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8화
베르사가 말했다.
“빈첸은 메일튬으로 파견될 것이다.”
“비올가(家)가 다스리는 남부 해안도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비올가(家)는 아덴카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남부의 중견 가문이었다.
그들이 다스리는 땅은 그리 비옥하지 않았고 별다른 특산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부를 축적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 말을 달리하자면 그 땅의 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었다.
“그곳의 시민들이 심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다. 최근 가난과 기근 때문에 민생은 더욱 척박하여졌다.”
“빈첸 공자더러 그곳을 치라고 하실 생각인가요?”
그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빈첸이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어도 이제 겨우 열넷의 생도였으니까.
“그럴 리가.”
비올가가 백성들을 못살게 굴기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영역이니 아덴카가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곳의 사후관리를 위하여 가이아 신전에서 신관들을 파견했다. 빈첸은 한 달간 그들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호위 임무는 아닌 듯하군요.”
“빈첸이 하기 나름이겠지.”
레일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도무지 베르사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비올가의 가주는 영악하고 교활한 자라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요.’
아덴카 7공자로서의 빈첸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터인데, 붉은 요새의 9급 생도가 파견된다고 하면 코웃음부터 칠 인간이었다.
‘게다가 가이아에서 파견된 신관들은 이미 비올가와 한통속입니다.’
가이아 신관들은 시민들의 고통에는 관심 없다.
오히려 그들은 시민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할수록 좋아했다.
그들이 외롭고 힘들어 의지할 곳이 없어야만 신앙심이 더 두터워지니까.
‘무엇을 노리고 계신 건지, 제 안목으로는 파악하기 어렵군요.’
한참이나 침묵하던 레일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은 해적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고사로 위장하여 빈첸 공자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빈첸 공자는 옳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빈첸은 분명 비올가(家)와 부딪치게 될 것이다.
비올 입장에서 빈첸은 거슬리게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들은 아덴카의 7공자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승급시험을 치르는 붉은 요새의 9급 생도는 죽일 수 있습니다. 비올가의 가주는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가이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가이아로부터 사주를 받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근 빈첸 때문에 가이아의 위상이 많이 깎여나갔다.
실제로 가이아의 위상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아덴카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지만, 어쨌든 가이아가 체감하기는 그러했다.
“그들은 아주 좋은 기회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으로 적합하지 않겠는가.”
마치 아덴카의 아이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9급 생도에게 이 정도의 시험을 부여한 적은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9급 생도를 위해 레일사가 이토록 발 벗고 나서서 변호했던 적도 없었지.”
베르사가 빙그레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레일사. 빈첸은 그대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아이다.”
“……걱정한 적은 없습니다.”
베르사는 레일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종장의 걱정을 덜어줄 사실이 하나 있다.”
“…….”
“빈첸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 * *
전직 9급 대표생도.
셀비라가 빈첸 옆에 앉았다.
“빈첸? 응? 나도 데려가주라. 나 그쪽 지리와 역사적 배경에 꽤 밝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셀비라는 자신 있게 메일튬에 대한 정보들을 술술 풀어냈다.
“……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어. 현재는 비올가가 다스리고 있는 중이고, 메일튬 방벽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기도 한데 현재는 비올가가 다스리고 있어. 아참. 지리적으로 괄목할 만한 점이 하나 있어.”
“…….”
“근처에 헬라임 가문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마찰이 별로 없었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헬라임 가는 유력한 명가이고, 주변의 가문들과 영역들을 흡수해서 세를 엄청나게 키운 가문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비올가가 딱히 조공을 바치거나 한 기록도 없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그렇고, 그리고 또…….”
그냥 내버려 두면 메일튬에 대한 정보를 밤새 떠들 것 같아서 빈첸이 말을 끊었다.
“왜 그렇게까지 함께 가고 싶어 하지?”
“그야 환경적으로 아주 불리한 해안도시잖아. 그 해안도시가 어떻게 200년 넘게 유지될 수 있는지 궁금했단 말이야.”
셀비라가 방긋 웃으며 빈첸에게 더 밀착했다.
“그리고 거기엔 200년 전 해안전쟁에 대한 기록과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대.”
“…….”
“왜 그런 눈으로 봐?”
“네 꿈이…….”
“아, 맞다. 너한테는 말 안 했지? 사실 내 진짜 꿈은 역사학자거든.”
“그런데 왜 붉은 요새에 있는 거지?”
“역사학은 돈이 안 돼.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무조건 무학을 익혀야 해. 위험한 직업이거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역사의 발자취를 좇기 위하여 많은 곳을 탐방하여야 한다.
흑마법사의 던전이나 고대유적 등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학을 익히는 것이 필수이기도 했다.
“같이 가는 거다? 틀림없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결국 빈첸은 동행을 허락했다.
-형님도 고약한 구석이 있네요. 어차피 같이 가자고 할 거였으면 왜 그렇게 튕겨요?
‘용병술이라고 해두지. 덕분에 더 안달 나지 않았느냐?’
율리안에게 신체는 없지만 빈첸은 똑똑히 느꼈다.
율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형님, 처음에는 답 없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영감탱이인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왠지 점점 교활해지는 느낌이에요.
빈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셀비라 다음은 시젠이었다.
“네가 허락한다면 나도 함께하고 싶다.”
시젠은 빈첸 덕택에 말론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그때의 고양감과 성취감을 잊을 수 없다.
“셀비라보다 늦었군.”
빈첸은 함께할 동료로 시젠을 첫손을 꼽았다.
