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93화 (93/184)
  • 환생의 정석 93화

    “뭐, 뭐, 뭐야?”

    빈첸의 강렬한 기세에 하모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몸이 움찔했다.

    몇몇은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하모나가 소리쳤다.

    “거, 겁먹지 마. 놈의 허세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미 상황은 빈첸 쪽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

    뇌력도 아닌 위압만으로 이곳을 장악해 버렸다.

    빈첸은 홍련을 거두었다.

    이미 저들은 살의는 고사하고 전의조차 상실해 버렸으니까.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좀 알아야겠네.”

    일부러 뇌력을 운용하여 설상 걸음을 펼쳤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효과를 주어 뇌전이 일렁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 남자의 뒤를 점하고 슬쩍 밀어 넘어뜨린 뒤 제압했다.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눈으로 보기에 화려한 마나 이펙트가 감돌았다.

    -그치, 연출은 이렇게 하는 거지.

    뇌력을 활용한 연출의 효과는 꽤 컸다.

    “거, 거봐라. 내가 건들지 말자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빈첸에게 제압당한 남자는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또 다른 둘은 벽 쪽에 바짝 붙어 눈치를 살폈다.

    기에 죽지 않은 사람은 하모나뿐이었는데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빈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힘차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를 해주면 좋겠다!”

    인정과 사과가 무척이나 빨랐다.

    빈첸조차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긁적일 정도였다.

    빈첸이 물었다.

    “언제부터 납치를 계획한 거지?”

    “다 솔직하게 말할게. 하몬부터 풀어주면 안 될까?”

    “하몬?”

    “네가 깔고 앉은 멍청한 우리 오빠 말이야.”

    “아.”

    빈첸이 피식 웃었다.

    “뭐, 좋아. 그럼 얘기를 좀 해볼까?”

    * * *

    빈첸의 생각대로 하모나 일행이 빈첸에게 접근한 건 의도적인 계획이었다.

    “응. 파란 보석을 지닌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들은 파란 보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헬라임의 본가가 위치한 ‘데르소나’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데르소나는 1등 시민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최상급 시민’들만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고 했다.

    “네가 시민 혁명대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널 유인한 거야.”

    “파란 보석을 빼앗으려고?”

    “……응.”

    “왜 데르소나에 들어가고 싶은 거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우릴 시험하는 거야?”

    “내가 굳이 너희를 시험해야 할 이유가 내게 있을까?”

    “하긴. 굳이 시험할 필요 없네. 수틀리면 다 죽이면 끝이니.”

    “……왜 데르소나에 들어가고 싶은지 얘기해 봐.”

    “거긴 꿈의 도시니까.”

    헬라임이 다스리는 도시들의 시민들은 데르소나에 입성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데르소나에 입성하여 헬라임 본가에 파란 보석을 제출하면 최상급 시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나 뭐라나.

    “그곳에 들어가면 일하지 않아도 되고, 평생 놀고먹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곳에는 훌륭한 신관님들도 많아서 병이 들어도 금세 나을 수 있어. 최상급 시민들이 누리는 특권이지.”

    “…….”

    빈첸은 알고 있다.

    세상에 그런 낙원은 없다.

    물론 그런 허황된 소문을 믿는 자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빈첸이 본 하모나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 기회야. 진짜 이유를 대.”

    하모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보육원 출신이야.”

    “…….”

    “우리 모두가 정말 아끼고 좋아했던 동생이 있었어. 이름은 유미고 정말 환하고 예쁜 아이였어. 우리 모두의 축복 같은 애였는데……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이 그 아이를 잡아갔어.”

    하모나의 말이 시작되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충혈되었다.

    둘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찾아야만 해.”

    “최상위 시민이 되면 그 아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응. 최상위 시민이 되면 커다란 힘을 가질 수 있으니까. 우리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어.”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는데?”

    “몰라.”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그는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바로, 빈첸에게 활을 쏘아대다가 역공을 당했던 그 남자였다.

    “유미가 돌아왔어!”

    “뭐?”

    남자는 안쪽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듯, 찔끔 놀랐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황급히 활을 들어 올려 빈첸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오라버니는 저번에 나를 구해주신 분이란 말이야! 이 바보 언니 오빠들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 * *

    한 소녀가 빈첸에게 달려왔다.

    빈첸 앞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여,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너는…….”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은 유미.

    빈첸이 햇볕 수용소의 ‘창고’에서 중검첩방으로 구해주었던 그 아이였다.

    “오라버니께서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스우벤 아저씨도 구해주셨구요. 오라버니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셨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뻐요.”

    유미는 빈첸을 만난 것 자체가 감격인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빈첸은 유미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다 오라버니 덕분이죠.”

    유미의 뒤로는 또 다른 남자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 남자는 스우벤.

    강제로 악령계약을 당했던 그 남자였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새 삶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스우벤과 유미는 빈첸에게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모나 일행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얘가, 아니 그러니까 이분께서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셨단 말이야?”

    “언니는 소식지도 안 봐? 공자님 얘기로 엄청 떠들썩하단 말이야.”

    “우리 중에 글자 읽을 수 있는 애는 너밖에 없는 걸 잊은 거야?”

    “그, 그건 그렇지만. 여, 영상 기록석 같은 것도 있고…….”

    “그렇게 비싼 건 구경도 못 해봤어. 넌 본 적 있어?”

