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4화
빈첸이 꺼내 든 것은 세리가 전해주었던 부적석.
그러니까 범용 마정석이었다.
“멀린 경이 제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세리가 한달음에 달려와 전해주었지요. 그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다각도로 쓰일 수 있는 범용 마정석입니다.”
저번에 세리는 부적석이라 부르며 마나를 불어넣어 반짝반짝 빛을 냈었다.
범용 마정석은 영상을 기록하는 기록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영상 안에 한 남자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으라.
베르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저 노인이 ‘성왕’의 잔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의 할 일을 다 하였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음이다. 내게 와주어 고맙구나. 나의 후예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크게 감사할 것이다.
-그대의 앞날을 축복한다.
이것은 명백히 성왕의 전언이었다.
성왕이 직접 빈첸에게 고맙다고 하였고, 후예들이 있다면 감사할 것이라 얘기했다.
성왕의 전언이 담겼으니 신전의 사절단은 아덴카에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성왕의 전언을 부정하는 것은 곧 가이아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고맙다, 율리안.’
빈첸은 ‘멀린’과 ‘세리’의 도움만 언급했으나, 이에는 사실 한 명의 도움이 더 있었다.
-흥, 이 정도는 기본이죠. 고맙다고 할 것도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율리안은 지금 굉장히 우쭐대고 있었다.
율리안은 빈첸이 성수를 마시는 그 순간, 곧바로 ‘성왕의 무덤’의 이변을 눈치챘다.
그래서 신기(神氣)를 다량 소모하여 영향력을 끼쳤다.
예전, 존재를 걸고 방울을 울렸을 때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범용 마정석으로 영상을 기록한 것은 빈첸이 아니라 율리안이었다.
‘그렇게 신기를 남발해도 되는 것이냐?’
-어차피 제가 다 흡수 못 할 만큼 많은 양이었어요.
율리안 입장에서는 잉여 신기였다.
잉여 신기를 활용하여 영향력을 끼쳤고, 그 결과물이 저 영상기록이었다.
베르사는 별다른 말 없이 종을 울려 서기관을 호출했다.
“해당 영상을 전문기록 영상석으로 다시 기록하라. 또한 빈첸이 가져온 범용 마정석 원본을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조치를 취하도록.”
“이, 이것은……!”
서기관은 깜짝 놀랐다.
베르사가 차분히 물었다.
“조작의 흔적이 있는가?”
“이, 이건 범용 마정석으로 기록한 기록석입니다. 정교한 조작은 불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범용 마정석으로 이런 영상을 조작하여 구현할 수는 없다.
서기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책에만 남아 있던 성왕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빈첸 공자님이 무덤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군요.”
“이 영상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성왕의 무덤은 소명을 다하고 순리에 따라 스스로 무너진 것이겠지.”
사실은 사미온이 개입이 있었던 것이었으나 그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지금은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가장 나았다.
“노여움은 좀 가라앉으셨습니까?”
베르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주 고약한 성미를 지녔구나. 이것부터 보여주었으면 되었을 것을.”
“어머니께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본래 가장 자랑하고 싶은 건 뒤로 미루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말하는 걸 보아하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인상은 찡그리고 있었으나 베르사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 자랑하고 싶다는 건 핑계일 테고.”
베르사는 상벌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베르사가 먼저 지레짐작으로 빈첸에게 화를 내었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해야 했다.
그것이 베르사의 방식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신전 사절단과의 협상에 저도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베르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장로들이 그것을 허락할 것 같으냐? 신전 사절단의 대표가 누군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알고 있습니다. 1급 신관 넬리우크 경께서 오신다 들었습니다.”
“1급 신관이 사절단으로 온다. 네가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것은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가문과 신전.
그러니까 단체와 단체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누가 오느냐에 따라 그 ‘격’을 동등하게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넬리우크 경이 노발대발할 것입니다. 또한 장로들도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겠지요.”
“잘 알고 있구나.”
“그러나 어머니라면 가능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베르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서렸다.
간만에 즐거운 일이 생겼다.
“넬리우크 신관과 장로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하군.”
* * *
빈첸의 생각은 정확했다.
가이아 신전은 ‘성왕의 무덤’을 성스러운 유적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놓고 언급하지 않을 뿐, 그곳은 사실상 계륵 같은 곳이었다.
가이아의 2급 신관 둘란이 말했다.
“천천히 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사고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빈첸 공자가 일부러 성왕의 무덤을 무너뜨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1급 신관 넬리우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둘란과 대신관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신관이었고, 둘란의 선배이기도 했다.
“둘란 신관은 지나치게 무른 생각을 하고 있군. 우리에게 이유가 중요하다고 보는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빈첸 공자가 성왕의 무덤을 무너뜨려 신전의 재산을 파괴했다는 결과였다.
그는 원탁 회의에 모인 상급신관들을 둘러보며 자신 있게 얘기했다.