가진바 능력과는 별개로, 시젠은 옳은 일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던질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생도였으니까.
시젠은 말론과의 단독결투에서 이미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시젠이 가진 올바른 신념은 어쩌면 무력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때, 5생활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나, 나도! 나도 함께하고 싶어!”
친선교류회에서 빈첸과 함께 카곤을 꺾었던 열등생 하몬이었다.
그는 빈첸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보았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상태.
빈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몬의 눈이 붉어졌다.
“열심히 할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형님, 시젠까지는 그렇다 쳐도, 하몬은 실력이 좀 뒤떨어지지 않아요?
‘너까지 나를 시험하는 거냐? 어차피 너도 같은 생각이잖아.’
율리안도 사실 하몬을 데려가자고 하려고 했다.
하몬의 열등함이 오히려 빈첸의 능력을 빛내주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율리안은 빈첸을 위하여 하몬의 열등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상태였다.
-왜 이렇게 똑똑해졌지?
‘다만 너같이 차갑고 매정한 이유는 아니다.’
율리안은 하몬을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다.
빈첸을 빛내줄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한다.
그러나 빈첸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요?
‘시젠과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저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빈첸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이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내게도 행운이지.’
-그래요, 뭐, 그런 걸로 해요. 근데 제일 중요한 사람이 빠졌잖아요.
빈첸의 승급시험의 내용은 메일튬에 파견된 가이아 신관들의 신변보호 및 지원이다.
메일튬은 해적이 자주 출몰하며 오래된 기근과 가난 때문에 도시 자체의 치안도 상당히 나빴다.
따라서 강력한 힘을 가진 무인이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지금 찾아가려고 했다.’
빈첸이 5생활관을 나섰다.
9급 생도 중 빈첸을 제외한 최강의 전력.
창술명가의 외동아들에게 동행을 제안하기 위하여.
‘레이븐이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세르쿤 집사가 함께 움직인다.’
물론 세르쿤이 임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그건 활용하기 나름이었다.
“레이븐. 나와 함께해 주겠어?”
“나를 처음으로 찾아왔어야지!”
“그건 미안하군. 대신 승급시험이 끝나면 너와 정식으로 대련을 치를 것을 약속하지.”
“완벽한 제안이다, 친구.”
레이븐이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제안인 듯했다.
“근데 빈첸. 세르쿤 집사가 할 말이 있다던데.”
“세르쿤 집사님이?”
그때,
빈첸의 주변이 붉어졌다.
‘결계?’
외부의 공간과 단절되었다.
뛰어난 결계사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공간.
이 안쪽에서는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빈첸이 검을 뽑았다.
저만치 앞에서 세르쿤 집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빈첸은 세르쿤을 바라보다가 이내 홍련을 갈무리했다.
“왜, 검을 다시 집어넣었습니까?”
“진짜 살기가 아니니까요.”
세르쿤이 짧게 감탄했다.
“그걸 구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 제 기감이 꽤 괜찮은 편인가 봅니다.”
수많은 실전경험이 있어야만 구별할 수 있을 터인데.
“공자는 참으로 신기한 구석이 있군요.”
이 결계 안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진짜 살기가 아니었다.
결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기운이었고,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극한의 살기로 느낄 뿐이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이시는 겁니까?”
죽이려고 했다면 적어도 여기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결계는 외부와 내부를 차단시키는 공간입니다.”
“살왕의 영역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요. 아울러 살아나온 자가 몇 없다는 것도요.”
“비밀을 유지하기에 꽤 쓸 만한 공간이죠.”
세르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속으로 생각했다.
‘다만, 심지가 약한 이들은 결계의 살기에 눌려 의식을 잃기도 하지만요.’
심하면 졸도하거나 죽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러나 빈첸에게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백만 놓고 보자면 상급무인 못지않았다.
“제게 어떤 비밀을 말하시려 이런 공간을 만드신 건지 의아하군요.”
“음, 일단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세르쿤은 턱을 매만지다가 다시 미소 지었다.
“좋아요. 옛날 얘기부터 시작하지요. 아까 빈첸 공자가 말했습니다. 제 영역 안에서 살아나간 사람은 많지 않다고.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장 완벽하게 생존한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실 만합니다. 세상에 딱히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그자는 과묵하기도 하고요.”
세르쿤을 완벽하게 패배하게 만든 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멀린이라고 했다.
“저는 그날 패배했었습니다.”
“…….”
“저는 그날도 살행에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었습니다만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멀린 경의 강력한 뇌기에 침식당해 몸이 말을 듣지 않더군요.”
“제 스승님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주 오래된 얘기이기는 하나 그날 완벽하게 패배했습니다.”
그 이후로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뇌기라는 기운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
“신체의 성질을 바꾸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어쨌든 저는 연구를 거듭하여 어느 정도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다만,
그사이 의뢰인이 죽어버려서 멀린과 다시 싸울 이유는 사라졌다.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율리안이 소리쳤다.
-역용! 역용이에요!
예전에 율리안이 말해준 적 있었다.
[지금 엄청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저건 역용술이라는 걸 써서 그래요. 사실은 50살도 넘었어요.]
“혹시 역용인가요?”
“알고 계시는군요.”
세르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의 빠른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왜, 이 자리에서 굳이 역용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는지도 유추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도 이해되지 않고요.”
“첫째로, 당신이 레이븐 공자를 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포식이 나타났을 때.
그건 세르쿤도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만약 빈첸이 레이븐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레이븐은 포식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로, 공자가 레이븐 공자의 꿈에 더없이 어울리는 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군요.”
세르쿤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