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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94화 (94/184)
  • 환생의 정석 94화

    “시력을 잃으셨습니까?”

    로랑의 얼굴에는 기다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가로로 긴 자상.

    빈첸은 저 흉터가 날붙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가 보기엔 어떠하느냐?”

    “스스로 베신 것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상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랑의 얼굴과 신체에는 저항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로랑이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의 솜씨라는 뜻이다.

    “그러나 검의 흔적은 결코 뛰어난 무인의 것이 아니군요.”

    뛰어난 무인이 아닌데 로랑의 눈을 베었다.

    그러나 저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스스로 그랬다는 뜻이다.

    “……왜 그러셨습니까?”

    “더 이상 내 눈에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이죠?”

    “나의 가문이 지배하는 도시들을. 그 밑에서 분열되어 싸우고 괴로워하는 시민들을.”

    빈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빈첸을 바라보며 로랑이 주변에 양해를 구했다.

    “빈첸과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롬 노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가 마음먹었다면 이미 이곳의 모두를 베었을 것입니다.”

    바롬은 로랑이 걱정되는 듯 여러 차례 만류했으나 로랑의 태도는 단호했다.

    “빈첸과 저. 둘이 남는다고 해도 지금과 위험은 같습니다.”

    결국 바롬이 말했다.

    “빈첸 공자. 안쪽으로 들어오게.”

    빈첸은 바롬 노인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테이블을 치우자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가 존재했다.

    로랑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좀 잡아주겠나? 보다시피 나는 눈이 안 보여서.”

    “그러죠.”

    지하로 내려오자 기다란 통로가 보였다.

    희미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바깥 어딘가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로랑은 벽돌로 만들어진 왼쪽 벽면을 더듬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무엇인가를 찾듯 주변을 더듬거렸다.

    “혹시 이걸 찾습니까?”

    빈첸은 로랑의 오른 손목을 잡아 한 벽돌에 가져다 대었다.

    그와 동시에 벽돌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랑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나?”

    “마나흐름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요.”

    마나의 흐름이 한쪽으로 향하여 모이고 있다는 건, 그것이 어떠한 장치일 확률이 높았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랬다.

    “그 마나흐름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예.”

    “…….”

    로랑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심상을 만들지 못했다는 소문이 진짜인 것 같군. 믿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누가 믿겠나? 이 시대에 심상이론을 익히지 않은 무인이 있다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니.”

    로랑이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실패했던 방법이야. 그러나 너는 성공했구나.”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토록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심상을 다루지 않고 무예를 익히는 자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대성하기 전에 죽는다.

    심상이론이 발전하면서, 심상 없이 마나를 다루는 법은 사장되어 버렸으니까.

    벽이 90도로 회전하였고 밀실이 생성되었다.

    “앞쪽에 의자가 있을 거야. 나를 좀 앉혀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빈첸은 의자를 가져와 로랑을 앉혔다.

    “왜 굳이 저와 독대를 하시겠다 한 겁니까?”

    “누님이 너를 보내셨다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님과의 친분이 없다.”

    베르사는 나면서부터 기재였다.

    헬라임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로랑은 아니었다.

    그는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고, 결국 스스로 가문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왔다.

    “누님이 특별히 나를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누님을 가족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건 누님도 마찬가지겠지.”

    “…….”

    “그런데 왜 그분께서는 너를 보내셨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구나.”

    빈첸은 스스로 내렸던 결론을 정리하여 얘기를 건넸다.

    “본인에게. 그리고 본인의 가문에 가장 큰 형벌을 내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가.”

    로랑도 사실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것을 베르사의 아들인 빈첸을 통해 들으니 좀 더 와닿았다.

    “저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눈을 그렇게 만드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로랑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들에 도움이 필요했다.

    스스로 눈을 벤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무학에만 몰두한 건 아닌 것 같구나.”

    로랑은 빈첸의 시야가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말이 맞다. 다른 이유가 있어.”

