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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90화 (90/184)
  • 환생의 정석 90화

    베르사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승급 추천서였다.

    다만 자세한 내용은 쓰여 있지 않았다.

    [8급 생도 빈첸이 임무를 수락한 경우에 한하여 승급 임무를 부여한다.]

    그런데 임무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베르사는 승급 추천서를 작성할 수 없다.

    “제가 알기로 동일인이 1년 이내에 두 번 이상 승급을 추천할 수 없…….”

    하지만 추천서 말미에 헤르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추천인 : 헤르카 퀘벨]

    요새장 헤르카의 직접 추천이었다.

    붉은 요새와 관련된 일이고, 요새장인 헤르카가 추천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을 제3자라 할 수 있는 베르사가 가져왔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빈첸은 베르사의 말을 떠올렸다.

    -동시에 나의 간곡한 부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헬라임가(家)와 관련이 있겠군요.”

    “그래.”

    말이 특별 승급시험이지, 사실은 베르사의 개인적인 부탁에 가까웠다.

    “승급 추천서를 작성하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이 있지.”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형태로 비칠 수 있어서 정치적인 이슈로 엮이게 된다.

    “헤르카 요새장님은 귀찮은 걸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고, 여태까지 본인 스스로 특별 승급을 시켜준 적이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어머니의 부탁이 맞겠군요.”

    빈첸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어머니의 부탁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

    “게다가 7급부터는 깃발이 수여되지 않습니까?”

    8급까지는 붉은 요새의 깃발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7급에게는 7급 생도를 상징하는 백색 깃발이 주어진다.

    빈첸은 햇볕 부랑자 수용소로 진군했던 1급 생도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모습은 빈첸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제 흑색기의 출발이 되겠지요.”

    “임무의 내용을 묻지 않는구나.”

    “어머니께서 부탁하셨으니까요.”

    베르사는 분명 빈첸의 신념을 응원한다고 했었다.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저를 위하여 데미아르를 베시지 않았습니까?”

    “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베었을 뿐이었다.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어머니의 신념을 응원하기 위하여 임무를 받겠습니다. 내용이 무엇인가요?”

    베르사는 한동안 빈첸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헬라임으로 가다오.”

    사실 빈첸은 베르사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전부터 계속 ‘흑마법’과 ‘사미온’이 걸린다.

    ‘틸로반 장로는 흑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 틸로반을 이용하는 누군가가 존재했고.’

    이번에는 비올가와 에드몬드가 이용당했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이용당하고 있고 그 과정에 흑마법이 관여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틸로반 장로 때에는 사미온의 흔적이 느껴졌고, 이번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도인가.’

    사미온 대신 ‘악몽’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했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말하지는 않았다.

    일단 눈앞의 것들부터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완수하겠습니다.”

    * * *

    베르사가 돌아간 뒤, 레이븐이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와의 약속은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군.”

    승급시험이 끝나면 레이븐과 겨뤄주기로 했다.

    레이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빈첸과의 일대일 대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던 레이븐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기다려주지, 특별히!”

    “…….”

    빈첸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를 위하여 내일 곧바로 헬라임으로 떠날 것이다.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배려해 주는 거야.”

    “……고맙군.”

    “3전 0승 3패.”

    “뭐?”

    빈첸은 레이븐과 싸운 적이 없으나 레이븐은 빈첸과 3번 싸운 듯했다.

    이번 임무까지 하여, 결과는 모두 패배였다.

    “너와의 만남 이후로 내리 3패만 했으니 얼른 따라가도록 하지. 후후후.”

    레이븐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세르쿤 집사가 그 뒤에 따라붙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일대일 대결을 손꼽아 기다리셨잖아요.”

    레이븐이 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 세르쿤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졌으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번 임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렇지 않습니다. 제련 시설에서 가장 활약한 사람은 공자님입니다. 비올가의 무인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고 빈첸 공자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지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였다.

    세르쿤의 눈에는 레이븐이 제일 활약했다.

    “집사의 마음은 고마워.”

