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75화 (75/184)
  • 환생의 정석 75화

    넬리우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다물었다.

    ‘저게 뭐야?’

    저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나의 할 일을 다 하였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음이다. 내게 와주어 고맙구나. 나의 후예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크게 감사할 것이다.

    -그대의 앞날을 축복한다.

    의심할 여지 없는 성왕의 전언이었다.

    넬리우크의 보좌신관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작된 것 아닙니까?”

    빈첸은 빙그레 웃었다.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빈첸이 아공간을 열어 성배를 꺼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

    넬리우크는 입을 열지 못했다.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성배!’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전설 속 유물이었으나 성배에는 강력한 신기(神氣)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절단의 대표로 와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을 지지해 주는 세력을 볼 낯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인정하면 완전한 패배다.

    어떻게든 흠을 잡아서 빈첸을 깎아내려야 했다.

    결국 넬리우크가 입을 열었다.

    “영상 자체는 조작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상황은 조작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성왕의 대역을 구해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는 말인가요? 제가 제출한 성배 또한 가짜 유물이고요.”

    “그럴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질세라 델백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측에서는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이군요.”

    “델백 장로님께서 이해하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상당히 혼란스럽군요. 아무래도 저희에게 시간을 조금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안이 무척 중한 일이니 그러도록 합시다.”

    “일단 성배의 진위를 판별해야 할 듯합니다. 다음 논의는 그 이후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배를 저희에게 넘겨주시지요.”

    델백 장로도, 넬리우크 신관도, 일단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듯했다.

    베르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유심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시간을 끌면 네게 불리해질 것이다. 성배를 넘겨주면 더욱 불리할 것이고.’

    저들은 없던 증거도 만들 것이고, 없는 증인도 창조할 것이다.

    가져간 성배를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

    ‘자. 너는 어찌할 테냐?’

    빈첸이 말했다.

    “저의 진실은 8성 무인 멀린 경께서 공증하여 주실 것입니다.”

    빈첸은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멀린의 지장이 찍혀 있는 공증서였다.

    “멀린 경께서는 공증을 위하여 자신의 목을 걸었습니다.”

    델백 장로는 인상을 찡그렸다.

    비록 좌천되었다지만 한때 아덴카 12검 중 한 명이었다.

    멀린의 이름값은 무척이나 높아서, 아덴카의 수많은 무인들이 멀린을 존경하고 있었다.

    융통성이 없고 고분고분하지 않아 장로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이기도 했다.

    델백 장로가 말했다.

    “멀린 경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것이 공자의 증거가 되지는 않아.”

    “알고 있습니다.”

    빈첸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제가 거짓으로 연출한 상황이라면, 저 또한 제 목을 걸겠습니다.”

    “…….”

    “넬리우크 신관님께서는, 제 거짓에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단체와 단체의 일이다.

    모든 일에는 ‘격’이 맞아야 한다.

    진실에 두 명의 목숨값이 걸렸으니, 거짓에도 그에 준하는 무엇인가가 걸려야 했다.

    당황한 넬리우크는 은근슬쩍 한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베르사가 손을 들었다.

    “저도 아덴카의 어머니로서, 빈첸의 진실에 나의 오른팔을 걸겠습니다.”

    “베, 베르사 부인!”

    “델백 장로는 왼팔을 거십시오.”

    순간, 좌중에 침묵이 깔렸다.

    왼팔을 거십시오.

    이것은 명백한 명령이었고 델백 장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이내 베르사를 노려보았다.

    “그러지요. 베르사 부인은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델백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회의장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 *

    새로운 신관 한 명이 아덴카로 파견되었다.

    2급 신관 둘란이었다.

    둘란은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곧바로 아덴카의 본가를 찾았다.

    2차 협상의 장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2급 신관 둘란입니다. 베르사 부인을 비롯하여 델백 장로님. 휘하 보좌관님들. 장로님과 보좌관님들. 그리고 빈첸 공자와 멀린 경. 넬리우크 신관님과 여러 신관 선배님들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끝낸 뒤,

    둘란은 성배를 받아들었다.

    오래 관찰할 것도 없었다.

    ‘신기의 흔적’을 곧바로 읽어냈다.

    “진품이군요. 성배는 물론이거니와.”

    둘란이 빈첸을 가리켰다.

    “빈첸 공자의 존재가 곧 강력한 증거입니다.”

    넬리우크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냐!’

    사람들의 시선만 없었다면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다만, 말 자체는 신중하게 했다.

    “둘란 신관은 신전 측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여 신중히 말을 이어가도록 하라.”

    “넬리우크 경은 분명 뛰어난 신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빈첸 공자의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강력한 신기를 읽어내었을 것입니다.”

    넬리우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둘란!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증거를 눈으로 보고서도 모른 척한 것 아닙니까?”

    둘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신관들의 행태에 분노했다.

    “여러 신관 분들 역시 빈첸 공자의 신기를 읽어내었을 것입니다!”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는구나. 우리가 일부러 빈첸 공자를 모함이라도 한단 말이냐? 명예 신관들의 지지를 받는다 하여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느냐?”

    넬리우크의 보좌관 중 한 명.

    미켈리온 2급 신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냐, 네가 빈첸 공자가 친분이 깊다지. 무슨 더러운 뒷거래를 한 것이냐?”

    “더러운 뒷거래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미켈리온 신관님.”

    “흥, 뒷거래가 아니고서야 어찌 보자마자 진품임을 감정하고 빈첸 공자의 편을 들 수 있는 거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너는 넬리우크 경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에 불과해.”

    둘란은 비교적 차분한 눈으로 넬리우크와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잔떨림이 멈추었다.

    “저는 그동안 넬리우크 경을 선배라고 생각해 왔고, 선배로서 대접해 왔습니다.”

