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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77화 (77/184)

환생의 정석 77화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던 둘란은 이상한 음성을 들었다.

-오, 네가 내 주인이야? 길게 말 못하니까 짧게 전할게, 엣헴.

둘란은 한동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공자. 저한테 목소리가 들립니다.”

“목소리요?”

“네. 제 머리에 곧바로 목소리를 전하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입니다. 분명 마법이나 무인들의 마나 음성전달과는 다른…….”

“아.”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계시 같은 그런 거요?”

“……계시도 듣습니까?”

“모르셨나요?”

생각해 보니 둘란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칸과 베르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 생각에는 계시는 아닌 거 같고요.

율리안은 본인이 잡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또 다른 잡신의 탄생을 경계하는 듯했다.

마치 동생을 경계하는 첫째 아이 같은 느낌이어서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뭐냐?’

-자아가 있는 기물 같아요. 이를테면 에고소드 같은 거요. 근데 느껴지는 기운이 미약해서 곧 사라질 것 같긴 하네요. 의지만 간신히 깃들어 있는 수준이에요. 그래도 500년간 유지된 건 대단하긴 하네요.

둘란은 이내 성배가 에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배로부터 몇몇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허허. 이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요.”

성배가 완전히 비워지면 주인을 선택하게 된다고 했다.

성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신기를 불어넣는 자가 그 주인이 된다.

“아무래도…… 저는 주인으로 선택받았고 성배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둘란은 성배의 ‘자아’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빈첸과 율리안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성배가 엄청나게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잘난 척을요?”

“자아가 깨어났으니 한층 더 정순한 성수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걸 희석시켜 대량의 포션을 생산할 수 있다고 자랑하네요.”

빈첸은 율리안이 흠칫하는 것을 느꼈다.

성배의 자아에게 상당한 경쟁심리를 느끼는 듯했다.

-꽤, 꽤 하는 녀석이네요.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기물이라면 둘란 신관님의 입지가 더 좋아지겠군요.”

“아닙니다.”

둘란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가능한 비밀로 해주십시오.”

“어째서죠?”

“첫째로 저는 아직 이 보물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그는 2급 신관이지만, 그와 경쟁하는 수많은 신관들이 있다.

가이아뿐만 아니라 다른 신전 세력도 ‘대신관’을 위하여 노력 중이다.

“저는 아직까지 저를 위한 성기사단도 꾸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이유인데.”

둘란은 잠시 침묵했다.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지만, 보셨다시피 가이아는 무척이나 썩어 있거든요. 성수를 통해 대량의 포션을 생산하게 된다면…….”

이를 꽉 깨물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병들고 아픈 자들에게는 그 혜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고위 신관들은 부자들과 결탁할 것이고. 가이아는 더욱더 재물을 탐하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그건 둘란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조금 늦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어차피 공자에게도 성수가 필요하니, 아덴카에서 성수를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배가 말했다.

그는 둘란의 의견이나 의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잘난 척을 다 했으니 떠날 때가 된 듯했다.

-후후, 나는 충분히 자랑했으니 이제 떠난다, 내가 잘난 것을 잊지 말도록! 이만!

성배의 에고가 사라졌다.

* * *

베르사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소재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완전한 비무장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자로서의 기세가 느껴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이냐?”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어머니.”

성수와 관련된 얘기를 했다.

“하여,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을 곳이면서, 보물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곳이고, 신뢰할 수 있는 자가 관리해 주는 창고가 필요합니다.”

“아덴카에는 분명 보물을 관리하는 창고들이 존재한다.”

그중 몇은 베르사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를 대여하기 위하여, 너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느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대부호들이 아덴카와 같은 최상급 무력가문의 비밀창고에 자신들의 보물들을 맡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베르사는 그게 얼마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빈첸도 그를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남들과 같은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그 대가는 돈이었다.

“네게 그 정도 재력이 있느냐?”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바르곤 경이 제 후원자이시거든요.”

“바르곤 경은 붉은 요새를 관리하는 5환 마법사에 불과하다. 그가 아무리 탑 외 마법사로서 쌓아온 부가 있을지라도 불가능하다. 그의 봉급으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바르곤 경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무려 6마탑 부탑주의 유산을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겠느냐?”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다만, 어머니께서도 고려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성배를 통해 만들어진 포션이 어느 정도의 회복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실제로 제작이 되어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성왕의 힘을 계승한 자가, 성왕이 남긴 유품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가 만들 포션의 재료가 아덴카의 창고에 쌓이는 것입니다. 이는 훗날 아덴카의 전력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진 것은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지요.”

베르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성수의 일부를 아덴카에 귀속시키되 비용을 반으로 낮춰주십시오. 그게 제가 제안하는 바입니다.”

“겨우 가능성만 보고 확정된 수익을 포기하란 말이냐?”

빈첸이 베르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르사는 아덴카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사람이다.

단순히 무력이 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해박한 경제지식과 지혜가 필요했다.

때로는 강단도 있어야 했고.

그래서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싼값에 성수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머니.”

베르사는 잠시 고민했다.

빈첸이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일단 바르곤 경의 후원 약정서부터 받아오너라.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자꾸나.”

* * *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바르곤은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빈첸의 복귀보고까지 받아야 했다.