    그렇지만 레이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용을 활용하여 모든 것을 밝혀냈던 것도 빈첸이었고, 악령강림체를 벤 것도 빈첸이었다.

    부랑자들을 구해낸 것도 빈첸이었다.

    스우벤이란 자가 빈첸 앞에 엎드려 엉엉 울며 감사를 표할 때, 레이븐은 빈첸이 진정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졌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빈첸이 이겨버렸어.”

    “…….”

    “다음에는 꼭 내가 이길 거야.”

    레이븐은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세르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성장하셨군요.’

    이번 사건이 레이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는 레이븐의 뒤를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많은 것들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게 시작일 겁니다.’

    가이아와 헬라임은 꼬리를 잘라냈다.

    상급신관 루산이 이미 죽었으니 가이아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비올가가 멸문했으니 헬라임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고.

    ‘그곳에는 흑마법들이 잔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흑마법진과 관문이 있었다.

    사람을 인위적으로 각성시켜 악령계약을 만드는 수법이었다.

    ‘그리고 리치가 있었고.’

    그 리치는 스스로를 ‘악몽’의 1급 책사라 불렀다.

    1급 책사라는 말은 거짓인 듯했지만 ‘악몽’이라는 단체는 실존하는 듯했다.

    ‘그 리치를 이용하던 헬라임가의 후계자까지 있었습니다.’

    어쩌면 몇몇 유력가문들은 ‘악몽’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암암리에 손을 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빈첸의 말이 아직도 귀에 아른거렸다.

    -이것이 어른들의 순리입니까?

    세르쿤도 ‘어른’들이 어떤 세계를 만들었는지 잘 모른다.

    정확히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레이븐의 안위였으니까.

    ‘그러나 다음 세대가 기대되기는 하는군요.’

    빈첸과 레이븐이 주축이 되어갈 다음 세대.

    그 세대가 무척 기대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공자.’

    * * *

    빈첸은 눈을 감았다.

    -세상에나, 곧바로 승급시험이라니. 데이아 누님보다도 더 빠른 속도인데요? 이러다가 진짜 천과(天果)까지 얻어버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대박인데!

    ‘호들갑 떨지 마라. 단순한 임무가 아니니.’

    -쳇,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그리고 이런 날 호들갑 좀 떨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율리안은 히히- 웃었다.

    데이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승급을 하게 될 줄은 율리안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음 그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임무는 헬라임으로 가서 로랑을 지원해야 하는 거네요.

    ‘그렇지.’

    로랑.

    대외적으로 그는 평민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풀네임은 로랑 헬라임.

    그는 헬라임의 피를 이어받은 사생아였다.

    헬라임가(家)는 로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로랑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갔다.

    그리고 이내 ‘시민 혁명대’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헬라임에서 시민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근데 비폭력 혁명이라니. 이건 실행하기 정말 어려운 건데.

    특이하게도 로랑 헬라임은 무학을 익히지 않았다.

    헬라임의 피를 이었지만 무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폭력시위보다는 비폭력시위의 성공률이 훨씬 높았어요. 아이러니하죠?

    빈첸은 잠자코 눈을 감았다.

    베르사의 마음을 느껴보았다.

    ‘어머니는 왜 내게 이런 임무를 맡기신 것인가.’

    비폭력.

    혁명.

    빈첸 입장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였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력투쟁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덴카의 방식에 좀 더 가깝기도 했고.

    ‘단순히 무력을 행사하는 임무는 아냐.’

    그랬다면 생도가 아니라 아덴카의 무인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빈첸은 그 날 새벽 내내 베르사의 마음을 읽어보았고,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헬라임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가장 큰 형벌을 내리고 싶으신 것 같구나.’

    헬라임은 이번 수용소 사건에서 면피했다.

    제1 후계자인 데미아르가 사망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베르사 정도 되는 인물이 깊이 파고든다면 헬라임의 잘못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헬라임의 가주는 지극히 권위적인 통치자라 했었지.’

    그래서 헬라임가는 비폭력의 시민 혁명대를 잔혹하게 진압했고 여론을 통제했다.

