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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86화 (86/184)
  • 환생의 정석 86화

    빈첸은 귀를 의심했다.

    ‘악몽? 율리안, 악몽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전혀 모르겠어요.

    ‘비밀단체인가.’

    -비밀단체가 저렇게 친절히 제 이름과 소속을 밝힌다는 건…….

    ‘그래. 몰살하려는 거야.’

    빈첸은 홍련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비록 지금은 은신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이쪽에는 강력한 지원군이 둘이나 있었다.

    요새장 헤르카와 전직 살왕 세르쿤.

    ‘헤르카 요새장님은 몰라도 세르쿤 집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몬드는 자신이 있는 듯했다.

    빈첸이 말했다.

    “악몽이 뭐지?”

    “그냥.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아름다운 단체라고 기억하도록 해.”

    더 이상은 가르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드몬드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으에엑? 저게 뭐야! 바닥에서 손이 기어 나오고 있어요!

    ‘언데드다.’

    이 동산에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는 건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수백 구의 시체가 일어섰다.

    헤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가 좀 도와줘?”

    어느새 그녀는 빈첸 옆에 서 있었다.

    “임무 보고는 완료했으니까, 이제는 관여해도 바르곤 경한테 안 혼나겠지?”

    헤르카의 오른손에는 그녀의 독문무기 채찍이 들려 있었다.

    “요새장님.”

    “누나라고 해. 요새장은 딱딱해서 별로야.”

    그녀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채찍은 자유자재로 길이를 늘려가며 주변 공간을 먹어치웠다.

    수천 갈래로 갈라진 채찍이 뻗어 나가면서 언데드들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순식간에 100여 구에 가까이 언데드들이 박살 났다.

    7개의 심상이 한 번에 마나를 뿜어냈다.

    퀘벨 비편술 제13식.

    금나편살(擒拿鞭殺).

    헤르카의 채찍이 에드몬드의 몸을 감쌌다.

    에드몬드는 거미줄에 사로잡힌 사냥감처럼 꽁꽁 묶였다.

    헤르카의 붉은 눈동자에는 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때, 율리안이 가르쳐주었다.

    -형님, 저거 리치예요!

    어떤 흑마법사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리치가 된다.

    리치들은 죽음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핵’을 안전한 곳에 숨겨둔다.

    일전, 틸로반 장로보다 훨씬 더 상승경지에 있는 흑마법사여서 핵과 육체와의 연결고리도 보이지 않았다.

    -저놈의 육체를 부숴주면 잘게 비산해서 오히려 꾀를 부리기 좋아질 거예요. 저놈이 바라는 바라고요!

    율리안은 성왕의 신기를 흡수한 상태였고 흑마법의 기운이나 악령의 기운에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덕분에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빈첸이 빠르게 말했다.

    “요새장님. 리치입니다.”

    “뭐?”

    ‘리치’라는 말에 헤르카는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귀찮은 놈이 나타났네.”

    리치를 죽이기 위해서는 이 핵을 부숴야 한다.

    혹은 마나 대신 신성력을 이능으로 사용하는 성기사들이 존재하거나.

    “여기 성기사단은 없지?”

    “없는 것 같아요.”

    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주변에 성기사단도 없다.

    에드몬드는 흐흐- 웃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생도들은 나타난 언데드들의 목을 베어 넘기고 있었고, 신관들은 모두 포박된 상태.

    “뭐, 칭찬은 해주지. 별 의미 없긴 하지만 말이야.”

    쾅!

    소리와 함께 ‘창고’의 벽면이 뚫렸다.

    목이 없는 시체 하나가 손에 자신의 목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언데드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강대한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에드몬드가 노리는 게 이거였나.’

    에드몬드는 헤르카에게 잘게 잘게 부서진 뒤, 빈첸과 헤르카가 당황한 틈을 타 몸을 숨기려 했었다.

    빈첸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가 만든 ‘악령 강림체’를 믿었다.

    빈첸이 말했다.

    “죽은 랜서튼을 언데드화하여 복종하게 한 뒤, 그것을 제물 삼아 악령 계약까지 시킨 건가?”

