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73화 (73/184)
  • 환생의 정석 73화

    멀린이 페일커 검식 ‘벽력종절’을 사용하기 직전.

    헤르카는 진작부터 무덤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뇌력의 기운을 읽어내고 있었다.

    ‘아까도 강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계를 부수고 들어가는 그때에도 뇌기가 상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헤르카는 저도 모르게 채찍형 독문무기 ‘독사’를 꺼내 들었다.

    “와, 나 이거 왜 꺼냈어?”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린의 강맹한 뇌력에 몸이 절로 반응해 버렸다.

    헤르카는 ‘성왕의 무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한 부분에서 뇌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작은 통로가 있는 것처럼.

    “왠지 말이야.”

    그곳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도 주어진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말하자면 이건 운명 같은 느낌이었다.

    멀린이 ‘벽력종절’을 사용하던 그 순간.

    ‘으악!’

    헤르카는 황급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마어마한 뇌전이 땅에서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통구이 되겠다!’

    그 순간,

    빈첸의 몸이 높이 뜬 것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저만치 아래 멀린이 보였다.

    헤르카가 본 멀린은 뇌력거인 그 자체였다.

    그 짧은 찰나, 헤르카는 본능적인 판단을 내렸다.

    퀘벨 비편술 제13식.

    금나편살(擒拿鞭殺).

    헤르카의 채찍, 공간을 격하여 움직였다.

    채찍의 이름은 독사.

    ‘내 비편술(飛鞭術)이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일 줄이야.’

    뱀이 사냥감을 옥죄듯, 헤르카의 채찍이 멀린의 몸을 감쌌다.

    ‘엄청난 반탄력이야.’

    멀린이 딱히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헤르카의 손이 저릿저릿했다.

    ‘시간이 부족한데.’

    끌어올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빈첸은 빠져나왔고 통로는 순식간에 닫힐 것이다.

    직접 멀린을 들어 올릴 시간은 없다.

    힘도 부족했다.

    그러면 다른 외력을 이용해야 했다.

    ‘여기다!’

    멀린이 뿜어낸 가공할 만한 뇌력 때문에, 고압 공간이 생성되었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면서 폭발적인 상승기류가 생성되었다.

    ‘허리가 두 동강 나지는 않겠지?’

    퀘벨 비편술 13식 ‘금나편살’은 본래 살상편술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채찍으로 휘감아 옥죄어, 결국 절단해 버리는 기술.

    그러나 상황이 급해서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있는 힘껏 멀린을 들어 올렸다.

    폭발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상승기류에 멀린의 몸을 맡겼다.

    멀린의 몸이 붕 떴다.

    ‘됐다!’

    멀린의 몸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출구는 완전히 닫혀버렸다.

    멀린의 몸이 높이 떴다.

    이내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멀린의 허리 부근에서는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헤르카의 방해(?)로 마력이 역류한 멀린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헤르카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와, 심상 터지는 줄 알았네.”

    뇌기를 뚫고 멀린을 건져 올리느라 상당히 무리했다.

    심상이 터질 뻔했다.

    “삭신이 다 쑤시잖아.”

    끙차,

    헤르카는 멀린을 질질 끌어 나무 그늘 아래로 옮겼다.

    이내 빈첸도 끌어와서 멀린 옆에 눕혔다.

    멀린과 빈첸의 입안에 치유 포션을 흘려 넣었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요양원 보호사도 아니고.”

    사이좋게 기절한 사제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멀린 경의 힘이 놀라운 건 맞는데.”

    그 가공할 만한 힘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 힘은 분명히 경악스러운 힘이었다.

    “근데 솔직히 빈첸이 더 놀랍네.”

    멀린이 보여준 무위는 8성의 무위였다.

    놀랍기는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이 오빠야 원래 괴물이니 그렇다 치는데, 너는 방금 도대체 뭘 한 거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일사의 초기 특성 중 하나였던 설상 걸음에, 뇌기를 덧입혀 사용한 것 같았다.

    “패서 깨울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아서 당장에라도 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는 못했다.

    “복귀 늦으면 바르곤 경이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헤르카는 투덜거리면서도 4일 밤낮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잠 한 번 자지 않고,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멀린이 깨어났을 때, 헤르카가 말했다.

    “졸려 죽겠어요. 좀 잘 테니 깨워줘요.”

    그러고서 곧바로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멀린은 잠든 헤르카와 빈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 있구나.’

    괜스레,

    빈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페일커의 이름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려 했는데,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빈첸의 말이 다시 한번 메아리쳤다.

    -내게는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사명이 생길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 * *

    많은 소식지에서 ‘성왕의 무덤’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앞다투어 전했다.

    [유적지 파괴의 주범은 누구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지를 파괴한 자가 빈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빈첸 공자의 기행인가 사고인가.]