    대외적으로는 ‘헬라임가가 만들어가는 세상을 차마 내 눈으로 볼 수 없어서’라고 알렸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시민 혁명대를 조직하여 오랜 세월 투쟁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시민들끼리 분열하여 싸우는 단계에 이르렀어.”

    최상급 시민과 상위 시민.

    상위 시민과 하급 시민.

    이들은 스스로 계층을 나누어 서로를 물어뜯고 싸우고 있다.

    “시민 혁명대 출신의 상위 시민들도 점차 많아지고 있고, 그에 따라 혁명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형국이 되었지. 그래서 나는 그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했어.”

    스스로 눈을 베어 신념을 보이는 행위.

    시민 혁명대의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행동이었다.

    “로랑 경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그 말은 삼켰다.

    로랑의 방식은 빈첸에게 맞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랑 경의 신념은 분명 숭고하고,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빈첸은 햇볕 수용소를 직접 목격했다.

    그곳의 부조리와 잘못된 것들을 모두 보았다.

    그곳에는 진짜 어른이 없었다.

    빈첸의 기준에서 로랑은 진짜 어른이었다.

    로랑이 말을 이었다.

    “햇볕 부랑자 수용소의 부랑자들을 구해냈다지?”

    그들 중 몇몇이 이곳으로 와서 그곳의 실상을 전해주었다.

    덕분에 로랑은 빈첸을 직접 만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접 큰일을 처리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흑색검대입니다. 저는 시작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갇혀 있던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

    무스돔을 찾아온 부랑자들은 자신을 구한 사람을 빈첸이라 여겼다.

    빈첸은 ‘알약’을 먹고 스스로 부랑자가 되어 잠입하여 사람들을 구했으니까.

    “한 가지만 더 묻겠네. 햇볕 부랑자 수용소에서 무얼 느꼈는가?”

    빈첸은 그 질문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곳의 ‘창고’는 마정석 제련을 표방하는 1차 시설이었습니다. 분명 2차 시설이 존재할 겁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지?”

    “가장 베일에 싸인 곳이겠지요. 이를테면 최상위 시민만 출입할 수 있다고 알려진 데르소나 같은 곳이요.”

    “……스스로 생각한 것인가?”

    “예.”

    “왜 누님께서 너를 선택하였는지 알 것 같기도 하구나.”

    빈첸은 로랑이 보아왔던 무인들과 어딘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무인들이 갖추지 못한 시야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겨우 열넷이란 나이에 말이다.

    “제가 무엇을 지원하면 되겠습니까?”

    “데르소나로 가줄 수 있겠나? 2주일 후, 그곳의 대광장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릴 예정이야.”

    “헬라임의 200주년 행사. 하이데스 회동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이번 해는 헬라임이 만들어진 지 올해로 정확히 200년이 되는 해이다.

    헬라임가는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행사를 열게 되었다.

    “그때에는 수많은 유력 명가와 유력 소식지 기자들이 함께할 거야.”

    200주년 행사는 헬라임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우호적인 명가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라도 일으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현재 헬라임의 가장 큰 골칫덩이는 역시 시민 혁명대다.

    그들은 총력을 다하여 시민 혁명대를 억누를 것이다.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야.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 아버지의 시선을 끌어줘.”

    시선을 끌어달라.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 날.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그건 비밀이네. 모든 준비는 우리 혁명대가 알아서 할 거야. 우리가 시작한 일이고, 우리가 끝맺음을 맺을 거야. 그렇기에 누님께서도 아덴카의 무인들이 아니라 생도인 너를 보냈겠지.”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네 도움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일을 수행하려 했어. 네가 도와준다면 조금 더 편해지겠지.”

    “알겠습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한 가지를 더 부탁하고 싶은데.”

    “말씀하십시오.”

    “빈첸. 너는 나를 돕겠다고 약조하였지만 시민 혁명대는 아니야.”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빈첸은 로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검을 뽑을 것이고. 피를 흘려야 한다면 피를 흘릴 것입니다. 저는 시민 혁명대가 아니라 8급 생도 빈첸 아덴카이기 때문입니다.”

