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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79화 (79/184)

환생의 정석 79화

아주 오래전.

세르쿤은 바르티칸이 다스리는 마을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한 무리가 빈민가를 습격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치안을 책임져야 할 바르티칸의 무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덮기 위해 빈민가의 사람들을 납치하여 고문했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냐.”

폭동이 아니었지만 폭동으로 규정했다.

외부의 습격을 막지 못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하여 힘없는 빈민가 사람들을 겁박했다.

“말을 하면 살려주마.”

“이래도 말을 안 할 것이냐?”

그중에는 세르쿤의 부모도 있었다.

결국 세르쿤의 부모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세르쿤의 목표는 바르티칸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세르쿤은 이를 악물고 무예를 닦았고 살왕의 이명을 얻었다.

그러나 바르티칸은 지나치게 강했고, 세르쿤 혼자서는 바르티칸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바르티칸의 가주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어야 했다.

마침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그 아이를 죽이고.’

거기서 최대한 많은 수의 바르티칸 무인들을 베어넘기기로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그런데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는 않았다.

‘죽일 수가 없구나.’

아이의 얼굴을 보니 죽일 수 없었다.

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으나 그 날은 이상했다.

그는 독 묻은 단검을 내려놓았다.

‘나의 임무는 실패하였다.’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곧, 바르티칸의 정예들이 들이닥칠 것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한 명이었다.

바르티칸의 가주.

창왕(槍王)이라 불리는 폰시아노 바르티칸이었다.

그는 맨손이었다.

“이유나 들어보자, 살왕.”

이야기를 모두 들은 폰시아노는 세르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거창한 위로나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네가 살아왔던 삶의 무게에 대한 보상은 되지 않겠지.”

폰시아노는 과오를 순순히 인정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때의 일이 폰시아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폰시아노는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결국 바르티칸을 다스리는 총책임자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죽여도 좋다.”

“사양하지 않지.”

세르쿤은 독 묻은 단검으로 폰시아노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세르쿤이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왜. 어째서 피하지 않는 거지?”

“내가 피해자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성이잖아. 진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거든.”

“…….”

“진심으로 미안하다. 내가 모자라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사죄한다, 세르쿤.”

“…….”

폰시아노는 의연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겸허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젠장.”

세르쿤은 폰시아노에게 해독제를 던졌다.

“이걸 왜 줘?”

“모른다. 일단 먹어.”

“싫다.”

“먹어라.”

“거부한다.”

“먹으라고!”

폰시아노는 해독제를 먹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채 기절했는데, 세르쿤이 강제로 입을 벌려 해독제를 투여했다.

그날 이후.

세르쿤은 레이븐의 전속 집사가 되었다.

* * *

변이 고블린 사건 이후, 레이븐은 창술에 더욱 매진했다.

그에게는 빈첸이라는 확실한 목표와 꿈이 생겼다.

“첫 번째 만남도 패배. 둘째 임무에서도 패배.”

기분이 좋았다.

“나보다 대단한 놈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야.”

빈첸을 원동력 삼아 레이븐은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렸다.

세르쿤은 그런 레이븐을 눈에 담았다.

부정(父情)보다 더한 사랑이 그의 눈에 담겼다.

‘빈첸 공자. 당신은 레이븐의 꿈에 더없이 어울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빈첸은 레이븐의 목표였고, 더 나아가 꿈이었다.

그러니 빈첸은 그에 걸맞은 실력과 명예를 갖추어야만 했다.

‘지금은 당신을 돕지요.’

레이븐의 목표를 위하여 빈첸을 돕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러 빈첸과 만났고, 빈첸을 결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공자가 보잘것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당신을 벨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군요.”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세르쿤을 적으로 돌리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군이었다.

“세르쿤 집사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역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군요.”

“역용은 단순히 얼굴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마력회로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뒤바꾸고, 뼈와 근육을 재생성하는 기술입니다.”

“…….”

“이는 특성이 아닙니다.”

빈첸은 그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가호 없이도 운용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맞습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마나를 이용하여 특정 위치의 근육을 자극하고 마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컨트롤하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이해가 몹시 빠르시군요.”

세르쿤은 빈첸이 신기했다.

빈첸에게는 보통 무인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나에 대한 이해.

무학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깊이 있게 선행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가 보기에 빈첸 공자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기술입니다.”

“제게 그 기술이 필요합니까?”

세르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몸 상태가 무척이나 위태로운 것 같습니다.”

그는 ‘천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빈첸의 상태가 어떠한지 정도는 알아차렸다.

“역용은 신체를 재구성하는 힘입니다. 약화된 몸을 일부 회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최소한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요.”

세르쿤과의 대화를 통해 빈첸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용은 단지 얼굴과 생김새를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역용의 본질은 마나를 이용하여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기술이었군요.”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뇌력 컨트롤도 쉽게 할 수 있을 테고요.”

