니까.’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빈첸이 말했다.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었어, 고맙다.”

“아~ 부잣집 도련님은 좋겠다. 이동관문을 이렇게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부잣집 도련님이어서 이동관문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빈첸은 베르사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고, 그에 따라 충분하고도 남을 양의 임무수행비를 받았을 뿐이었다.

“근데…….”

하모나는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다.

한참을 우물 쭈물대다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정말 미안했어.”

“여기까지 오는 데 네 도움이 컸어. 첫 만남의 실수는 이미 만회했다.”

하모나는 말하지 않았으나 빈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모나는 자기 나름대로 큰 리스크를 감당하고 있다.

첫 만남에서의 습격은 분명 잘못이었지만, 하모나는 하모나의 방식으로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 고마워. 유미의 은인이니 너는 내 은인이기도 해.”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언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녀가 빈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줘. 무슨 일이든 도울게. 그럴 일이 있겠냐마는…….”

하모나는 빈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말로 진심을 표했다.

“무인 중에도 너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내가 아는 무인들은 헬라임 무인들밖에 없었거든. 너는 내가 알던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야. 너는 나한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어.”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모나의 말과 표정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하모나의 최선을 비웃지는 않았다.

잠자코 하모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유미가 그랬어. 네가 부랑자 수용소에서 기적을 일으켰다고. 이번에는 우리가 기적을 일으켜볼게. 네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8급 생도 빈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 지켜봐 줘.”

“기대하지.”

빈첸은 하모나와 헤어진 뒤 이동관문을 타고 데르소나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상급의 무인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오른 가슴에는 헬라임을 상징하는 두 자루의 검이 그려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빈첸 공자님이 맞으십니까?”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기도가 상당히 날카로웠는데 적어도 5성 이상의 무인이 틀림없었다.

그가 말했다.

“본가로 모시겠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표정은 꽤 딱딱했다.

겁쟁이 윌슨은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세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빈첸 뒤에 섰다.

빈첸은 반말로 물었다.

“너희들은 헬라임의 무인들이겠지?”

저들은 빈첸을 ‘공자’라고 불렀다.

지금 이 자리는 ‘헬라임의 무인들이 빈첸 공자’를 맞이하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빈첸의 당당한 태도에 무인들은 조금 당황했다.

“그렇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명령을 내렸나?”

“…….”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나를 본가로 초대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헬라임의 가주, 가폰소 헬라임 경께서 초대하였습니다.”

빈첸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앞장서라.”

‘그렇다면’이라는 말 속에는, 가주의 초대가 순순히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주의 손님을 대할 때에, 본인의 소속과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것을 잊지 말도록.”

* * *

바롬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집을 정리했고 떠날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너희 같은 놈들은 지겹기 짝이 없다!”

바롬은 퉁명스레 말하며 가죽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하모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건?”

“에잉, 몰라! 그냥 받어.”

가죽 주머니 안에는 상당한 양의 금화가 들어 있었다.

“천만 루덴쯤 될 거다.”

“처, 처, 처, 처, 처, 천만?”

하모나는 너무 놀라 가죽 주머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헬라임은 빈첸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거야.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의 배신이 들키지 않았을 것 같으냐?”

“…….”

“그 돈이면 당분간 너희들도 ‘은총’을 구할 수 있을 게다. 용량을 조금씩 줄여봐.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너희들의 몫이니.”

“영감이 이걸 왜 주는 건데?”

“그러게나 말이다. 이걸 왜 널 줄까. 하아. 나도 모르겠다.”

“영감님은 짐 왜 싸는 건데? 가게는 왜 정리하고?”

“멍청한 너희 때문에 여기도 털렸을 게 뻔해. 여길 떠야 한다.”

하모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죽 주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롬이 몸을 돌려 나가며 말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나한테 왜…….”

하모나는 울먹거렸다.

“나한테 왜 잘해주는 거야?”

바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던 몸을 돌려 다시 하모나 쪽으로 걸어왔다.

“뭘 잘했다고 울어?”

“왜 나한테 잘해주냐고! 키워준 은혜를 배신한 건 나잖아. 영감님은 나 싫어하잖아.”

“지금도 싫다.”

바롬은 울고 있는 하모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보기 싫다는 듯 몸을 또 돌렸다.

여기서 괜히 따뜻한 말을 건넸다가는, 오히려 하모나가 큰 죄책감을 가질 것이다.

모질게 돌아서는 편이 하모나를 위해 좋다고 생각했다.

“나도 영감님 싫어……!”

하모나는 눈물을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바롬은 등을 돌려 걷고 있었다.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충고하지. 빈첸 공자와 너무 가까이하지 말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롬은 거기까지 말한 뒤 사라져 버렸다.

금화 주머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하모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영감님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을게.’

가죽 주머니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머니를 든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야.’

그녀는 다짐했다.