    “아덴카의 이름으로 맹세해 줄 수 있겠나?”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덴카.

    이 이름은 빈첸에게도 매우 특별한 이름이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제야 로랑이 밝게 웃었다.

    “비록 말뿐인 맹세이나 이토록 든든하게 들리는 건 처음이군.”

    밀실에서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도중, 로랑이 물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끌 방법이 있나?”

    빈첸이 씨익 웃었다.

    “직접 찾아뵐 생각입니다. 제 외할아버님을.”

    대화가 끝난 뒤.

    지상으로 올라가기 직전, 빈첸이 물었다.

    “로랑 경에게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신기한 내음이 나는군요.”

    그것은 어찌 느끼면 향긋한 꽃향기 같기도 했고, 불쾌한 오물 냄새 같기도 했다.

    시시각각 냄새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이 냄새가 느껴지나?”

    “느끼면 안 되는 냄새였나요?”

    로랑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냄새는 마를렌 향수 내음이다. 마를렌 향수에 대해 알고 있나?”

    “처음 듣습니다.”

    “그래. 처음 듣겠지. 마를렌은 무취화(無臭花)라고도 불린다. 그걸 향수로 만들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시민 혁명대만의 특별한 방식을 사용해야만 맡을 수 있는 냄새지. 어떻게 이 냄새를 맡았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마나를 사용해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린 상황이었다.

    후각 또한 그렇게 증폭시켜 놓았던 상태.

    그래서 이 신기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후각의 민감도를 높여놓은 상태입니다.”

    “후각과는 별개의 문제야. 이 냄새는 개도 못 맡는 냄새지.”

    빈첸은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심상을 만들지 않은 마나를 다루면,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뭐,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왠지 하늘이 우리에게 너를 보내준 것 같구나, 빈첸.”

    “혹시 저도 그 향수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품 속에서 마를렌 향수를 한 병 꺼내주었다.

    본래 시민 혁명대원이 아닌 자들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물건이었다.

    로랑도 그 원칙을 깬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 원칙을 깼다.

    ‘왠지, 이 아이에게는 걸어보고 싶구나.’

    왠지 모를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마침 여분의 한 병이 있다. 가져가거라.”

    * * *

    숙소로 돌아온 빈첸이 말했다.

    “우리는 데르소나로 향할 거야.”

    세리는 빈첸의 옷에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빈첸 옆으로 다가가 빈첸의 겉옷을 받아주었다.

    “출발은 언제 하실 건가요?”

    “내일 오전 일찍.”

    “네. 그 전까지 제복은 깨끗하게 빨아서 다려놓을게요.”

    “고마워, 세리. 괜히 고생시키는 것 같네.”

    “제 행복인걸요.”

    세리는 웃는 얼굴로 빈첸의 제복을 받아들었다.

    눈은 웃고 있었으나 마음까지 아주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조심하셔야 해요. 부랑자 사건 때문에 헬라임 무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예요.”

    더군다나 데르소나라면 헬라임의 중심부다.

    그곳에서 빈첸을 반길 리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들은 수용소 사건을 데미아르 개인의 일탈로 규정했어. 적어도 겉으로는 나를 박해하지 못할 거야. 2주 뒤에 큰 행사가 있으니 더더욱.”

    “알겠어요. 저는 공자님의 뒤를 지킬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고마워.”

    빈첸의 고맙다는 말에 세리는 또 행복한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윌슨은 깊이 항복했다.

    ‘후우, 저 누나는 못 이겨.’

    윌슨 또한 빈첸에게 도움이 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지만 세리는 이길 수 없었다.

    묘한 호승심이 들끓었다.

    ‘흥, 나도 충성심으로는 지지 않지!’

    세리보다 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찾아보기로 했다.

    다음 날.

    그들은 데르소나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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