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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76화 (76/184)
  • 환생의 정석 76화

    빈첸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끼고 빠르게 말했다.

    “저는 저들이 살았으면 합니다.”

    이곳에는 1급 신관 넬리우크와 2급 신관 멀린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을 걸지 않은 4급 보좌신관도 있다.

    이 셋이 합심하여 빨리 움직인다면 5명의 목을 다시 붙일 수 있다.

    “아직 저들은 살아 있군요.”

    “이유가 무엇이냐?”

    “저의 명예를 제 손으로 쟁취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빌린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베르사는 빙그레 웃었다.

    ‘단순히 그 이유는 아니겠지.’

    그녀 또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들은 모두 상급신관들.

    몸 안에 신성력 덕택에 목이 잘린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뿐, 저대로 두면 몇 초 내에 죽는다.

    “허락한다.”

    빈첸이 빠르게 말했다.

    “넬리우크 경, 둘란 경, 아이만 경. 부탁드립니다.”

    둘란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이내 넬리우크와 아이만 또한 신성력을 내뿜어 기적을 일으켰다.

    목이 잘린 신관의 목을 이어 붙이던 둘란은 깜짝 놀랐다.

    ‘절단면이 어찌 이리도 깨끗하단 말이냐.’

    베르사의 검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빠르고 깔끔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시 붙일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구나!’

    일부러 이렇게 손을 쓴 듯했다.

    목이 잘려도 살아날 수 있도록.

    ‘신관들을 위한 배려는 결코 아니겠지.’

    그녀는 아덴카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그녀의 배려는 아덴카와 빈첸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저들의 머릿속에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인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신관들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다.

    5명의 신관이 모두 되살아났고, 여전히 좌중은 침묵 상태.

    둘란과 아이만은 땀을 비오듯 쏟으며 반쯤 탈진했다.

    1급 신관인 넬리우크는 비교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넬리우크는 힘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됐군.’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덴카 장로원에라도 은혜를 입혀놓는 것이 나았다.

    넬리우크가 델백 장로의 떨어진 팔을 들어 올렸다.

    “델백 장로님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

    델백은 순간 갈등했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때, 빈첸이 입을 열었다.

    “델백 장로님은 훌륭한 무인이시니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내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델백과 넬리우크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

    빈첸이 델백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님?”

    “…….”

    델백 장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 이놈!’

    크게 분노했으나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 나의 왼팔이 네 진실의 증명이니.”

    “장로님의 의연한 모습을 마음에 깊이 새우고 배우겠습니다.”

    “…….”

    베르사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훌륭하구나.’

    신관들은 무인이 아니니 무인의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델백은 엄연히 아덴카의 장로다.

    무인에게는 무인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멀린은 베르사와 빈첸의 모습에 반쯤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빈첸, 네 말이 아니었더라도 델백 장로는 결코 팔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사는 신관의 목을 벨 때는 신경 하나 끊어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고 빠르게 베었다.

    덕분에 모두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델백 장로의 팔을 자를 때만큼은 아니었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뜨려놨으니.’

    근육과 신경을 잘게 찢어놓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마력회로를 영구적으로 손상시켜버렸다.

    ‘어쩐지, 베르사 부인은 빈첸에게서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저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여기서 끝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빈첸이 말했다.

    “제 진실의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빈첸은 델백 장로의 왼팔을 들어 베르사에게 주었다.

    델백 장로와 넬리우크 신관을 비롯한 그 누구도 반대의사를 내비치지 못했다.

    베르사가 빈첸의 결백을 인정했다.

    베르사가 델백의 왼팔을 넬리우크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그러하니, 넬리우크 경께서는 사건을 마무리하시지요.”

    넬리우크는 기겁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게 하지요. 빈첸 공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하고, 신전은 아덴카 측에 더 이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그런데 빈첸이 끼어들었다.

    “아직 저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기록된 영상을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빈첸이 범용 마정석에 마나를 불어넣어 다시 한번 영상기록을 불러왔다.

    -나의 할 일을 다 하였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음이다. 내게 와주어 고맙구나. 나의 후예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크게 감사할 것이다.

    넬리우크를 필두로 여섯 명의 신관들.

    그리고 둘란까지 일렬로 섰다.

    신관들은 은인을 대할 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하고 바닥에 입을 맞춘다.

    그것이 신관들의 경례였다.

    그들이 모두 무릎 꿇기 시작했다.

    “성왕의 전언을 전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이아는 빈첸 공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귀하에 공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바닥에 입을 맞추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귀 가문의 무궁한 발전과 신뢰를 기대하는 바이며, 가이아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덴카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갈 것입니다. 가이아 신전은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빈첸 공자.”

    그 모든 모습은 장로원을 기록하는 영상 기록석에 저장되었다.

    베르사가 종을 울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오늘 있었던 모든 기록을 내어 대기하고 있는 소식지 기자들에게 전하도록.”