    “아, 아무튼. 빈첸 공자님은 나를 구해주셨고 메일튬에서 엄청 활약한 영웅이셔. 그런 분을 모셔다놓고 뭘 하고 있는 거야? 실례를 저지른 거 아니지? 이미…… 저지른 거 같긴 하지만.”

    “아, 아냐.”

    빈첸은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저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저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갔었다.

    당연히 이동관문을 이용할 돈은 없었을 거고, 마차 등을 이용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을 터.

    그러면 결국 여기까지 걸어서 와야 한다는 소리인데 무예를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이 호위도 없이 여기까지 걸어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누님의 도움이겠구나.’

    빈첸은 헤나의 말을 떠올렸다.

    -너를 도울 자들이 있을 것이다.

    유미는 부랑자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과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말해주었다.

    빈첸의 생각대로 1급 생도 중 한 명이 사후처리의 일환으로 수용자들의 탈출을 도와주었다고 했다.

    결국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하모나는 빈첸 앞에 섰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어요. 용서를 바라지는 않지만 대신 공자님께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 시민 혁명대의 사람들과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하모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도 예전에는 시민 혁명대였어요.”

    * * *

    하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한테 유미가 돌아왔잖아. 그거면 됐어.’

    시민 혁명대를 배신하고 헬라임의 은총을 받아 상위 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또다시 헬라임을 배신하기로 했다.

    두렵기는 했지만 하모나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오빠들도 다 같은 생각이지?”

    “물론이지.”

    빈첸에게 적극 협력하기로 결정을 내린 그들은 근처의 허름한 술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시민 혁명대의 연락책 중 한 명인 바롬 노인이 있었다.

    그는 하모나 일행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들이 찾아와! 왜? 나도 잡아가려고? 고문이라도 할 테냐?”

    “고문이라니, 그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네가 더 끔찍하다. 어떻게 네가 나를, 우리를, 배신할 수 있냐! 내가 널!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모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영감님. 유미가 돌아왔어.”

    “흥! 그딴 헛소리를 하려면 썩 돌아가라!”

    하모나 뒤에 서 있던 유미가 바롬 노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바롬은 화들짝 놀랐다.

    “너, 너, 너는!”

    “할아버지. 오랜만이야!”

    “어,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게냐, 요 녀석아!”

    바롬 노인은 유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롬 노인과 하모나 일행 사이에 약간의 알력다툼이 있었다.

    “너희 같은 변절자들에게 유미를 맡길 수 없다! 당장 유미를 내게 맡기거라!”

    라는 바롬 노인과,

    “무슨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 거야? 유미는 내 동생이야! 키워도 내가 키워!”

    라는 하모나 사이의 싸움 아닌 싸움.

    그 싸움은 결국 유미가 직접 말렸다.

    “둘 다 그만 좀 해! 손님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바롬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

    하모나가 흥, 코웃음을 친 뒤 말을 이었다.

    “영감님한테 이해를 받을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혁명대 간부급과 연결을 좀 해줘. 베르사 부인이 혁명대에게 지원군을 보내줬어.”

    “은총인지 똥총인지를 받더니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병에라도 걸린 거냐?”

    외부인사가 돕겠다고 간부급에게 접근한 적이 꽤 있었다.

    그건 헬라임의 함정이었고, 간부급 인사들이 여러 번 체포되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 혁명대는 외부의 지원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라.”

    하모나가 소식지를 내밀었다.

    이번에 메일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기록된 소식지였다.

    바롬 노인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뭐? 그 대단한 빈첸 공자가 네놈들과 접촉이라도 해왔다는 거냐?”

    “그렇다니까?”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런 귀공자가 왜 너희 같은 녀석들을 만나?”

    “아 글쎄 진짜라니까. 첫 만남이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빈첸 공자에게 무조건적인 협력을 약속했어. 그래서 할아범을 찾아온 거야.”

    “쓸모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썩 꺼져라.”

    그때,

    술집 안으로 빈첸이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붉은 요새의 8급 생도 빈첸입니다.”

    바롬 노인은 소식지와 빈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정말 그 빈첸 공자요?”

    “예. 지금은 생도이지만요.”

    “허어. 진짜인 것 같네.”

    그런데 바롬 노인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비록 하모나 일행에게 불호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어쩐지 빈첸이 찾아올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 거란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찾아왔군요.”

    하모나는 좀 억울한 듯했다.

    “뭐야? 할아범? 알고 있었어?”

    “네놈들이 데려올 줄은 몰랐지!”

    “예나 지금이나 밥맛이야!”

    “그럼 너는 똥맛이다!”

    “그럼 할아범은 똥똥맛!”

    “그럼 넌 똥똥똥맛이다!”

    “할아범은 똥똥똥똥맛!”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들은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했고 입장은 많이 달라졌으나, 서로를 향한 애정만큼은 진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빈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바롬은 분명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에 걸맞지 않게 기이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왜 그래요, 찝찝하게?

    ‘사람을 여럿 죽여 본 자의 기세로구나.’

    무인이 아닌 자가 저런 기세를 가지려면 꽤 많은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

    ‘뭐, 나면서부터 저런 기운을 타고나는 자들도 있으니.’

    하모나와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던 바롬은 추태를 깨달은 민망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공자를 기다리는 손님이 한 분 계십니다.”

    얼마 후.

    가게 안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나.”

    모습을 드러낸 중년 남자.

    그는 시민 혁명대의 대장 로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랑 경. 어머니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빈첸은 로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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