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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87화 (87/184)
  • 환생의 정석 87화

    길게 베어내기.

    빈첸의 검이 악령의 얼굴에 닿았다.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졌다.

    검술만으로 악령을 압도할 수는 없으나, 빈첸의 몸에 담긴 성왕의 힘은 악령의 기운을 압도했다.

    서걱-

    악령의 몸이 세로로 갈라졌다.

    “말도 안 돼!”

    에드몬드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인 듯했다.

    “20년을 준비해 온 내 계책이……!”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고 다음에는 분노했다.

    “네 이놈!!!”

    에드몬드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보랏빛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땅속에서 언데드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방금 베어낸 악령이 아니라면 헤르카와 세르쿤을 위협할 수 있는 마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드몬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으킨 언데드들은 그저 시간벌기용에 불과했다.

    헤르카가 물었다.

    “바르곤 2세야. 쟤가 뭘 하려는 걸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패를 꺼내 드는 거겠죠.”

    “그니까, 그게 뭔데?”

    “제가 에드몬드라면 이곳 전체를 붕괴시켜버릴 겁니다.”

    “너 혹시 붕괴범이야? 성왕의 무덤도 무너뜨리더니.”

    눈이 시뻘게진 에드몬드가 저주의 일갈을 내뱉었다.

    “너희 모두는 이곳에 파묻혀 뼈도 찾지 못할 것이다. 나의 권속이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이승의 망자로 평생을 썩어……!”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진짜 육신이 아니었기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육체는 재생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빈첸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두려움?’

    세르쿤과 헤르카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리치가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처음에는 놀라움, 두 번째는 분노, 세 번째는 두려움.

    감정이 상당히 널뛰었다.

    그를 둘러싼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리치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인데.’

    그렇다면 에드몬드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곳의 누구도 에드몬드의 핵을 찾지 못했다.

    신성력을 갖춘 신성기사도 없다.

    ‘그렇다면 왜?’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모없는 놈.”

    은발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나무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오른손에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고, 왼손에는 빛나는 보라색 돌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빈첸은 그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리치의 핵이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왼손에 힘을 꽉 주었다.

    꽈드득- 소리가 나며 핵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직 육체를 형성하지 못한 리치가 절규했다.

    “아, 안 돼!!!”

    그는 무척이나 괴로운 듯했다.

    “으아아아악!”

    “쓸모없는 건 죽어야지.”

    이내,

    리치의 핵이 박살 났다.

    20년 동안 오늘을 기다려왔던 리치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헤르카는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바르곤 2세야. 이건 무슨 상황일까? 네 생각을 말해봐.”

    “아마도 에드몬드조차도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패인 것 같아요.”

    헤르카가 씨익 웃었다.

    “이용당해? 직위가 상당히 높아 보이던데?”

    “거짓이겠죠.”

    “1급 책사라는 것도?”

    “예.”

    헤르카는 빈첸의 대답에 만족했다.

    ‘징그럽게 냉철하단 말이야.’

    물론 에드몬드의 함정이 위험하기는 했다.

    그러나 여지껏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 단체인 ‘악몽’의 ‘1급 책사’ 정도 되는 거창한 직책을 가진 자가 20년을 대비해 온 함정치고는 허술한 것도 사실이었다.

    “왜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아는 책사는 차선에 차차선에 차차차선까지 대비하고, 그도 모자라 수많은 상황의 대비책까지 준비합니다. 책사들은 아주 피곤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거든요.”

    헤르카는 빈첸의 대답에 무척이나 만족했지만, 율리안은 만족하지 못했다.

    율리안이 약간의 불만을 토로했다.

    -그거 설마 내 얘기?

    ‘딱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누군데요? 왜 말이 없지? 영감님, 말을 해봐요!

    율리안이 항의했지만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르카와의 대화가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책사였다면 악몽에 대해 발설하는 경솔함을 보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단체의 비밀까지 떠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무 위의 남자가 씨익 웃었다.

    “상황 판단이 빠르구나.”

    빈첸은 어딘지 모르게 남자의 기운이 익숙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세르쿤과도 구면인 듯했다.

    “세르쿤 집사는 오랜만이군.”

    “데미아르 경. 당신이 왜 이곳에 있습니까?”

    * * *

    데미아르.

    그는 헬라임가(家)의 제1 후계자였다.

    헬라임가의 독보적인 천재였던 누나의 자질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 역시 충분히 천재의 반열에 든 무인이었고, 지금은 헬라임의 제1 후계자로서 헬라임의 비전들을 섭렵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조카야.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그리고 헬라임은 베르사의 가문이기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미아르 경.”

    “편하게 삼촌이라 불러도 돼.”

    “조카와 삼촌의 만남치고는 끌고 온 병력이 만만치 않은데요.”

    빈첸의 기감에 수많은 무인들의 기운이 잡혔다.

    햇볕 부랑자 수용소에 생긴 이변을 알아차리고 헬라임 가문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진격한 듯했다.

    “햇볕 수용소는 역시 헬라임의 것이었습니까?”

    대외적으로는 이곳은 비올가(家)의 영역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고 있었니?”

    “어머니께서 임무를 내리셨거든요.”