    안 그래도 7성 무인이었던 랜서튼을 흑마법으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또다시 제물 삼아 악령을 강림시켰다.

    에드몬드가 아까부터 오늘을 기다려왔다느니 선물이라느니 내뱉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 무인을 죽여서 강력한 언데드를 만들고 싶은 겁니다, 세르쿤 집사님이나 요새장님을 재료로 삼고 싶은 거예요. 그걸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려온 함정인 듯합니다.”

    이곳은 대외적으로 ‘마정석을 제련하기 위한 공장’이었다.

    ‘어른’들은 마정석이 필요했고, 햇볕 부랑자 수용소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묵인 속에, ‘악몽’이라는 또 다른 단체가 숨어들었다.

    모두의 암묵적인 무관심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셈이었다.

    ‘알약의 부작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고, 수정구를 통해 많은 이들의 생명력을 빼돌렸어.’

    흑마법은 타인의 생명을 제물로 하여 막강한 힘을 내는 반인륜적인 마법이다.

    감시를 받지만 감시를 받지 않는 이곳.

    이곳이야말로 흑마법사의 관점으로 보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 짓을 수십 년 동안 해왔으니…… 어마어마한 양의 사기가 축적된 거고.’

    세르쿤 같은 강자를 단숨에 죽여서 언데드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비밀스레 사기를 축적해 왔다.

    마침 오늘 비올가의 7성 무인이 파견되었고, 에드몬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반적인 7성 무인이라면 세르쿤을 이길 수 없겠지만, 언데드화한 7성무인을 제물로 바쳐 강림시킨 ‘악령 강림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은신해 있던 세르쿤조차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 정도면 덫이라고 부를 만하군요.”

    헤르카는 채찍을 갈무리한 뒤 생도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았다.

    그녀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저런 괴물은 오랜만인데.”

    목이 없는 괴물.

    랜서튼의 육체를 지니고 있던 그것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새어 나온 악령 그 자체 같았다.

    에드몬드가 킬킬대며 웃었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돼?”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혹여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세르쿤은 레이븐의 탈출에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헤르카 역시 생도들을 보호하며 싸워야 하는 입장이기에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헤르카는 채찍을 든 채 악령을 응시하며 말했다.

    “바르곤 2세야. 너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지?”

    빈첸은 헤르카 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헤르카의 몸이 움찔했다.

    ‘아, 나 쟤, 싫어.’

    빈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빈첸이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내 소개도 다시 하지.”

    빈첸이 악령 앞에 섰다.

    아까 에드몬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었다.

    -악몽(惡夢)의 1급 책사, 에드몬드다.

    빈첸의 눈이 악령을 향했다.

    “아덴카가(家)의 7공자, 빈첸 아덴카이다.”

    여태까지는 9급 생도 빈첸이었다.

    그러나 9급 생도 빈첸으로서의 역할은 끝났다.

    헤르카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9급 생도 빈첸이 아니라 아덴카의 7공자로서의 빈첸이었다.

    “똥폼을 잡는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빈첸은 악령을 향해 걸어갔다.

    악령은 에드몬드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에드몬드는 번뜩이는 눈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 죽이는 게 가장 황홀할까?”

    에드몬드가 여유를 부리는 가운데, 빈첸이 홍련을 휘둘렀다.

    악령이 머리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까지는 랜서튼의 얼굴이었던 그것은 악령의 방패가 되었다.

    깡!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홍련의 검날과 맞닿은 악령의 얼굴이 히죽 웃었다.

    빈첸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으, 으으, 징그러워!

    빈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악령과 힘 싸움을 시작했다.

    에드몬드는 그런 빈첸을 크게 비웃었다.

    “으하하하핫! 그게 네가 가진 전부냐?”

    힘 싸움이라니.

    에드몬드가 보기에는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줄까? 그 녀석은 아직 힘의 삼분의 일도 안 썼어.”

    그에 반해 빈첸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검붉은 악령의 기운이 홍련을 타고 넘실넘실 타고 넘어와 빈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독기였고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악기(惡氣)였다.

    헤르카는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저 영감탱이는 레이븐밖에 안중에 없고.’

    지금의 세르쿤은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헤르카도 빈첸을 돕기에는 애매했다.