    “둘란! 입을 다물어라!”

    대신관 경쟁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어도 훌륭한 대신관 후보들은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가이아 신전은 너무 부패했다.

    ‘6명의 보좌관 중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젊은 날,

    둘란이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랐던 선배 넬리우크는 여기 없었다.

    돈과 권력에 취한 돼지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때,

    빈첸과 둘란의 눈이 마주쳤다.

    빈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3일 안에 성배가 진품이라는 사실을 완벽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저는 빈첸 공자의 진실을 공증할 것입니다. 빈첸 공자의 진실에 제 신관직을 걸겠습니다. 신관님들은 무엇을 걸겠습니까?”

    미켈리온 2급 신관은 순간적으로 계산을 끝냈다.

    그가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내 목을 걸겠다!”

    그는 뛰어난 처세술로 2급 신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일부러 ‘목을 걸겠다’라고 말했다.

    ‘우리와 아덴카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아덴카에서 내 목을 정말로 베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넬리우크 경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

    6명의 보좌관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했다.

    “나도 목을 걸겠소.”

    “나도 목을 걸겠습니다.”

    6명 중 5명이 목을 걸었다.

    어차피 요식행위로 끝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차 회의가 끝났다.

    * * *

    그날 저녁.

    둘란이 빈첸의 방에 찾아왔다.

    “오늘부터는 저도 대신관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빈첸은 둘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신전에 크게 실망했다는 사실도.

    빈첸이 넌지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외로운 싸움이 되겠네요.”

    “…….”

    “그렇지만 잘해내실 것이라 믿습니다.”

    둘란은 빈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말이었으나, 둘란에게 적잖은 응원이 되었다.

    빈첸이 피식 웃고서 본론을 꺼냈다.

    “3일 안에 완벽하게 증명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법이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빈첸 공자는 신기가 필요한 특이 체질입니다. 그래서 성배를 찾으려 했던 것이고. 제 말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지금 빈첸 공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신기의 양은 일반적인 양이 아닙니다. 보통 그 정도 신기를 축적하면 본인의 몸이 파괴됩니다.”

    신기는 곧 신성력이다.

    이 힘은 사람을 치유하고 소생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이 사람의 몸 안에 정체되어 있으면, 오히려 사람을 죽인다.

    “그렇기에 신관들은 좋으나 싫으나 끊임없이 신성력을 베풀며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성력을 가진 신관의 숙명이지요.”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빈첸 공자는 누군가를 치유하기 위하여 신성력을 내뿜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신기가 빈첸 공자를 해치지 않고 있다는 건, 제가 모르는 신기 해소방법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율리안이 킥킥 웃었다.

    -저 신관님, 똑똑하네요.

    둘란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는 건 빈첸 공자는 신기를 계속해서 소모하고 있다는 뜻이고, 언젠가 신기가 필요할 날이 오겠지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둘란이 성배를 받아들었다.

    “이 성배가 진짜 성배라면.”

    ‘성배’는 ‘신기’를 담는 잔이다.

    신성력을 사용하여 성배에 신성력을 뿜어냈다.

    성배가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둘란이 신성력을 쏟아붓자 성배 안에 이슬 몇 방울이 맺혔다.

    “이렇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성배에 담긴 것은 분명한 성수였다.

    무인(베르사)의 눈으로 본 성배는 그저 골동품이었으나, 신관이 갖게 된 성배는 성수를 만들어내는 기물이었다.

    둘란이 활짝 웃었다.

    “이보다 완벽한 증거는 없겠지요.”

    * * *

    3일 후.

    다시 한번 사절단과 장로원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둘란이 성수가 담긴 성배를 내밀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이런 모조품이 존재하겠습니까? 혹은 빈첸 공자가 이런 모조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넬리우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기랄!’

    넬리우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은 바들바들 떨렸으나 이쯤 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증거가 지나치게 명확했다.

    베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온화했다.

    “넬리우크 경은 성배가 진품임을 인정하시나요?”

    “……일단은 그러합니다.”

    “다른 보좌관분들 그러하신지요?”

    다들 입을 다물었다.

    다만, 미켈리온 2급 신관이 억지를 부렸다.

    “흥! 나는 인정할 수 없소!”

    “그대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르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푸악!

    피가 솟구쳤다.

    비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데구르르.

    미켈리온 2급 신관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미켈리온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눈을 꿈뻑꿈뻑 깜빡였다.

    델백 장로가 놀라 소리쳤다.

    “베, 베르사 부인!”

    소리치던 그 순간,

    피분수가 피어오르며 델백 장로의 왼팔도 땅에 떨어졌다.

    델백 장로 또한 아덴카의 장로였고, 수많은 실전을 치른 무인이었으나 베르사의 검을 읽어내지 못했다.

    “크아악!”

    순간,

    귀기 어린 바람이 불었다.

    베르사의 얼굴에 피가 몇 방울 튀었다.

    베르사는 천으로 피 묻은 검을 닦아냈다.

    어느새,

    바닥에는 5개의 목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제 스스로 빈첸의 거짓에 목을 건 자들이었다.

    “나는 아덴카의 어머니로서.”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청명한 검명이 울렸다.

    “내 아들 빈첸의 진실 된 명예를 존중합니다.”

    ‘내 아들 빈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안은 두려움과 창피함을 모두 잊고 엉엉 울었다.

    -후에에에엥! 형님도 들었죠? 나보고 아들이랬어요! 아들이라고 했다고요! 후에에엥!

    베르사가 자리에 앉았다.

    장로의 어깨와 신관의 목 5개를 일순간에 베었으나 그녀의 호흡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넬리우크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고요가 내려앉은 이 공간의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빈첸이었다.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빈첸의 개입으로 인해 베르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