역용은 본래 뇌력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뇌력이 몸에 끼치는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다.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세르쿤과의 대화가 빈첸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뇌력은 본래부터 위험한 기운.’

지나치게 파괴적이어서 선호되지도 않는다.

‘지금의 내 몸으로 뇌력을 다루는 건 버거워.’

그래서 초기 특성인 ‘미전류’ 하나만 다루는 것에 그치고 있다.

그 이상의 특성을 다루었다가는 몸이 먼저 녹아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용을 통해 몸을 재구성하고 뇌력을 다루면 그 이상의 것도 가능하다.’

빈첸에게는 꼭 필요한 힘이었다.

세르쿤이 왜 자신에게 역용을 가르쳐주려는 건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빈첸이 눈을 떴을 때, 세르쿤이 입을 열었다.

“배울 마음이 있습니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가르쳐주세요.”

“그렇다면 한 가지는 꼭 약속하여야 합니다.”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의 꿈에 어울리는 자가 된다고는 확언하지 못하겠습니다. 애초에 제게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분명히 약속드릴 것은 카곤보다는 강해질 것이고, 더 나아가 사미온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그거면 되었습니다.”

* * *

메일튬으로 출발하기 전.

3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빈첸은 세르쿤에게 ‘역용’의 마나흐름에 대한 강해를 들었다.

“처음부터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만, 일단은 그저 외우는 것에 집중하길 바랍니다.”

세르쿤은 그렇게 얘기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빈첸은 모든 것을 이해한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상충되는 두 갈래로 기운을 나누어 명치 근처에 머물게 만들면 목구멍 쪽에 열기가 피어오를 텐데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이렇게 해본 적이 있습니까?”

“…….”

빈첸은 대답할 말이 궁해졌다.

‘해보니까 그렇던데.’

이건 배운 게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몰라도 그냥 알고 있는 그런 개념이었다.

세르쿤은 빈첸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알았구나!’

세르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는 심상이 없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다가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굳이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이건 직관의 영역이니.”

세르쿤은 이 ‘역용’을 레이븐에게도 여러 번 가르쳐주었었다.

그러나 레이븐은 아예 이해를 하지 못했다.

바르티칸가의 가주 폰시아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무학의 깊이와 역용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마치 검술을 잘한다 하여 마법을 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영역이 너무 달랐으므로.

“빈첸 공자는 타고난 직관을 지니고 있군요. 그도 아니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했거나.”

원래는 일방적인 강해를 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세르쿤의 처음 목적과는 다르게, 강해가 아니라 자꾸 질문을 던졌다.

“목에 뜨거운 기운이 몰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래 머금어야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뜨거운 기운이 몰리면 응당 찬 성질의 마나를 이끌어내어 중화하여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빈첸이 목에 손을 대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 그 안에는 커다란 마력회로 두 가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 위치한 마력회로는 열기(熱氣)에 몹시 친화적이기 때문입니다. 열기를 한계치 이상 오래 머금으면 그에 적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전에 마력회로가 전부 타버릴지도 모르는데요?”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경험해 본 일이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랬지. 2개월 동안 쓰러져 있었어.’

외팔이 데이븐 시절.

그때 뭣도 모르고 이것저것 다 해봤다.

그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시 무인들이 그랬다.

그래서 요절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다행히 데이븐은 요절하지 않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었다.

“그렇기에 마나의 농도를 옅게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세르쿤의 심장이 또다시 빨리 뛰기 시작했다.

빈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상상 이상이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선 형태의 심상에서 뽑아낸 마나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겠군요.”

가장 유리한 심상은, 가장 단순한 형태인 ‘선’이었다.

세르쿤이 놀라움에 침묵하는 사이, 빈첸이 말을 이었다.

“해당 열기를 이용하여 뇌로 흘려보내겠군요.”

“그렇습니다. 대단히 미세한 컨트롤이 필요하기에 대다수 무인들이 익힐 수 없는 힘이기도 합니다.”

‘선’ 형태의 심상은 큰 힘을 내기 어렵다.

오히려 ‘점’ 형태의 작은 심상이 더 강한 파괴력을 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토록 세밀한 컨트롤을 요구하는 작업에서는 ‘선’ 형태의 심상이 유리하다.

빈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의 선이 약하다면, 두 개의 선을 만들면 돼.’

두 개가 약하다면, 세 개의 선을 만들어 중첩시키면 된다.

굵고 두꺼운 선을 만들어 하나의 심상을 만든다.

현대 무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빈첸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도 느낌이면 7개의 선을 중첩하여 하나의 심상으로 화합시킬 수 있겠네요.”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여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그러자 빈첸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르쿤 집사님의 심상은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겠군요.”

마침내 세르쿤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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