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88화
칸의 등장은 모든 것의 종결을 예고하는 듯했다.
기세등등했던 데미아르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를 따르는 헬라임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빈첸은 이 공간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의 아버지인가.’
지금의 빈첸은 칸이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빈첸 스스로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강한 무인이라는 것이었다.
칸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말이 하나 있었다.
[발키아 사미온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검술가.]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칸 아덴카는 사미온의 가주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검술가였고.
발키아 사미온은 아덴카의 가주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검술가였다.
그저 한 사람이 나타났을 뿐인데 모든 상황이 변했다.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함.
빈첸의 이상향, 그 자체였다.
심장이 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토록 강함에도 불구하고, 아덴카는 사미온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아버지보다는 강해져야 사미온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 아득한 목표가 빈첸에게는 큰 설렘으로 다가왔다.
-형님, 변태죠? 왜 설레해요?
그때.
칸이 입을 열었다.
“베르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대단히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아덴카의 절대자가 베르사에게 질문 형태의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베르사가 아덴카의 또 다른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저는…….”
베르사는 무릎을 꿇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독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동생은 이 자리에 없었다.
‘마음이 쓰리구나.’
누나로서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못나게 굴어도 동생은 동생이었으니까.
그러나 베르사의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헬라임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데미아르 헬라임은 이 모든 사태의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빈첸을 이곳으로 보낼 때부터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빈첸 아덴카는 9급 생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빈첸 아덴카임을 공표하였습니다.”
이제는 붉은 요새와 헬라임의 일이 아니라 아덴카와 헬라임의 일이다.
베르사가 손을 내밀었다.
“네 기록을 내게 다오.”
“제 기록은 요새장 헤르카 경에게 있습니다.”
베르사가 헤르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요.”
헤르카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안 그래도 이 귀찮은 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베르사가 알아서 가져가 주다니.
베르사는 영상 기록석을 받아들었다.
이 안에 모든 증거가 담겨 있었다.
베르사가 칸을 바라보았다.
“제가 응원했었던 것을 이루어볼까 합니다.”
무엇보다 느리지만 누구보다 멀리 갈 수 있는 신념.
빈첸이 보여주었던 그것.
베르사는 그것을 이루어보기로 했다.
* * *
데미아르는 무조건 잘못했다 빌었다.
그가 잘못을 구하는 대상은 단 한 명이었다.
“누님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 경거망동하고 말았습니다.”
햇볕 수용소를 실질적으로 관리했던 것.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당해 희생당했던 것.
힘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었다.
다만, 베르사를 기습하려 했던 것에 대해서만 용서를 빌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너와 나의 가문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는 스스로의 심상을 모두 파괴하고, 손과 발의 힘줄을 잘라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누님!”
데미아르는 제발 그런 말은 말아 달라며 울부짖었으나 베르사는 단호했다.
“그것만이 네가 속죄하는 길이 될 것이다.”
“누님! 아버지께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더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베르사는 몸을 돌려 칸의 옆에 섰다.
베르사가 말했다.
“헤르카 요새장. 빈첸의 승급은 어떻게 되었죠?”
“임무는 파견 신관들의 지원이긴 한데…….”
그즈음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곳에는 2급 신관 둘란이 타고 있었다.
“빈첸 공자와 9급 생도 일행은 저를 무척이나 크게 도와주었고, 그에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헤르카는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둘란 신관님은 이 자리에 없으셨잖아요. 빈첸이 말도 안 되게 활약한 건 인정하지만…… 그거랑 승급은 또 다른 문제거든요. 베르사 언니가 말했다시피 빈첸은 아덴카 후계자로서 활약한 거지, 9급 생도로서 활약한 건 아니라서요.”
둘란이 빙그레 웃었다.
“이곳에 함께하셨던 여러 가이아 신관님들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실 겁니다. 그렇죠?”
둘란의 시선이 포박당한 신관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직감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오늘을 기점으로 하여 가이아는 대중의 지탄을 받을 것이고,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무조건 협력해야 해.’
그것이 조금이나마 유리해질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9급 생도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무척이나 감사한 일입니다.”
둘란이 헤르카를 바라보며 다시금 빙그레 웃었다.
“요새장님께서도 확실히 들으셨겠지요?”
“네. 들었습니다.”
헤르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휴. 융통성 없는 바르곤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겠어.”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그래서 거기 신관님들, 우리 생도들을 평가한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 줄까요?”
신관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감히 점수를 매길 수가 없습니다.”
“12점으로도 부족합니다.”
헤르카는 흐음, 흐음,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빈첸은 승급이다.”
헤르카는 품속에서 8급 생도를 상징하는 탑 모양의 배지를 꺼내 들었다.
미리 준비해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셀비라를 비롯한 9급 생도들은 함박웃음을 감추며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빈첸의 승급에 예의를 표했다.