“……하여 임무를 마쳤습니다. 보고를 끝내겠습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후원 약정서가 필요합니다.”

바르곤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빈첸을 바라보았다.

바르곤의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평소의 바르곤이라면 전후 사정을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하고, 빈첸의 말에 타당성이 있는지를 검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바르곤은 너무 시달린 상태였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4시간 전.

헤르카가 돈을 빌려달라고 졸랐다.

어찌나 끈덕지게 들러붙는지, 바르곤은 똥 묻은 개 더러워서 피한다는 느낌으로 돈을 빌려줬다.

“……얘기를 해보거라.”

성수.

그리고 아덴카 비밀창고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헤르카 경보다는 훨씬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얘기구나. 그러나 전망과 가능성만 가지고 마구잡이로 후원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과가 있어야 후원도 있는 법이니.”

“아직 못 보셨군요?”

빈첸은 아공간에서 ‘바람소리’ 소식지를 꺼내 들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보였다.

[붉은 요새의 9급 생도, 가이아의 1급 신관을 무릎 꿇리다.]

“……이 정도 편파적인 내용이라면 마리아 기자를 매수한 것 아니냐?”

“그럴 줄 알고 더 준비했습니다.”

몇몇 소식지들을 더 꺼냈다.

붉은 요새와 아덴카의 위상을 더없이 높이는 얘기들뿐이었다.

빈첸이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 맞았다.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느라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구나.’

괜히 열이 받았다.

헤르카 때문에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카곤을 이겼다거나, 각명과 같은 지난 얘기들은 뒤로하고, 9급 생도들 중 1급 신관에게 경례받은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2급 신관의 명패를 받은 생도는요?”

“그러니까, 돈을 달라고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하는 것이냐?”

“그거야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저도 별수 없이 꺼낸 말이지요.”

“끙.”

바르곤은 이마를 짚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덴카의 금고 비용을 알기는 알고 하는 말이냐? 내 평생 봉급을 쏟아부어도 한 달을 유지하기가 벅차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네 성과를 더욱 증명해 보이거라. 금고와 관련된 후원은 후에 다시 생각하지.”

부탑주의 상속재산이 있지만 그건 누이의 재산이었다.

함부로 탕진하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었다.

“이 건은 최소한의 인원만 알아야 합니다. 시간이 생명입니다. 또한 모종의 거래를 통해 비용의 절반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도 안 돼. 그래도 터무니없이 비싸.”

바르곤은 다시금 서류 더미에 시선을 돌렸다.

바르곤이 느끼기에 빈첸도 약간 약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조금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돈을 주는 건 난데, 왜 네가 억울해하느냐? 이상한 일이구나.”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헤르카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일부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빈첸이 바짝 약이 오른 듯 말했다.

“그러면 제가 베르사 부인의 친필 추천서 같은 걸 받아온다면 어떻습니까?”

“허? 베르사 부인의 친필 추천서?”

베르사는 자식들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한 아덴카의 안주인이다.

데이아 공녀조차도 추천서를 받은 것이 2급 생도일 때였다.

바르곤은 허허- 웃었다.

“약이 많이 오른 모양인데, 그래서야 기약이 너무 없지 않느냐? 시간이 생명이라며?”

“받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보아라.”

“받아오면, 후원 약정서 써주실 겁니까?”

“그러지.”

“마나에 맹세해 주십시오.”

“맹세하고말고.”

그제야 빈첸이 웃었다.

“여기 있습니다. 베르사 부인의 친필 추천서.”

바르곤의 눈두덩이가 더욱 새까맣게 변했다.

* * *

바르곤은 후원 약정서에 사인하고서 빈첸에게 건네주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구나.”

“죄송합니다. 너무 급하여 편법을 썼습니다.”

“아니다. 얼른 처리하고 오거라.”

바르곤은 꾸벅 인사하고 멀어지는 빈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군.’

사실 성수 얘기를 들었을 때 바르곤도 혹했다.

지금의 비용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훗날 커다란 행운이 되어 돌아올 것 같다는 판단도 이미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빈첸의 제안을 좋게 들었고 빈첸이 어떻게 자신을 설득할지 무척 궁금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빈첸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강직하고 우직하기만 할 줄 알았더니.’

그래서는 강풍에 꺾인다.

때로는 저런 모습도 보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에 쏙 드는구나.’

결국 빈첸은 베르사와의 협상을 원만히 이끌어냈다.

베르사가 직접 관리하는 ‘흑(黑)’ 등급 보물 창고에 중간 관리인은 레일사 시종장이었다.

베르사의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바르곤 경이 후원하는 것으로 하되, 실질적인 후원은 제가 하는 방안은 어떠실지요?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바르곤은 한참 고민하다가 답장했다.

[말씀은 고마우나, 후원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답장을 받아 든 베르사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쉽게 되었구나.”

그 뒤에 시립한 시종장 레일사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좋은 투자의 기회를 놓쳤어. 너무 욕심부렸거든, 내가.”

둘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레일사였다.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

“빈첸 공자의 승급 추천서를 새로이 작성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지.”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베르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레일사의 몸이 움찔 놀랐다.

‘부인께서 진심으로 웃고 계신다.’

좀처럼 ‘진짜로’ 웃지 않는 베르사가 웃고 있었다.

레일사로서도 거의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건 말이야.”

베르사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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