    델백이 크게 소리쳤다.

    “안 될 말입니다!”

    오늘 델백 장로의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베르사와 빈첸이었다.

    저 둘이 돋보이는 자리.

    델백 장로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장로원이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델백은 이를 악물었다.

    ‘독사 같은 것!’

    베르사의 속셈은 뻔했다.

    이번 사건을 빌미로 베르사 자신의 능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것이다.

    ‘아덴카는 대대로 장로원의 것이었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그런데 베르사가 등장하면서 얘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베르사는 너무 유능했고, 장로원 입장에서 유능한 2인자는 필요 없었다.

    “장로원 내에서 벌어진 일을, 장로원의 허가 없이 송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부인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율법을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빈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송출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

    “제가 알기로 장로원에서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아덴카의 공익과 명예에 극히 이로운 경우에는 반출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번 경우는 누가 보아도, 아덴카의 공익과 명예에 극히 이로운 경우였다.

    빈첸이 델백과 눈을 마주쳤다.

    기백에서는 델백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아덴카의 공익에 얼마나 이로운지,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 * *

    넬리우크는 죽을 맛이었다.

    신전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하여 데려온 소식지의 기자들이 되레 자신들의 가슴에 비수를 푹푹 꽂고 있었다.

    장로원 내에서 있었던 일은 대륙 전체에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관들 목이 다섯이나 잘렸는데도, 신관들은 아덴카에 경례했다던데?”

    “에이 설마. 진짜 그랬으려고?”

    “진짜야. 영상도 존재한대.”

    영상이 지나치게 잔혹한 나머지 원본이 외부로 공개되지는 못했다.

    “마법가공을 해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이야.”

    “헐. 목이 잘리고도 그렇게 감사인사를 했단 말이야? 무릎을 꿇고 바닥에 입을 맞췄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호된 꼴을 당하고도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경례했다니.

    “그만큼 아덴카의 힘과 7공자의 업적이 대단했던 거겠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어 아덴카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던 가이아 사절단의 작전은 완벽히 실패했다.

    “그런데 베르사 부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해?”

    “그렇겠지. 영상기록을 아무리 천천히 돌려봐도 검 휘두르는 게 안 보이잖아.”

    베르사는 현역 무인에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고, 대중들은 베르사에 대해 잘 몰랐다.

    베르사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아덴카의 내정을 다스리는 데에 치중했으니까.

    “그럼 도대체 아덴카의 1인자라는 가주는 얼마나 강한거야?”

    “그거야 모르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덴카는 가이아와의 정치적 관계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또한 빈첸의 명성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베르사는 자신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가주 칸의 능력이 재조명되면서 아덴카의 위상 자체가 높아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나의 행동으로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았구나. 훌륭한 계책과 판단이었다. 너를 다시 보았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베르사는 피식 웃었다.

    빈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 후면 가주께서도 복귀하실 것이다. 내 직접 네 소식을 전하마. 무척 좋아하실 것 같구나.”

    칸은 대륙 동부에 나타난 대마물과 마물 군단을 토벌하기 위하여 홀로 떠난 상태.

    빈첸은 속으로 말했다.

    ‘율리안! 가만히 좀 있어라.’

    율리안과의 연결이 깊어진 상태.

    빈첸의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지는 환상이 보였다.

    베르사에게 인정받은 것.

    그리고 베르사가 직접 가주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한다는 그 사실이, 율리안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헤헤, 헤헤헤헤, 히히히히히, 후히히히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율리안은 좀처럼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빈첸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더 좋은 모습 보이겠습니다.”

    베르사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서랍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승급 시험을 위한 추천서다.”

    “전에 주신 것은…….”

    “그건 폐기 하거라.”

    예전 썼던 추천서보다 더 진일보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헤르카에게 전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새로운 추천서를 받았다.

    그날 밤,

    빈첸은 둘란을 찾았다.

    “둘란 신관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

    “선물이요?”

    성배를 내밀었다.

    “이, 이건!”

    “네. 성왕의 유품이죠. 성왕의 힘을 계승한 신관님께 어울리는 물건인 것 같네요.”

    “저,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빈첸 공자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신기가 필요한 몸입니다.”

    성배는 둘란을 위한 선물임과 동시에, 빈첸 자신을 위한 안배이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신기가 필요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선물을 받아주세요.”

    “……그런 이유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성왕의 유품은, 성왕의 힘을 계승한 둘란에게 정통성을 부여해 줄 것이었다.

    또한 빈첸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드는 셈이었고.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선물이었다.

    “빈첸 공자를 위해 성수를 가득 채워놓도록 하지요.”

    “둘란 신관님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친구라는 말이 무척이나 기뻤다.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귀히 쓰겠습니다.”

    성배를 받아든 둘란의 몸이 휘청거렸다.

    빈첸도, 둘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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