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83화
부랑자로 잡혀온 자들이 울다 지쳐 반쯤 실신하듯 잠에 빠져들던 그때.
빈첸은 누운 상태로 마력자전을 시작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으나 빈첸의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뇌력거인의 증거였다.
-설마 마력회로에 남은 알약의 잔재를 뇌기로 태워버린 거예요?
‘그래.’
-아. 그게 가능한 거구나.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뇌기는 모든 것에 폭력적인 기운이니까.’
인류가 다루기 힘들다 알려진 이 거친 기운은 알약에게도 난폭했다.
몸에 남아 있던 알약의 기운은 전부 다 증발했다.
율리안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개사기야.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불만인 것 같다?’
-이렇게 야만적인 방법이 이렇게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래요. 아 뭔가 허탈해. 지는 기분이야.
‘뭘 새삼스레.’
-그래서? 무슨 알약이에요? 심장을 자극한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다. 미량의 마나를 인위적으로 발현시키는 것 같아.’
-예?
심상 없이 마나를 다루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무인도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위험했다.
무인들은 부랑자들에게 또다시 알약을 먹였다.
-미친놈들일세.
율리안은 허허- 웃고 말았다.
-그럼 일반인들한테는 독인데 형님한테는 약이잖아요?
‘그런 셈이지.’
빈첸은 원래 심상 없이도 마나를 다룬다.
지금 저 약은 빈첸에게 마나를 선물해 주는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뭘 해도 될 놈은 넘어져도 황금을 줍는다더니.
이틀째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각방을 쓰게 되었다.
수용자들끼리 친분을 다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셋째 날.
빈첸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을 관리하는 무인들의 수준이 아주 낮지는 않아.’
적어도 9급 생도들이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이 임무에 빈첸을 추천한 둘란도, 그 임무를 받아들인 베르사도, 임무를 승인한 헤르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빈첸은 베르사의 말을 떠올렸다.
-네 승급시험을 기록하기 위한 영상석이다. 네 승급시험 기간 동안 상시 작동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매우 값비싼 물건이니 소중히 다루도록.
빈첸은 그제야 베르사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이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인가.’
그게 9급 생도 빈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넷째 날이 되었다.
독립된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기는 했지만 다른 수용자의 절박한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없으면 아이가 죽어요. 제게는 두 살 된 아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았어야지.”
헬크를 비롯한 비올가의 무인들은 수용자들을 대놓고 죄수 취급했다.
“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니까요!”
“가난한 게 죄라는 걸 아직도 몰라?”
헬크가 킬킬대며 웃었다.
“딸이라고 했냐?”
“따, 딸입니다. 이제 두 살 되었습니다. 제발 내보내 주세요.”
남자의 이름은 스우벤이었다.
짝!
무인이 스우벤의 뺨을 때렸다.
스우벤은 굴하지 않고 애걸복걸했다.
“메일튬 미드웨이 12번가 3번 블록에 위치한 초록지붕 집입니다. 거기 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먹을 것이라도 제발…….”
“네 딸은 너 때문에 죽을 거야. 네가 힘이 없는 죄로.”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빈첸은 보약이라 할 수 있는 알약을 꾸준히 섭취했다.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상당히 늘었다.
율리안의 역산 계산으로는 이미 3성 중반에 도달한 수준이라고 했다.
“자자. 밖으로 나와.”
수용자들은 한 명, 한 명, 마차에 올라탔다.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빈첸은 마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별 이름 없는 동산.’
루산 신관은 분명히 ‘별 이름 없는 동산’이라고 했다.
사기(死氣)가 잔뜩 서려 있는 곳.
‘언데드가 나타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수준의 사기군.’
마차가 멈췄다.
“다들 내려.”
반쯤 자포자기한 수용자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헬크가 말했다.
“저기를 걸어서 지나간다.”
수용자들이 일렬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빈첸은 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문자들을 보았다.
