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89화
1급 대표 생도이자 아덴카의 3공녀.
헤나 아덴카가 자신의 키보다 더욱 커다란 대검을 꺼내든 채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헤나를 빈첸이 막아섰다.
“왜 막는 것이냐?”
마차 안에서는 그으으윽- 하는 괴이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 강제로 악령 계약을 맺게 된 스우벤의 신음 소리였다.
“저자는 스스로 악령 계약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선량한 피해자입니다.”
빈첸이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여 저자는 불우한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나약함은 죄다.”
헤나 아덴카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너 또한 흑마법진과 관문을 지나치지 않았느냐?”
너는 멀쩡했고.
저자는 오염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자의 잘못이다.
그게 헤나의 논리였다.
“저는 뇌력을 지닌 무인입니다. 무인이 아닌 자에게 무인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나 그게 세상이다, 빈첸.”
헤나 아덴카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악령 계약자에게는 파괴적인 본능밖에 남지 않아. 결국 죽여야 한다.”
“제 형도 살지 않았습니까?”
말론은 아덴카 본가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어쨌든 목숨은 구했다.
“그건 악령의 잔재가 남지 않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악령의 잔재가 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누님.”
“방법은?”
“이곳에는 성왕의 힘을 계승한 가이아의 2급 신관이 계십니다.”
빈첸은 랜서튼을 베면서 성왕이 가졌던 힘의 격이 얼마나 지고했던 것인지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둘란은 그러한 성왕의 힘을 계승했고 성배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다.
빈첸이 둘란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간곡히 부탁했다.
“기적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나는 일단 물러섰다.
그러나 헤나는 빈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각명식 때부터 나는 너를 줄곧 눈여겨보았다.’
헤나가 보기에 빈첸은 범상치 않은 동생이었다.
예전에는 분명 못난이였는데, 어느 순간 완전히 달라졌다.
헤나는 빈첸의 변화가 기꺼웠다.
먼 훗날, 대등한 경쟁자가 되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의 너는 아쉽구나.’
빠르고 쉬운 길이 있다.
악령 계약자를 베는 길이 가장 편한 길이다.
빈첸은 그 편한 길을 외면한 채 악령 계약자를 굳이 구하려 들었다.
어렵고 불편하고 느린 길을 가는 셈이었다.
빈첸은 헤르카의 도움을 얻었다.
“내 비편술은 원래 사람을 죽이는 기술인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혹시 모를 안전장치였다.
스우벤이 묵철 쇠사슬을 끊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헤나는 빈첸에게 다시 실망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방식은 아덴카의 방식이 아니다, 빈첸.’
아덴카는 오롯이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헤나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왔다.
스우벤은 반쯤 이성을 잃고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2급 신관의 힘이 있어도, 흑마법에 넘어갈 정도로 약한 자가 어찌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이냐?’
헤나가 보기에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공자님!”
세리가 뛰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메일튬 미드웨이 12번가 3번 블록에 위치한 초록지붕 집입니다. 거기 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먹을 것이라도 제발…….
빈첸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저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세리가 찾아내어 보살피던 중이었다.
빈첸이 쓰러진 스우벤 앞에 서서 말했다.
“딸은 무사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겨내세요.”
“그으으윽……!”
스우벤은 여전히 이성을 되찾지 못했다.
둘란이 다가왔다.
“악령을 강제로 떼어내는 작업은 매우 고된 작업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여서 시도조차 잘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덴카의 피를 이어받은 3성 무인 말론도 거의 폐인이 되었다.
“이 남자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높은 확률로 죽거나 불구가 될 것이다.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짓밟히면서도 딸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때의 그는 무인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랬던 그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딸이 눈앞에 있으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둘란의 손바닥에 신성력이 깃들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둘란은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소모하여야 했고, 체력과 심력을 모두 소진했다.
악령 계약자와 계약한 악령을 떼어내는 작업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으니까.
“헉…… 헉……!”
둘란은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시꺼멓게 물들었던 스우벤의 눈이 인간의 눈으로 돌아왔다.
스우벤은 폐인이 되지도 않았고 불구가 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정상이었다.
둘란은 드러누운 채 허허- 웃었다.
“정말 다행이군요.”
그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딸과 다시 만난 스우벤은 빈첸과 세리에게 감사를 표하며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헤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헤나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베르사였다.
“무엇을 느끼고 있느냐?”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허비되었습니다. 비합리적입니다.”
베르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나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래도 눈에 담아 두거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젠가 깨닫게 될 거야.”
헤나는 어려서부터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헤나 아덴카를 인형이라 불렀다.
아까 빈첸에게 건넸던 사과 또한, ‘응당 해야 할 것’이기에 했을 뿐, 감정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빈첸이 스우벤을 일으켜주던 그때, 베르사가 말해주었다.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베르사는 몸을 돌렸다.
* * *
빈첸이 수집한 증거는 완벽했다.
