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80화
얼굴이 굳어진 세르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죠?”
“세상은 세르쿤 집사님을 7성의 암살자라고 부르더군요.”
빈첸은 세르쿤이 8성에 근접했거나 혹은 이미 8성을 달성한 수준의 무인이라고 직감하고는 있으나, 어쨌든 세상에는 7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49개의 심상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되네요.”
7개의 선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심상으로 만들었다.
사실상 그의 심상은 1개가 아니라 7개의 심상이 모였다는 소리였다.
“한 번에 힘을 뿜어내기에는 조금 불리할 수 있겠지만 은밀하고 세밀한 컨트롤은 쉬워지겠군요. 그래서 암살자로서의 길을 가신 것 같고요.”
“…….”
세르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세르쿤은 바르티칸의 가주인 폰시아노에게도 역용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는 역용을 익히지 못했다.
당연히 분절된 심상이니, 49개의 심상이니, 이러한 영역도 읽어내지 못했다.
“처음이군요. 역용을 가르쳐주었더니 제 심상에 대해 알아차린 사람은. 그렇다면 제 약점도 파악할 수 있겠군요.”
빈첸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야 하나.’
무인들은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을 꺼린다.
빈첸이 깨달은 것들은 세르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사실들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어.’
세르쿤에게 거짓말은 의미 없었다.
그라면 충분히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나았다.
“말을 하는 것이 조금 두렵군요.”
“그거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빈첸이 세르쿤 자신의 약점을 단박에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르쿤은 스스로 입을 열었다.
“제 심상은 다방면으로 활용하기 좋고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하지요.”
“혹시 귀를 막아도 됩니까? 전직 살왕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은데요.”
빈첸이 엄살을 부리자 세르쿤이 빙그레 웃었다.
“빈첸 공자가 말해보십시오. 내 약점이 무엇인지.”
“……꼭 그래야 합니까?”
“공자의 한계가 어딘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
세르쿤의 눈에 악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호의적인 호기심마저 담겨 있었다.
빈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방면으로 활용하기 좋고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한 대신, 일반적인 심상에 비해 강도가 뒤떨어져서 직접적인 마력싸움에는 약한 면모를 보이겠지요.”
신체를 접촉시켜 마나 대 마나로 싸우면 불리하다.
하나의 강대한 심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여러 개의 분절된 심상에서 새어 나오는 마나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알아낸 게 있습니까?”
“수많은 심상이 일을 해야 하고, 마력을 쏟아내는 데 저항값도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쉽게 지치실 겁니다. 따라서 중장기전에서는 무척 불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르쿤은 암살자의 길을 걸었고 일격필살의 무예를 익혔다.
세르쿤은 하하하! 크게 웃었다.
“빈첸 공자가 왜 아덴카의 못난이로 불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속이 뻥 뚫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뛰어난 후배의 등장은 즐거운 일이니까요.”
세르쿤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이 정도 명석함이라면 충분히 레이븐의 꿈이 되어줄 수 있겠지.’
세르쿤이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아까 응집시켰던 열기 어린 마나를 뇌로 보내면 마나가 새로운 성질로 변화하게 될 겁니다. 열기를 머금었던 마나이기에 보다 멀리 퍼질 수 있을 겁니다. 이를 마나의 확장성이라 부릅니다.”
빈첸은 ‘마나의 확장성’이라는 단어는 몰랐다.
단어는 모르지만 그 본질적인 원리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선 형태의 심상에서 만들어낸 마나이기에 옅지만 멀리 퍼질 수 있고. 머리에서 정제된 이 기운을 온몸에 동시다발적으로 흩뿌리면…… 마력회로를 덮는 일종의 마나막을 생성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빈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아! 전신으로 퍼뜨린 마나막의 조절을 통해 역용을 펼치는 것이군요!”
세르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빈첸의 말이 너무나 정확했다.
“맞습니다. 온몸의 마력회로에 옅은 마나막을 덮는 것이 핵심입니다.”