저만치 앞에는 작은 문 형태의 특수한 조형물이 보였다.
마법관문인 듯했다.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
꽤 오랜 세월 구동되어온 마법진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무슨 효과를 가진 마법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헬크가 수용자 한 명의 등을 발로 찼다.
“빨리 가!”
수용자는 마법관문을 지나쳐 넘어졌다.
수용자에게서 별다른 특이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겁먹은 수용자들이 마법진과 마법관문을 지나쳤다.
다음은 두 살 된 딸을 가진 남자.
스우벤의 차례였다.
그는 무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저를 좀 내보내 주세요. 제게는 두 살 된 아이가 있어요. 제발, 제발 내보내 주세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스우벤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반강제적으로 마법관문을 통과했다.
빈첸은 바로 뒤에서 스우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어?’
-왜 그래요?
‘마나의 인위적인 증폭이 있었다.’
스우벤이 벌떡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뛰어갔다.
그는 구토하기 시작했다.
“웨에에에에엑!”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헬크가 씨익 웃었다.
“한 놈 건졌군. 소장님께서 좋아하시겠어.”
헬크는 스우벤의 몸을 쇠사슬로 결박했다.
그 또한 이상했다.
‘묵철(墨鐵) 쇠사슬?’
상당한 경지의 무인을 구속할 때에나 쓰는 쇠사슬.
묵철은 함량에 따라 마나를 봉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을 구속하기에는 과한 도구였다.
스우벤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율리안. 저건 강제 악령계약을 유도하는 마법진과 관문이야.’
스우벤의 상태를 보니 확실했다.
다음은 빈첸의 차례였다.
빈첸은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계획을 수정한다.’
본래 ‘창고’까지는 조용히 잠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무인들을 교란시키고 증거를 확보하려 했다.
-어떻게 하려고요?
빈첸이 걸음을 옮겼다.
마법진을 지나면서 발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법진의 효용을 느껴보았다.
순간,
눈앞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마법진은 어두운 기억을 끌어내는 마법진인 것 같았다.
환청이 들려왔다.
외팔이 데이븐의 탄생을 저주했던 부모님들의 목소리.
-징그러운 것이 태어났군.
-그냥 죽어주면 안 될…….
빈첸은 뇌력을 끌어올렸다.
이능검격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능검로를 따라 미전류를 흘려보냈다.
사미온의 지하감옥에서조차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정신은 이 정도 마법진에 현혹되지 않았다.
콰과광!
폭발이 일었다.
미전류와 반응한 마법진이 크게 폭발했다.
“무, 무슨 일이야?”
몇몇 무인들이 달려왔다.
“모르겠습니다.”
“마법진에서 갑자기 작은 폭발이 있었습니다.”
“저놈이 지날 때 폭발이 있었습니다.”
“젠장!”
헬크가 빈첸에게 다가와 소리 질렀다.
애꿎은(?) 빈첸에게 화풀이했다.
“이 새끼! 네가 물어낼 거냐? 앙?”
이내 빈첸을 향해 발을 뻗었다.
“음?”
빈첸을 노렸던 그의 발이 빗나갔다.
헬크는 두 눈을 비볐다.
소년은 눈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잘못 찼나?’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가.
“이제 저 관문을 지나가면 되나요?”
순간,
헬크는 빈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예리한 검날이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봐, 헬크, 왜 그래?”
“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빈첸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율리안에게 계획을 말해주었다.
‘이 다음에는 큰 폭발을 일으켜 산불을 낼 거야.’
마법진을 통해 시험은 해봤다.
뇌력을 더욱 끌어내면 충분히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좋은 생각이에요. 어차피 소동 일으킬 거면 크게 일으켜야지. 암.
율리안은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계산해냈다.
필요한 열 에너지의 총량에 대해 설파했지만 중요한 건 불을 내기 좋은 최적의 조건이었다.
마법진과 마법관문에 내재된 마나는 마나폭발을 더욱 증폭시켜줄 것이었다.
