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85화
빈첸이 말했다.
“너 같은 게 7성이라고?”
무인이라는 호칭은 붙이지 않았다.
그에게 무인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아는 7성의 무인들과 많이 다른데.”
랜서튼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빈첸이 아는 7성 무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세르쿤 집사도, 레일사 시종장도 7성으로 알려졌지.’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논하기에 랜서튼은 격이 맞지 않았다.
랜서튼은 또다시 히죽 웃었다.
“으음, 소년, 좋아 좋아, 유언이니 딱 세 마디 더하게 해줄게.”
빈첸은 홍련으로 랜서튼을 겨누었다.
“왜냐하면, 넌 진짜 7성 무인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으니까.”
순간,
랜서튼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빈첸이 세 마디를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7성 무인, 세르쿤 집사님.”
“하아.”
세르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저를 관여하게 만들었군요, 공자.”
레이븐을 지키는 것 외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세르쿤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어릿광대 랜서튼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기.
은사(銀絲)가 그의 열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마치 계획된 일처럼 느껴지는 건 제 착각입니까?”
간이 이동관문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부하를 감당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창을 거머쥔 레이븐은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무예를 익힌 이유가 무엇이냐!”
레이븐은 쉬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하여 익히는 것이 무학이다! 너희들은 무인도 아니다, 이 쓰레기들!”
무인들 몇이 레이븐의 창에 꿰뚫렸다.
“나. 바르티칸의 레이븐이 너희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9급 생도의 신분을 잊어버렸다.
지금의 레이븐은 무가(武家) 바르티칸의 아들이었다.
레이븐은 비올가의 무인들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랜서튼이 허망하게 죽고 사기가 급격히 저하된 비올가의 무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세르쿤이 말했다.
“이제 말해보십시오. 나의 개입은 공자의 계획이었습니까?”
“이곳에 비상시를 대비한 이동관문이 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르쿤 집사님의 능력이라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알아차렸을 테고요. 아니.”
빈첸은 잠시 호흡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이 어떤 곳인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수용소 말인데요.”
“…….”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빈첸의 모습은 마치,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침통해진 열네 살 순수한 생도와도 같았다.
그 모습에 세르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어요. 고급 마법인력이 없는 이곳에서 다량의 범용 마정석을 생산할 수 있을 리 없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어른들은 범용 마정석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범용 마정석은 안 쓰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인다.
일상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은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이 시설을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것 같아요.”
“…….”
“이틀 전부터, 레이븐이 세르쿤 집사님을 추궁하지 않았던가요?”
“……그랬습니다.”
빈첸이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저는 저희만의 신호를 통해 세리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죠.”
정령을 통해 세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내용은 레이븐에게도 공유되었고 레이븐은 세르쿤을 다그쳤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레이븐을 자식처럼 끔찍이 사랑하는 세르쿤은 결국 이곳이 정상적인 시설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레이븐은 눈에 불을 켜고 간이 이동관문의 위치를 찾았다.
그것은 에드몬드 소장의 서재에 숨겨져 있었는데, 마법사이자 정령사인 세리가 그 위치를 찾아냈다.
“큰 소동을 벌이고 이 시설의 핵심에 다가서면, 결국 그들은 강력한 무인을 이곳으로 파견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저 간이 이동관문이다.
“그러면 화가 난 레이븐도 곧장 이곳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창을 쥔 레이븐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겠지요.”
실제로 그는 이동관문으로 이동하자마자 랜서튼을 보았다.
레이븐은 랜서튼을 향해 달려들었고, 세르쿤은 어쩔 수 없이 개입해야만 했다.
“그대로 두었다면 레이븐이 크게 다쳤을 테니 집사님께서는 직접 개입해야만 했겠죠.”
“…….”
세르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맞춰져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르쿤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빈첸 공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예?”
“나 말고도 이곳을 지켜보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세르쿤 집사님 덕분에 확실히 알겠군요.”
빈첸이 음성에 마나를 담아 말했다.
“보고 올리겠습니다, 요새장님.”
‘창고’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후두두둑-
천장 파편들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가볍게 착지했다.
붉은 요새의 요새장 헤르카였다.
“뭐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엥? 어떻게?”
“성실하신 바르곤 경께서 중간보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셨거든요. 특별 승급시험처럼 이례적인 행사에 관심을 별로 안 두시더라고요. 그렇다는 말은 보고가 필요 없는 상황이란 뜻이었겠지요.”
“그걸로 유추했단 말이야?”
“서신을 통해 알아보니 요새장님이 드물게 정식으로 서류를 접수해서 출장을 가셨다 하더라고요?”
그러면 공식 일지에 기록이 남는다.
요새의 생도라면 누구나 일지를 열람할 수 있다.
일련의 과정은 전직 대표생도였던 셀비라가 도와주었다.
“일지에 목적지가 메일튬이라 적혀 있었고요.”
“으, 너 쫌 징그러운 거 알지? 그건 언제 확인했대?”
“제 친구인 셀비라가 유능한 덕분이죠.”
헤르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은 마치 바르곤을 바라볼 때와 비슷했다.
그녀는 후- 한숨을 쉬었다.
“왠지 바르곤 2세 같아서 싫다, 너.”
“……예?”
“나는 너무 똑똑한 애들을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병이 있거든. 너 혹시 뇌가 두 개야?”