    베르사가 어째서 신관들을 지원하는 것을 임무로 내렸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어머니 역시 햇볕 수용소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게 가닥을 잡고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건 셀비라가 짚어주었던 사실이었다.

    -근처에 헬라임 가문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마찰이 별로 없었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헬라임가는 유력한 명가고, 주변의 가문들과 영역들을 흡수해서 세를 엄청나게 키운 가문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비올가가 딱히 조공을 바치거나 한 기록도 없고.

    헬라임가는 근처의 비올가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우호적인 조약을 맺은 적도 없었다.

    헬라임은 지난 수십 년간 비올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머니께서는 직접 움직이기 어려웠어.’

    수많은 가문과 이권이 얽혀 있다 보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임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헬라임은 베르사의 가문이다.

    헬라임이 명명백백한 죄를 지었다면 베르사가 직접 움직일 수 있다.

    빈첸은 베르사의 말들을 떠올렸다.

    -네 신념은 무척이나 느린 신념이다.

    -그러나 또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신념이다.

    -네 옳음을 응원하마.

    빈첸이 말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어른들의 잘못을 제가 짚어내길 바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우.”

    데미아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카야. 햇볕 수용소가 헬라임의 것인 줄 알았다면,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지 않는 것이 순리 아니겠느냐?”

    “무엇이 순리인지 저는 모르겠군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다.”

    “어려서 모르겠습니다. 저들을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여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저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이곳에 끌려와 희생당해야 했다.

    “두 살 된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

    “이것이 어른들의 순리입니까?”

    데미아르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빈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을 이었다.

    “너와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는 않구나.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도 네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이곳의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빈첸은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이곳에 9급 생도 빈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베르사가 승급시험이라는 명분을 통해 쥐어준 역할은 끝났다.

    “이제 제 이름은 이제 빈첸 아덴카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베르사 헬라임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빈첸은 확신했다.

    이곳에는 비올가와 헬라임의 무인들만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

    아까 악령이 부수고 나온 벽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데미아르의 눈이 커졌다.

    “누님?”

    헤르카가 히히 웃었다.

    “와, 나 이제 좀 편해졌다.”

    데미아르의 등장으로 조금 긴장했던 헤르카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세르쿤도 훨씬 더 여유를 되찾았다.

    베르사 헬라임.

    그녀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베르사가 걸어와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데미아르 경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확신했습니다.”

    헬라임이 의심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심증이었다.

    그런데 데미아르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빈첸은 베르사가 이곳에 와 있음을 확신했다.

    여태까지 여유로웠던 데미아르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누님, 지금 대단히 잘못하고 계신 겁니다. 아버지께서도 탐탁지 않아 하실 겁니다.”

    “…….”

    베르사가 잠시 침묵하자 데미아르의 기세가 살아났다.

    “어차피 누님도 대충은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세상은 마정석을 필요로 합니다. 마정석이 그냥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누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똥물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저는 질책이 아니라 치하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베르사는 조금 더 침묵하다가 한 가지를 물었다.

    “흑마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느냐?”

    “몰랐습니다. 에드몬드 건은 비올가의 단독 일탈입니다.”

    “그래?”

    “정말입니다.”

    베르사는 빈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보기에도 그러하냐?”

    “아닙니다. 저자는 리치의 핵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증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에드몬드를 죽일 때 분명 쓸모없는 놈이라 말하였습니다. 원래는 쓸모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카야! 어림짐작으로 넘겨짚지 말아라.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누님. 저는 결백합니다. 세상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 명예를 희생하여 마정석을 제련했을 뿐입니다. 누님은 제 순수한 마음을 아시겠지요?”

    그가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베르사를 향해 걸어왔다.

    “누님. 저는 누님을 참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좋아합니다.”

    어느새 주변은 비올가와 헬라임가의 무인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누님은 늘 강인하셨고, 저보다 몇 발자국은 앞서계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누님을 늘 동경했어요.”

    데미아르가 베르사 앞에 섰다.

    남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님은 늘 고고하셨고 저와는 달랐습니다. 늘 그러하셨듯. 누님은 여기도 혼자 오셨겠지요.”

    데미아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러한 행동과 말을 보이면, 누이인 베르사의 마음이 조금은 약해진다는 것을.

    그건 사실이었다.

    누나인 베르사는 자신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동생을 위하여 가문을 떠났었다.

    “데미아르. 너는…….”

    그때.

    데미아르의 눈빛이 돌변했다.

    “나는 그 더러운 동정이 역겹단 말이다!”

    그가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다.

    베르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으아아악!”

    데미아르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빈첸도 눈을 의심했다.

    ‘아예 안 보였어.’

    미세한 바람조차 일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말로 움직이지 않으셨다.’

    베르사의 솜씨가 아니었다.

    세르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별 이름 없는 동산’에 짙게 갈려 있던 자색 안개가 순식간에 증발되어 사라졌다.

    동산 전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 침묵은 마치 태풍의 핵과도 같았다.

    휘몰아치는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정적.

    적막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건만 데미아르의 호흡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헉…… 헉……!”

    데미아르의 온몸이 땀에 젖어들었다.

    그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벌벌 떨며 말했다.

    “고, 고,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형님.”

    아덴카의 가주.

    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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