-풍향도 마침 우릴 돕네요.
빈첸이 마법 관문을 통과했다.
마법 관문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몸을 통해 직접 느껴봤다.
“알약으로 마나를 생성시킨 뒤, 마법진과 마나 관문을 통해 악령계약을 인위적으로 생성시키는 곳이군.”
마법진으로 내면의 어둠을 끌어낸다.
마법관문으로 악령계약을 강제로 맺게 만든다.
이곳의 존재의의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빈첸은 마력회로에 뇌력을 둘렀다.
자신의 몸을 침범하는 이 흑마법 관문의 기운과 맞부딪쳤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은 이내 불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흩날리기 시작했다.
“부, 불이다!”
“불 꺼!”
몇몇 수용자들은 소란을 틈타 도망치기 시작했다.
쇠사슬에 묶인 스우벤도 도망치고 싶은 듯 꺽꺽대며 괴성을 질렀다.
“야, 야! 쟤 잡아!”
“불 꺼!”
“물! 물을 가져와!”
“놈들이 도망가잖아!”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빈첸은 심장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설인 걸음.’
설상 걸음까지 펼칠 수 있는 빈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설인 걸음이면 충분했다.
설인 걸음의 경지는 높아졌고, 설상 걸음에 비해 체력을 안배하기 수월했다.
아덴카 정검 제1식.
뇌력 연환.
반월 베기.
무인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너희의 행태를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나.”
빈첸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아공간에 숨겨져 있던 홍련이 붉은 빛을 토해냈다.
붉은 검날에 푸른 뇌력이 서렸다.
“으아악!”
헬크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는 팔을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덴카 검식과 뇌력거인의 힘이 융합되어, 헬크에게 극도의 고통을 선사했다.
빈첸의 몸이 미꾸라지처럼 무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덴카 정검 제2식.
깊게 찌르기.
또 다른 무인의 허벅지를 찔렀다.
빈첸의 몸놀림은 재빨랐다.
“이놈!”
그러나 상대는 수가 많았다.
빈첸의 뒤를 노리고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혀, 형님! 뒤요!
빈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홍련만 뒤로 넘겼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아밀룬 제3 검식.
중검첩방(重劍疊防).
무거운 마나를 중첩하여 적의 살의를 막는 기술.
보지 않아도, 방어점이 정확하지 않아도 막아낼 수 있다.
“뭐, 뭐야 이놈!”
빈첸은 재빨리 마나의 성질을 바꿨다.
아덴카 정검 2식.
뇌력 연환.
깊게 찌르기.
중검에 이은 쾌검.
심상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나는 성질을 자유자재로 변환시켰다.
푸욱!
상대의 허벅다리를 깊이 찔렀다.
“크아악!”
빈첸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며칠간 먹은 알약의 효과.
그리고 역용의 효용 덕분이었다.
마력회로를 뒤덮은 마나막이, 빈첸이 지닌 본래의 실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전투 중에는 어지간해서는 끼어들지 않는 율리안이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개, 개쩐다.
빈첸이 빠르게 말했다.
“뇌력이 너희의 몸에 스며들었으니 단순 지혈로는 어림없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헬크의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자꾸 튀어 오르고 있었다.
빈첸은 헬크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의 오른 다리를 베어냈다.
“신관들의 도움이 있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팔다리를 영원히 못 쓰게 될 것이다.”
“…….”
무인 중 하나가 다급하게 음성석을 두드렸다.
“지원 요청! 심각한 부상자들이 있습니다! 신관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 모두 다리를 크게 다쳐 움직일 수 없습니다!”
빈첸은 몸을 돌렸다.
‘됐다.’
생도들의 임무는 신관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신관들이 이곳에 온다면, 생도들도 이곳에 온다.
‘비올가(家). 그리고 가이아. 너희는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빈첸은 설인 걸음을 펼쳐 ‘창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