바람소리의 마리아를 통해 햇볕 부랑자 수용소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까발려졌다.
유력 명가들은 햇볕 부랑자 수용소를 일제히 규탄하며 선을 확실히 그었다.
비난의 대상이 된 세력은 크게 세 곳이었다.
가이아 신전.
비올 가문.
헬라임 가문.
가이아 신전은 엄정하게 수사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겠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2급 신관 둘란이 사건을 진두지휘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영향력과 대중에 대한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둘란이 말했다.
“빈첸 공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도록 하지요.”
“부탁드립니다.”
둘란은 잠시 숨을 들이마신 뒤, 솔직한 말을 꺼냈다.
“가이아는 꼬리를 자를 겁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해질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을 했습니다. 시작의 물꼬를 터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빈첸이 품 안에서 명패를 꺼내 들었다.
“저도 이걸 받은 밥값은 해야죠.”
“……밥값이요?”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빈첸도 둘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친구잖아요.”
둘란은 활짝 웃었다.
“빈첸 공자 같은 친구를 얻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저도요.”
한편,
바람소리의 마리아 기자는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즉시 바람소리의 현장 조사관들을 투입하여 ‘창고’를 살펴보았다.
“어마어마한 폭발이 있었어야 했는데.”
흔적상으로는 그랬다.
메일튬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폭발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었다.
조사관 중 한 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검흔이 있습니다.”
바닥에 길게 새겨진 검흔.
그 검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조사관은 이 검흔을 이전에도 본 적 있었다.
“1급 거인종 키블리오를 기억하세요?”
“으, 그런 대마물 얘기는 하지도 마요. 소름 돋으니까.”
“7년 전. 키블리오가 소멸된 곳에서 이러한 흔적을 보았습니다. 그때 키블리오를 토벌했던 자가 바로 아덴카의 가주였습니다.”
“그럼 이 검흔이 아덴카 가주의 검흔이란 말이에요?”
“밤이 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덴카 가주가 남긴 검흔은 어둠을 만나면 백광(白光)을 내니까요.”
그것은 명장 한센의 역작, 명검 ‘백경’이 가지는 특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백색광휘라고 표현하였다.
밤이 되고 어둠이 내리깔렸다.
검흔에서 희미한 흰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덴카 가주의 흔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분께서 대폭발을 막았습니다.”
“세상에나.”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올가가…… 멸문했습니다.”
“가주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가주뿐만 아니라 그곳을 지키던 무인 대부분이 죽었다.
검을 내려놓고 항복한 자들만이 살아남았다.
“항복한 무인들과 무예를 익히지 않은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생존자들의 얘기에 따르면…… 적은 단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적’은 오른손에 백광을 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단 한 명의 무력에 의하여 비올가가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졌다.
“생존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현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기억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저 무인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고 하더군요.”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요?”
“몇 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하얀 검광뿐이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올가 쪽으로 파견되었던 조사관들이 자료를 건넸다.
“비올가 가주의 시신 위에 자료들이 올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러 저희에게 전해준 것 같아요.”
칸이 그들의 비밀서고를 부숴서 획득한 자료들이었다.
자료는 상당히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비올가의 가주는 수십 년간 이곳을 지배하면서 최후의 안배로 메일튬 전체를 폭발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폭발을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폭발이 어떻게 가능하죠?”
“흑마법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흑마법에 의하여 악령 계약한 자들이 폭발의 매개체였고, 그들을 도시와 수용소 여기저기에 숨겨 놓았습니다.”
“말도 안 돼.”
끔찍한 내용이었다.
“헬라임에서 꼬리를 자를 것을 대비하여 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비올가의 단독 준비라는 건데, 비올가의 능력으로 그게 가능했단 말인가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악몽을 꾼다’라는 짧은 문구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악몽’이라는 키워드가 양지에 드러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덴카의 가주께서 본연의 무력으로 폭발을 막아내신 뒤 모든 일의 원흉인 비올가를 전멸시켰다…… 정도인가요? 그것도 혼자서요?”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들 투성이군요.”
마리아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엄청난 일들이…… 무언가 거대한 것의 시작 같다는 기분이 드네요.”
그날 밤.
베르사는 빈첸과 9급 생도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았다.
“빈첸. 마무리를 헤나에게 맡긴 것이 원망스럽지 않느냐?”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빈첸은 베르사를 의자 쪽으로 안내했다.
시젠과 하몬은 바짝 긴장해서 차렷자세를 취했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그 누구도 철혈의 무인 베르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베르사는 무덤덤한 표정이었으나 감정을 속이지는 않았다.
“버틸 만한 괴로움이구나.”
베르사는 의자에 앉아 말을 이었다.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은 헤르카 요새장이 동의한 일이며, 동시에 나의 간곡한 부탁이기도 하다.”
베르사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하여도 좋다.”
빈첸은 베르사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