    가이아 신전은 성스러운 유적지가 파괴된 것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했다.

    [성왕의 무덤이 파괴된 것은 심히 비통한 일입니다.]

    가이아 신전은 이번 사건을 무겁게 바라보고 있으며, 빈첸의 가문인 아덴카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빈첸은 아덴카의 본가로 돌아왔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 레일사가 찾아왔다.

    “베르사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레일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빈첸을 힐끗 쳐다보았다.

    레일사는 빈첸이 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인 걸음을 전수해 준 레일사이기에, 빈첸의 변화에 민감했다.

    ‘설상 걸음의 흔적이 느껴진다.’

    레일사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뒤쪽으로 몰래 기감을 퍼뜨려 빈첸의 걸음걸이를 느껴보았다.

    ‘겨우 반년 만에 설인 걸음을 상위 특성으로 변환시켰어.’

    아무리 멀린이 도와주었다고는 해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세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뇌력이 깃들었다?’

    레일사는 빈첸에게 설인 걸음을 전수해 주었음과 동시에 멀린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둘의 기운에 모두 익숙해서 빈첸에게 일어난 변화를 더욱 쉽게 알아차렸다.

    그 흔적에는 미미하게 뇌력의 기운이 깃들어져 있었다.

    ‘기존의 것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특성을 창조한 것인가.’

    앞서 걷는 레일사의 눈동자에 진중함이 깃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아주 미세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차갑게 말했다.

    “공자님. 베르사 부인께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신 건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

    “부디 좋은 대처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빈첸과 레일사는 베르사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베르사가 노크했고 ‘들어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사가 집무실의 문을 열어준 뒤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멀어졌다.

    “꽤 시끄러운 일을 벌였더구나.”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항의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베르사는 붉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빈첸에게 향했다.

    빈첸은 그 눈빛에 그리 주눅 들지 않고서 말했다.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일반적인 보고는 생략해도 될까요?”

    “일반적인 보고를 생략한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보고도 있느냐?”

    “저는 그곳에서 성배를 얻었습니다.”

    빈첸은 빈 잔을 내밀었다.

    “이것입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골동품이구나.”

    성배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성배 안에 담긴 성수가 특별한 것이었다.

    성수는 빈첸이 모조리 마셨고, 덕분에 율리안의 신기가 대폭 회복되었다.

    “네가 성배를 얻은 것은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이번 네 원정은 우리와 깊은 우호관계인 가이아 신전의 유적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유와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가 중요했다.

    빈첸이 ‘성왕의 무덤’을 붕괴시켜버렸다는 결과 말이다.

    “500년간 유지되어왔던 유적지를 파괴했다.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려 하느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베르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아덴카가와 가이아 신전의 정치적인 관계를 뒤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보아라.”

    빈첸은 직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문책의 자리가 아니었다.

    아덴카의 2인자 베르사가, 아덴카의 7공자에게 내리는 시험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제게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

    “애초에 그들은 [성왕의 무덤]에 대한 애착이 없던 집단이니까요.”

    만약 성왕의 무덤이 그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곳이었다면, 출입증을 돈 받고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교단의 추천’이라는 것은 헌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빈첸의 눈으로 본 ‘성왕의 무덤’은 방치된 곳에 가까웠다.

    이름만 성스러운 유적지였지, 실상은 버려진 무덤이었다.

    “신념을 가진 신관들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을 탐사하였을 것입니다.”

    빈첸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있었다.

    아슬란의 안배 또한 존재했다.

    덕분에 그곳에서 성배와 작은 지팡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제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을, 왜 그들은 찾지 못했을까요?”

    심지어 사미온조차 그곳에 작은 대비를 해놓았다.

    신전이 ‘성왕의 무덤’에 진심이었다면, 성배는 빈첸이 아닌 누군가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왕의 무덤]은 계륵이었습니다.”

    역사 깊은 유적이니 관리는 해야 한다.

    관리에는 시간과 돈이 든다.

    그러나 이 유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

    “그러니 그들은 저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궤변을 펼치는구나. 신전이 직접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있더냐?”

    베르사도 빈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신전의 실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이 공식적인 사절단을 보내는 이유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결국 두 개였다.

    아덴카의 관계에서 권력적 우위.

    헌금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보상금.

    그러나 신전의 입으로 그걸 말한 적은 없다.

    공식적으로는, ‘성왕의 무덤’은 성스러운 유적지가 맞았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네 대답이 이것뿐이라면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구나.”

    베르사는 빈첸에게 묘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빈첸이라면,

    무언가 특별한 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신전의 항의 사절단과의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패를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내 착각이었나.’

    빈첸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했었나.

    경험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나.

    그녀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돈과 권력입니다.”

    “그래. 너는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그럴듯한 명분까지 쥐어준 것이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느냐?”

    빈첸이 씨익 웃었다.

    이제는 때가 왔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