“그, 뭐더라. 승급할 때 말해주는 뭐가 있긴 한데. 그건 패스하자.”
헤르카는 빈첸의 옷 앞섶에 배지를 달아주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데미아르는 고개를 조아린 채 이를 갈았다.
‘젠장!’
9급 생도가 이곳에 파견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계략에 빠진 거야.’
억울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건 함정수사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누님께서 오셔서 공식적으로 모든 것을 감사하셨으면 되지 않습니까!’
상대가 9급 생도여서 지나치게 방심했다.
만약 베르사가 직접 감사를 위해 방문했다면 비올과 헬라임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감추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 때문이다.’
방금 배지를 수여받은 저 어린아이.
저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누님은 영원히, 가문의 배신자로 낙인찍힐 겁니다!’
아니,
‘낙인찍을 거다, 이 배신자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이가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나는 네가 철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정말로 철혈의 여인이었다면.
자신의 목은 이미 베어져 있을 것이다.
‘네가 아끼는 것을 앗아가 주마, 베르사.’
자신은 이미 끝났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복수뿐이었다.
복수의 대상은 빈첸이었다.
‘저놈을 죽이고, 나도 명예롭게 죽겠다.’
몰래 마나를 운용했다.
이미 놈은 방심하고 있었고 칸과 베르사는 멀리 있었다.
헤르카는 배지를 수여하느라 양손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지금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지금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빈첸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했다.
“나는 네가 그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데미아르의 세상이 기울어졌다.
‘어……?’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베르사의 검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기괴한 장면뿐이었다.
‘이상하다. 거리가 충분히 있었…….’
그는 더 이상 사고하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베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털어낸 뒤 갈무리했다.
그러고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정리는 흑색검대에서 맡을 것이다.”
헤르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침 주변에 1급 생도들이 파견 나와 있는데, 지원할까요?”
“좋은 제안이군.”
빈첸은 1급 생도가 주변에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우연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뭐, 9급 생도만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크기도 하고요. 어머니나 헤르카 요새장님이 1급 생도를 미리 배치한 것 같네요.
1급 대표 생도는 아덴카의 3공녀인 헤나 아덴카였다.
사건의 발단은 빈첸이.
마무리는 헤나가 하게 되었다.
‘헤나 누님에게 공적을 몰아주기 위함인가?’
-어머니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요. 헤르카 요새장님도 그런 정치 관계에는 관심 없고요.
저만치 멀리, 1급 생도를 대변하는 검은색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헤나 아덴카를 필두로 도합 5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헤나는 칸과 베르사. 그리고 헤르카에게 인사를 올린 뒤 빈첸을 바라보았다.
“승급하였구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누님.”
헤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말했다.
“깃발을 높이 들라.”
1급 생도들의 기수가 흑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깃발이 펄럭였다.
헤나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1급 생도 5명도 마찬가지로, 빈첸에게 예를 표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빈첸이 이룬 것에 대한 경례였고, 그녀 나름의 사과표현이기도 했다.
경례를 끝낸 헤나가 말했다.
“본의 아니게 네 공을 일부 가로채게 되겠구나.”
“괜찮습니다. 제 임무는 신관들을 지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헤나의 은안(銀眼)이 빈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네 시작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마.”
“감사합니다.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거기까지 말한 빈첸은 베르사를 향해 걸었다.
“어머니.”
베르사 옆에 서 있던 칸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베르사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느냐?”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범용 마정석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아까 ‘창고’에서 빈첸이 스스로 만들었던 범용 마정석이었다.
“무엇이냐?”
“세리가 말해주길, 범용 마정석은 부적으로도 쓰인다 했습니다.”
세리는 그 마정석을 부적석이라 불렀다.
마나를 불어넣은 자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베르사는 잠자코 마정석을 받아들었다.
마정석에서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하구나. 고맙다.”
빈첸은 베르사의 마음을 모두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녀가 제 동생을 베었다는 것이었다.
-뭘 한 거예요?
‘내가 어머니였다면, 데미아르가 살기를 드러낸 순간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베르사는 데미아르에게 온정을 베풀고 싶어 했다.
혈육 앞에서 베르사는 철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설마, 뭐 어머니를 위로했다거나?
‘…….’
-헐? 진짜로 위로의 마음을 담았어요? 어머니한테? 형님 미쳤어요? 상대는 거인 베르사라고요! 철혈의 무인 베르사! 어휴, 이건 너무 분수에 안 맞는 행동이…….
율리안은 발견할 수 있었다.
베르사는 빈첸이 전해준 마정석을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베르사는 중요한 물건이 아니면 오른손으로 쥐지 않는다.
검을 사용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형님은 개천재야.
그때.
빈첸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누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헤나 아덴카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