    베르사는 그런 헬라임을 힘으로 무릎 꿇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헬라임이 아래에서부터 무너지기를 바라시는 거야.’

    외압에 의한 굴복.

    그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만약 시민 혁명대의 시민이 성공한다면?

    힘으로 지배해 왔던 시민들이 전부 들고일어나 헬라임의 통치를 거부한다면?

    ‘헬라임 가주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철저히 무너지겠지.’

    헬라임 가주가 무너지면, 가족을 사랑하는 어머니도 괴로울 것이고.

    그게 어머니의 뜻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떴다.

    셀비라.

    레이븐.

    하몬.

    시젠.

    네 명의 9급 생도가 빈첸을 향해 일렬로 섰다.

    대표생도였던 빈첸이 8급으로 승급함에 따라, 전 대표생도였던 셀비라가 임시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녀가 대표로서 오른손을 가슴에 대어 경례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셀비라가 활짝 웃었다.

    “승급 진심으로 축하하고, 이번 임무도 성공적으로 끝내길 빌게. 얼른 붉은 요새에서 보자.”

    하몬과 시젠은 곧바로 다음 임무를 위해 떠나는 빈첸을 바라보며 크게 자극받았고, 그건 레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4명의 9급 생도는 각자의 모습으로 빈첸의 뒷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붉은 요새로 복귀했다.

    세리가 빈첸 옆에 섰다.

    “공자님을 지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세리는 마법사임과 동시에 정령술사였다.

    정령술은 대륙에서도 무척 희귀한 능력이어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고마워, 세리.”

    “별말씀을요. 저는 제가 공자님 끼니를 직접 챙기지 않으면 걱정돼서 체할 것 같거든요.”

    “…….”

    그 뒤를 윌슨이 따라 걸었다.

    “누나, 나도 밥 좀 잘 챙겨주면 안 될까?”

    “우리는 밥을 챙기는 사람이지, 챙김받는 사람이 아니야, 윌슨. 정체성을 똑바로 해.”

    세리의 단호한 태도에 윌슨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누나는 공자님한테만 상냥하더라.”

    그는 약 3초간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후후후! 소식지에는 내 이름도 실렸지.’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빈첸을 보조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간략하게 이름만 소개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윌슨에게 무척 큰 명예였고 영광이었다.

    그는 짐 보따리에 이번 사건을 다룬 소식지들을 모조리 스크랩한 스크랩북을 따로 챙겼을 정도였다.

    ‘다음에는 더 크게 이름이 실리면 좋겠다, 히히!’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걸음이 많이 느려졌다.

    “고, 공자님! 같이 가요!”

    * * *

    둘란의 행보는 대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신전 내부에서는 의견이 많이 갈렸다.

    오히려 둘란의 행보를 싫어하는 자들이 훨씬 많을 정도였다.

    “그쯤하고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아니겠느냐?”

    “그래. 그쯤 하거라. 우리는 3급 신관이라는 귀중한 자원도 잃었다. 그가 죽었으니 다 된 거 아니겠느냐?”

    “뿐만 아니라…….”

    비올가는 가이아에 막대한 헌금을 보내왔었다.

    그 비올가가 사라졌으니 가이아 입장에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손해가 막심하니 그쯤 하거라.”

    둘란 개인을 헐뜯는 자들도 많았다.

    “그자는 신전의 배신자지.”

    “아무리 개인의 명성이 좋다기로서니, 어찌 신전의 얼굴에 이리 똥칠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개인의 명예에 미친 자가 틀림없소. 그런 자가 대신관이 된다면 가이아에게 큰 화가 될 것이 분명하오.”

    둘란은 그러한 음해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장 급선무는 내 성기사단을 꾸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은퇴한 명예신관들이 둘란의 편이기는 했으나, 그들에게는 실권이 별로 없었다.

    둘란의 성기사를 자처하는 자들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중의 인기나 명예욕 때문에 지원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성기사가 되기 위해 둘란을 찾아왔다.

    “다, 다, 당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빈첸 공자의 친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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