빈첸은 빙그레 웃었다.
‘비슷하긴 합니다.’
빈첸 혼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율리안의 도움이 무척 컸다.
헤르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튼. 나는 네 승급에 직접적으로 관여 안 한 거다? 그거 확실히 해야 해. 바르곤 경이 알면 잔소리 폭탄을 퍼부을 거라고.”
“……그 잔소리를 두려워는 하십니까?”
“야. 진짜 장난 아니야. 진이 쭉쭉 빠진다니까?”
헤르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리 확실히 말해. 내가 관여 안 했다고.”
“예. 확실히 관여 안 하셨습니다. 그럼 보고 올리겠습니다, 요새장님.”
헤르카는 질색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귀찮아. 보고 받은 걸로 하자.”
“바르곤 경한테 혼날 텐데요?”
“…….”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빈첸은 베르사가 준 기록 마정석을 주었다.
“와, 이거 엄청 비싼 거잖아? 어디서 났어?”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베르사 언니가? 그 언니 그렇게 섬세한 사람 아닌데.”
헤르카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왠지 좀 불길해. 베르사 언니가 이런 걸 쥐어줄 정도면 뭔가 더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세르쿤은 빈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르쿤 집사님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사자를 잡기 위해서는 사자를 잡기 위한 덫을 놓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빈첸에게 물었다.
“빈첸 공자가 보기에 사자를 잡기 위한 덫은 놓였습니까?”
빈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쪽짜리 7성 무인이 고작이었습니다. 살왕을 대비한 안배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빈첸 공자가 생각하는 진짜 안배는 무엇입니까?”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봐야 알 것 같군요.”
빈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전히 신경 쓰여.’
‘별 이름 없는 동산’에 오를 때부터 느껴졌던 지독한 사기(死氣).
창고에 오기 전에 지나쳐야 했던 마법진과 마법관문.
‘단순히 마정석 제련을 위해서는 알약만 먹여도 충분했어.’
강제로 악령계약을 일으키는 흑마법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뭔가가 더 있다.’
* * *
헬크를 비롯한 비올가의 무인들은 생도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금 몸이 성한 무인들이 한 명도 없었고, 신관들의 힘으로 생도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루산 신관이 급히 말했다.
“가만히 좀 계십시오! 치료가 우선이니.”
뇌력에 당한 상처는 좀처럼 쉽게 회복시키기 어려웠다.
셀비라는 빈첸을 대신하여 생도들에게 부탁했다.
“수용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졌어. 그들을 좀 단속해 줘, 안전하게.”
“알겠어.”
“맡겨줘.”
이윽고 빈첸이 창고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옆에는 비올가 무인들의 피로 엉망진창이 된 레이븐이 서 있었고, 빈첸의 뒤로 수십 명에 달하는 수용자들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헬크를 치료하던 루산이 눈을 부릅떴다.
“저, 저것들이!”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았다.
루산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짓을 벌이는 겁니까!”
빈첸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들은 부랑자가 아닌 듯하군요.”
“헛소리! 당신들은 당신들의 일이나 해!”
생도들의 임무는 신관들의 지원 및 신변보호다.
루산은 이를 갈았다.
“오냐 오냐 하니까 아주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말을 가려 해라, 루산.”
빈첸은 더 이상 루산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루산에게 가까이 다가가 뺨을 한 대 때렸다.
마나를 싣지 않아 부상은 없었으나 모욕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루산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 너……!”
“내게 2급 신관의 명패가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 듯하군.”
루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닥쳐라! 가, 감히 나를 때려? 9급 생도 주제에!”
“나의 임무는 끝났으니 더 이상 나를 하대하지 마라, 루산.”
루산은 빈첸의 눈을 마주하고서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빈첸은 생도들에게 명령했다.
“가이아 신관들과 비올가 무인들을 포박해. 이들은 죄 없는 일반인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구금하고, 마나를 인위적으로 생성시키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무인들조차 심상 없이 마나를 다루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 마나는 너무 위험한 기운이다.
그런 기운을 강제로 생성시켜 머금게 했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무, 무슨 짓들이야! 이거 놔!”
“또한 흑마법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마정석을 제련했다. 용서할 수 없는 중죄다.”
빈첸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기감을 퍼뜨렸다.
바닥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 시간부로 이 시설은 폐쇄할 것이며, 너희는 심판의 탑. 제라미엘로 압송되어 심판받을 것이다.”
그때,
보랏빛 안개가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을 기다려왔다.”
배불뚝이 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볕 부랑자 수용소의 에드몬드 소장이었다.
자색 안개가 짙게 깔렸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썩은 내가 진동했다.
에드몬드에게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피부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소개하지.”
그의 피부를 가르고, 새로운 사람이 한 명 모습을 드러냈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얼굴이 희었다.
루산이 신나서 외쳤다.
“에드몬드 소장! 이놈들을 어서 죽……! 으아악!”
에드몬드의 어깨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루산 신관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뱀 같았다.
뱀이 삼킨 먹잇감처럼, 루산의 형체가 꿀렁꿀렁 넘어가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에드몬드는 꺼억- 트림을 했다.
그는 오늘이 즐겁기라도 한 듯 히죽 웃고 있었다.
“악몽(惡夢)의 1급 책사, 에드몬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