    저 1급 책사라는 녀석은 자신보다는 분명 약했지만, 생도들보다는 강했다.

    ‘내가 빈첸을 도우려 신경을 분산하는 순간 모조리 제물이 될 거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헤르카는 초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편하네.’

    지금의 빈첸은 물론 사력을 다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퀘벨가의 전승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직감이기도 했다.

    악령이 빈첸을 밀어냈다.

    악령과 빈첸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다.

    이내,

    악령의 목이 주욱- 늘어났다.

    입이 기형적으로 크게 벌어졌다.

    붉은 입에서는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드몬드가 깔깔대며 웃었다.

    “으하하핫! 조금 더 스퍼트를 올려볼까?”

    빈첸이 검을 휘둘러 악령의 얼굴을 쳐냈다.

    순식간에 7번의 검격이 있었으나 악령은 딱히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아직 삼분의 일의 힘도 안 썼다니까?”

    검을 휘두르는 빈첸의 몸이 점차 뒤로 밀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그 사이, 악령이 내뿜는 악기는 빈첸의 몸을 잠식했다.

    “어때? 이제 숨 쉬기도 힘들고 막 그렇지?”

    빈첸은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악령을 막아냈다.

    그러나 위태로운 겉모습과 달리 빈첸은 크게 당황한 상태가 아니었다.

    ‘확실히…… 엄청난 완력과 내구력이다.’

    만약 역용의 힘이 없었더라면 이미 마력회로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방어만 하는데도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

    악기를 내버려 둔 상태로 몸에 받아들여 본 이유가 있었다.

    빈첸에게는 햇볕 부랑자 수용소에서의 모든 것들이 수련이었다.

    ‘네가 내게 알약을 주었었지.’

    그것은 빈첸에게 더 많은 마나를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알약의 불순물은 불태우고, 필요한 마나만 취하여 흡수하는 과정을 통하여 필요한 기운과 필요하지 않은 기운을 걸러내는 연습을 했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에드몬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본질을 이해한 상태에서의 응용은 쉬웠다.

    악령이 내뿜는 악기를 적절히 받아들여보았다.

    역용의 마나막 덕분에 안정적으로 악기를 몸에 흡수시켜볼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악령의 악기는 자신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빈첸의 몸에는 신관들에 못지않은 강대한 신기(神氣)가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깃든 힘은 성왕의 유산이다.’

    그 격과 질이 지금 악령이 내뿜는 악기보다 훨씬 뛰어났다.

    빈첸이 검을 크게 휘둘러서 거리를 벌렸다.

    “삼분의 일도 힘을 쓰지 않았다고 했나?”

    신기는 다른 말로 신성력이다.

    아직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혀, 형님. 상황은 알겠는데 너무 과소비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율리안은 약간 겁먹었다.

    ‘걱정 마라.’

    몸을 통해 느껴보았다.

    ‘성왕의 신기 한 움큼이 저놈의 모든 악기를 압도하고도 남아.’

    아주 잠깐의 소강상태.

    그러나 그 소강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빈첸은 설상 걸음을 펼쳐 악령에게 순식간에 접근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내 검을 휘둘렀다.

    기본적으로 그의 검은 아덴카의 정검.

    화려한 기교 없는 깔끔하고 정석적인 검.

    이렇다 할 특징이 없으나 모든 것이 무난한 기본적인 검에, 멀린의 연환검이 더해졌다.

    아덴카 정검 3식.

    신력 연환.

    길게 베어내기.

    빈첸은 멀린으로부터 정검에 뇌력을 융합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내가 보았던 것은 벽력종절이었다.’

    직접 보았고 몸으로 느꼈었다.

    그때의 전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덴카 정검 3식.

    길게 베어내기는 페일커 검식 벽력종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뿌리가 같기 때문이리라.

    멀린의 검을 직접 견식한 것은 빈첸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 빈첸의 검은 뇌력이 아니라 신력을 연환하여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베어낸다.’

    루산이 잡아먹힌 뒤. 두려움에 떨던 신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신관들이기에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저, 저, 저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은 뭐야?’

    사람을 치유하는 신성력이 빈첸을 통해 다르게 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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