약간 흥분한 세르쿤의 말이 빨라졌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마나막의 두께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겠네요.”
“그러면?”
“제 몸 안에 담긴 뇌력조차 훨씬 부드럽게 다룰 수 있겠군요. 마나막이 마력회로를 보호해 줄 테니까요.”
빈첸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런 식의 운용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과연!’
500년 동안 발전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지만, 발전한 것도 분명 있었다.
‘그래. 이거면 몸은 훨씬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겠어.’
몸이 상하는 것을 많이 막아줄 것이다.
마력회로에서 새어 나가는 마나의 양도 줄어들 것이다.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익숙하게 다스리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많은 연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연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위험한 기술입니다.”
비유하자면 마력회로를 뒤덮고 있는 마나막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었다.
그것이 끊어지면 분명 어딘가를 세차게 타격한다.
세르쿤이 잔소리를 이어갔다.
“마나막을 균일하게 유지하지 못하면, 마나막이 끊어질 것이고, 그것은 마력회로에 큰 부담이 됩…….”
약간 이상함을 느낀 세르쿤이 빈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나를 흘려보내 마력회로를 살펴보았다.
“……됐군요?”
세르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빈첸은 이미 마나막을 만들었고 전신의 마력회로에 골고루 둘렀다.
역용의 기본을 익혀버린 셈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 말도 안 되는 걸 이 소년은 태연스레 해냈다.
“좋은 가르침 덕분입니다. 덕분에 뇌력거인의 힘을 조금 더 자유로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빨리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처음에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 알고 나면 쉬운 기술이군요. 저는 이러한 기술이 상승의 무학이라 생각합니다. 본질은 어려우나, 일단 이해하고 나면 사용하기 쉬운 기술. 진심으로 놀랍습니다.”
더 나아가 빈첸은 미전류 특성을 이용하여 설상 걸음을 운용해 보았다.
성왕의 무덤에서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역용을 익힌 상태로 특성들을 융합해서 사용한다고?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놀랍다 못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지경이었다.
* * *
세리는 기뻤다.
“공자님을 혼자 보내는 게 무척이나 마음 쓰였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이번 승급시험에는 세리도 함께 가게 되었다.
바르곤은 탑 외 마법사로서, 수많은 실전을 치르며 성장해 왔다.
그것은 그의 교육철학이기도 했다.
“이번에 세리는 내 시녀로서가 아니라, 생도를 지원하는 보조마법사로서 파견되는 거야. 본질을 잊지 마.”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세요. 제 본질은 마법사가 아니라 시녀인걸요. 아무래도 윌슨은 영 미덥지가 못하답니다.”
세리는 신이 나서 빈첸의 짐을 챙겼다.
다음 날 아침.
빈첸 일행은 보고를 위하여 바르곤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힌 바르곤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보고는 생략하지.”
그는 약간은 귀찮은 듯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해당 시험은 가이아의 핵심 인물인 2급 신관 둘란의 지원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아덴카의 베르사 부인이 이를 받아들여 승급시험이 치러지는 것이다. 가이아와 아덴카. 두 세력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거라. 승급시험의 통과 여부는…….”
특별 승급시험이므로 본래는 헤르카가 채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마도 바르곤은 그것조차 자신이 대행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추후 통보하겠다.”
빈첸 일행이 밖으로 나간 뒤, 헤르카가 창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르곤 경! 나 휴가 좀 주면 안 돼?”
“헛소리 좀 작작 하십시오! 며칠 전에 갔다 왔잖습니까?”
“내가? 휴가를 갔어?”
“제철 생크림 케이크 드시러 간다면서요.”
“그건 출장이었어.”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그럼 나 지금 출장 갈게.”
“왜요? 출장 갈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음.”
헤르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승급시험 채점. 내가 직접 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메일튬으로 갈게. 내 눈으로 보고, 내가 직접 채점하면 되잖아. 어때?”
“…….”
바르곤은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그 일이라도 해라.”