“저희는 아덴카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500년간 아덴카와 저희 가이아는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깊은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이아에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헌금과 봉사를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아덴카에게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아덴카의 콧대를 눌러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와 우호 관계에 있는 무가(武家)들 중 아덴카만큼 저희에게 고개가 빳빳한 자들이 또 있습니까?”
아덴카와 가이아는 우호 관계이며 거의 평등한 관계였다.
가이아의 상급 신관들 중 일부는 이 ‘평등한 관계’가 불만이었다.
대다수의 무가들이 신전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아덴카는 유독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까.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저희 가이아가 아덴카의 우위에 올라서게 만들 수 있습니다. 헌금과 보상은 별개로 말입니다. 저희는 수많은 소식지 기자들을 대동할 것입니다. 협상의 자리를 공식적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실상이야 어찌 됐든 대중들은 가이아가 아덴카를 무릎 꿇렸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상징성이 있지요.”
그가 숨을 들이마신 뒤 말을 이었다.
“저희 교단의 힘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신관들의 눈이 빛났다.
교단의 확장.
그것은 엄청난 헌금과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둘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헌금 중 대다수가 당신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겠지!’
저들에게는 이번 사건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성왕에 대한 예우와 애도.
신관으로서의 명예와 사명.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원탁회의의 결과에 따라, 넬리우크 경을 사절단으로 파견한다.”
결국,
넬리우크가 사절단의 대표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원탁 회의가 끝난 뒤 넬리우크는 둘란의 어깨를 토닥였다.
“성왕의 힘을 계승했느니 어쨌느니 할 때에는 기분이 좋았지?”
그는 신관이지만 성왕의 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란이 말하는 ‘밝은 빛’ 이라든가 ‘안목’ 같은 것도 믿지 않았다.
“선배님께서는 실수하시는 겁니다.”
“실수는 무슨.”
넬리우크가 피식 웃었다.
“아덴카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거야. 우리에게 헌금할 수밖에 없다고. 이번 일을 잘 끝내면 나의 신망과 지지는 더욱 높아질 거다.”
“…….”
“은퇴한 명예신관 늙은이들이 아무리 너를 지지하고 밀어줘도, 결국 대신관은 내가 될 거란 말이야.”
그는 기분 좋게 웃은 뒤 멀어졌다.
둘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넬리우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이 또한 당신의 뜻입니까?’
* * *
아덴카의 장로 델백은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자였다.
그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베르사 부인. 부인께서는 부인의 말에 반드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1급 신관 넬리우크와의 협상 자리.
그곳에 빈첸 같은 애송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것이 아덴카 장로원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지요.”
베르사가 가볍게 웃었다.
“그 아이가 아덴카로서의 명예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제가 직접 목을 베겠습니다, 델백 장로.”
“부인께서 그렇게까지 공증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베르사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빈첸의 목을 베어주길 바라는군.’
장로원 입장에서 빈첸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대다수의 장로들은 이미 다른 후계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빈첸이 최근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중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장로원에서 돌아온 베르사는 빈첸에게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신전은 물론이고, 델백 장로 역시 어떻게든 흠을 잡아 빈첸 너를 깎아내리려 들 것이다. 네 편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함께하고 싶으냐?”
“물론입니다.”
결국 빈첸은 넬리우크와 아덴카 장로원의 만남에 함께하게 되었다.
베르사와 델백 장로를 필두로 하여, 델백의 보좌관들이 일렬로 앉았다.
그 반대편에 1급 신관 넬리우크를 비롯하여 넬리우크의 일행들이 앉았다.
넬리우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저희의 오랜 친우인 아덴카를 찾게 되어 저희도 몹시 유감입니다만, 아덴카의 장로들께서는 이번 사안의 엄중함을 진작에 알고 계실 테니 많은 말은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빈첸 공자의 탈선으로 인하여 가이아는 성스러운 유적지를 잃어 매우 통탄스러운 심정입니다.”
끝자리에 앉은 빈첸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일부러 ‘아덴카의 장로들’이라고만 표현하였다.
빈첸은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발언이군.’
빈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회의를 주최하고 있는 델백 장로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었다.
신관들 앞에서 빈첸에게 호통을 치려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빈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델백 장로의 기세에 주눅들 만큼 빈첸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경애하는 1급 신관 넬리우크 경께서 아덴카의 안주인이신 제 어머니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넬리우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델백 장로의 얼굴에도 경악이 서렸다.
‘저, 저놈이?’
그들이 예상했던 빈첸의 반응과는 너무 많이 달랐다.
빈첸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것을 원한 건 아니었다.
델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중하게 사과를 드려도 모자랄 판에 그 무슨 망발인가, 빈첸 공자!”
“망발인지 아닌지 이 자리에서 증명하지요.”
빈첸이 베르사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의 상급자가 베르사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베르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걸었다.
좌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제게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모여주신 귀빈 여러분께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델백 장로를 비롯한 장로원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덴카 7공자. 빈첸입니다.”
빈첸이 품속에서 영상이 기록된 마정석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