2주 뒤 있을 시민 대혁명.

그곳에서 로랑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상위 시민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의 초라함이 영감님이 꿈꾸는 세상에 도움이 될 거야.’

* * *

빈첸 일행은 헬라임 본가의 입구를 통과했다.

윌슨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빈첸에게 바짝 붙었다.

‘왜 이렇게 다 무섭게 생겼어?’

약 2주 뒤 큰 행사가 있다.

그렇다 보니 경계가 꽤 삼엄한 편이었다.

빈첸이 그것을 짚었다.

“무인들의 기세가 날카롭군.”

“하이데스 회동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공자님.”

헬라임의 200주년 행사.

200년 만에 한 번 피는 꽃인 ‘하이데스’의 이름을 본 따 ‘하이데스 회동’이라고도 불렀다.

‘하이데스 회동’은 헬라임가의 직계와 방계, 그리고 초대받은 가문들의 유력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이기도 했다.

빈첸은 가볍게 웃었다.

‘내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알겠고.’

하이데스 회동은 핑계다.

일렬로 주욱- 늘어선 무인들 사이를 지나가게 하는 건, 빈첸의 기를 눌러놓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사소한 행사에 지나치게 심력을 들이시는 것 같군.”

그 말에 빈첸을 안내하던 무인의 몸이 움찔했다.

“사소한 행사가 아닙니다. 200주년을 기념하는 중차대한 행사입니다.”

“그 중차대한 행사의 인력을 이토록 쓸데없는 데 허비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빈첸은 기백을 내뿜으며 걸었다.

“경비가 왜 삼엄하지? 그대들은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가.”

“혹시 모를 소란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주의 초대로 이곳에 왔다.”

이는 아까 빈첸이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무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군.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켜야 할지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뭘 어떻게 지키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경계해야 할 대상이 ‘손님’인 자신이 아님을 꼬집는 말이었다.

‘어째서 나를 경계하며 인력을 낭비하느냐?’를 격조 높게 꾸짖었다.

빈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무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산하라. 나는 외할아버님을 뵈어야겠으니.”

빈첸의 말에 결국 무인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그 소식은 빈첸의 외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가폰소 헬라임에게도 전해졌다.

가폰소는 자신의 방에서 빈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빈첸과 만난 가폰소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한 방 먹었구나. 불쾌했느냐?”

빈첸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예.”

“네 기백이 하도 뛰어나다 하여 시험을 한 번 해봤을 뿐이니 기분을 풀거라. 소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더구나.”

“외할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리하겠습니다.”

가폰소의 눈이 빈첸을 훑었다.

빈첸 역시 가폰소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내 어머니의 아버지인가.’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 무가의 수장답게, 기도가 상당히 매서웠다.

눈빛은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단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단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가폰소가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한 번 내저었다.

그러자 주변의 무인들과 시종들도 모두 밖으로 나갔다.

가폰소와 만난 이 거대한 홀에는 빈첸과 가폰소, 둘만 남게 되었다.

“그래.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승급 때문이더냐?”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기도 합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요새장 헤르카 경의 추천으로 8급 생도 시험을 치르는 중인 것은 맞습니다.”

“여기. 헬라임에서 말이지.”

“그렇습니다.”

“임무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네 외할아버지가 아니냐?”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까요.”

“그러냐?”

가폰소는 다시 크게 웃었다.

호탕한 웃음이었으나 빈첸이 느끼기에는 가짜웃음이기도 했다.

“좋아.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무엇이냐?”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순간,

가폰소의 기도가 잠깐 바뀌었다.

“베르사가? 네게 부탁을 했단 말이냐?”

‘베르사가 부탁을 했다’라는 말은, 가폰소의 평정심을 잠시나마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말이었다.

“예.”

“베르사가 너를 아들로 인정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가폰소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이내 다시 웃었다.

“네가 최근 훌륭한 일을 해냈다는 것을 들었다. 내 아들의 비행을 바로잡아주었다지.”

“운이 좋았습니다.”

“네가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내 아들이 죽었구나.”

순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혀, 형님, 무, 무서운데요?

‘괜찮아. 날 어쩌지는 못할 거다.’

정문에서부터 대놓고 초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빈첸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아들의 목을 베었어야 했을 테니.”

“무인다운 말씀이시군요.”

“그래도 네 삼촌의 죽음인데, 조금은 애도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

“하하, 농담이다. 그놈은 죽어도 싼 놈이었지. 가문의 명예를 그토록 더럽혔으니. 잘했다. 아주 잘하였다, 빈첸.”

가폰소는 위압에 가까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나 빈첸은 그 기운에 짓눌리지 않았다.

가폰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확실히 기백만큼은 상급 무인 저리가라였다.

“그래서? 내 딸의 부탁이 무엇이었느냐?”

“그건…….”

빈첸의 말을 듣자 가폰소가 눈을 크게 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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