“방금 반말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기간은 일주일이야?”
꽈득.
바르곤의 손에 쥔 펜이 부러졌다.
채점하러 간다면서 생도의 승급시험 기간도 모르고 있다.
바르곤의 턱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한 달입니다.”
“아싸! 사랑해, 바르곤 경.”
헤르카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바르곤 앞에서는 무척이나 신이 난 것 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 * *
여러 개의 이동관문을 거치면서 윌슨은 약간 불만을 가졌다.
“아덴카 7공자에, 바르티칸 외동아들이 있는데. 이렇게 줄을 서야 한다니!”
세리가 윌슨의 팔뚝을 꼬집으며 작게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 지금 공자님은 아덴카의 공자가 아니라 붉은 요새의 생도로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이니까.”
“아니, 그래도 이동관문 관리자들이 싸가지가 너무 없잖아?”
우리 공자님이 무려 빈첸 공자님이신데.
관리자들 혹은 관리 마법사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아덴카의 영역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는 ‘붉은 요새’에 대해서 모르는 자도 있었다.
결국 윌슨은 폭발했다.
“아니! 이보쇼! 마법사 양반! 아덴카의 7공자이고, 저분은 바르티칸의 외동아드님이신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돈은 왜 더 달래? 우리가 호구야? 앙? 나한테 주먹찜질 당해볼래?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그날 저녁.
윌슨은 빈첸에게 크게 혼이 났다.
“나의 임무와 생도로서의 명예를 망가뜨릴 셈이면 따라오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공자님.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윌슨은 약 2시간 동안 잔뜩 풀이 죽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빈첸을 모시는 시종이라는 자부심 덕택에 금방 활력을 되찾았다.
메일튬은 남쪽으로 굉장히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이동관문을 타고 이동하는데도 6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마차에 앉은 셀비라가 말했다.
“옛날에는 마차로 이동하는 데 3년이 넘게 걸렸대.”
빈첸은 회상에 잠겼다.
‘그랬지.’
이동관문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시간이 6일가량으로 줄어들었으나, 500년 전에는 3년이 넘게 걸렸다.
그 산증인이 빈첸이었다.
‘메일튬. 오랜만이군.’
500년 만에 방문하는 해안도시.
감회가 새로웠다.
저만치 멀리, 도시를 지키는 방벽이 보였다.
셀비라는 방벽을 보며 감탄했다.
“우와! 메일튬 방벽이다!”
그녀는 메일튬 방벽이 세워진 배경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지식들을 풀어냈다.
셀비라는 그게 무척이나 즐거운 듯 보였다.
“200년 전, 전쟁 이후로 저 높은 방벽이 지어졌어. 지금의 메일튬이 해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게 된 거야.”
빈첸은 생각에 잠겼다.
‘율리안. 뭔가 이상하다.’
그 말에 율리안도 방벽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실전경험이 없는 율리안은 이상함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뭐가 이상한데요?
‘방벽의 상태가 지나치게 깨끗해.’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것치고 전투의 흔적이 너무 없었다.
이건 보수의 영역이 아니었다.
방벽은 마치 새것처럼 깨끗했다.
빈첸 일행은 메일튬의 성문을 통과했다.
셀비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우리가 9급이라지만 어쨌든 둘란 신관님의 요청으로 지원을 나온 건데, 안내자조차 없을 수가 있어?”
빈첸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지원을 반기지 않는 건가.’
메일튬에 파견 나온 신관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라는 이 임무에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확실한 건, 일반적인 지원 임무는 아니겠군.’
일단은 도시 내에 숙소를 잡았다.
그날 밤.
빈첸이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빈첸을 몰래 찾아왔다.
“당신은…… 아이만 경?”
아이만.
넬리우크를 보좌했던 6명의 보좌신관 중 유일하게 자신의 목을 걸지 않았던 신관이었다.
“제가 여기 온 건 비밀입니다.”
그의 호흡은 굉장히 가빴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