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2화
헤르카는 멀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멀린의 강맹한 기세를 읽어냈다.
“누가 8성 무인 아니랄까 봐.”
‘성왕의 무덤’에 남겨진 주요 결계는 대부분 해금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 듯했다.
멀린은 뇌력을 뿜어내며 통째로 부수며 진입하고 있었다.
“박력 터지네. 저렇게 결계 부숴버리는 것도 가능하구나.”
그녀는 대대로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를 맡아왔던 퀘벨가(家)의 1인 전승자였다.
그녀에게는 나면서부터 지니고 태어난 사명이 있었다.
‘사명 같은 거 관심 없었는데.’
머리로는 그랬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진짜로 성왕의 무덤을 찾아가는 아덴카가 나타날 줄이야.’
퀘벨가의 기록에 따르면 누군가 성왕의 무덤을 찾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진실을 바로잡을 것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그게 설마 빈첸은 아니겠지?’
그녀의 아버지는 그 사명이 ‘퀘벨의 피에 새겨진 사명’이라 가르쳐주었다.
‘에이 설마.’
설마설마 싶다가도,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여지껏 빈첸이 보여준 행보가 상당히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그 까다로운 바르곤 경의 마음도 훔친 것 같고.’
여전히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진실을 바로잡을 자가 나타나면, 그곳에서 페일커는 죽는다고 했다.
헤르카는 과거를 회상했다.
‘참 신기했지.’
어린 시절 헤르카는 피에 새겨진 사명의 존재를 아예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멀린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사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혹시 페일커?
멀린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벨의 헤르카는, 페일커의 멀린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건 멀린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요새의 딸인가.
서로가 서로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들의 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명이 담겨 있다는 것을.
-진짜 성왕의 무덤에서 죽어요?
-진실을 좇는 자가 나타난다면 죽겠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건만, 둘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치겠네. 아빠가 말하던 게 진짜잖아. 언젠가 저절로 깨달을 거라더니.
-…….
순간,
지면이 흔들렸다.
헤르카는 회상을 끝내고 성왕의 무덤 입구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멀린 경은 여기서 죽겠지.’
기록에만 그렇게 적혀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헤르카는 멀린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치 멀린을 처음 만났을 때 직감적으로 페일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그래. 여기서 죽을 거야.’
아쉬웠다.
제법 괜찮은 사내였는데.
헤르카는 품속에 국화꽃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도로 집어넣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헤르카는 씨익 웃었다.
“피에 각인된 사명이고 나발이고.”
마나를 일으켜 국화꽃을 불태워버렸다.
“살아 돌아와요.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죽는 건 억울하잖아.”
* * *
빈첸이 붉은 요새에서 수련하는 동안, 멀린은 좋은 스승이 되어주었다.
어제까지의 멀린은 스승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멀린은 스승이 아니라 한 명의 페일커였다.
멀린 페일커는 평소와 달리, 빈첸에게 존대를 사용하며 빠르게 말했다.
“이 기둥은 성왕의 무덤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 와중에도 천장은 계속 흔들렸다.
“기둥을 베어내면 아주 잠깐이지만 틈이 생길 것입니다.”
거대한 기둥.
멀린은 이 거대한 기둥을 통째로 갈라버릴 생각이었다.
“그 틈이 너무 좁고 짧아 두 명은 탈출할 수 없습니다.”
“저를 탈출시키기 위해 멀린 경이 오신 거군요.”
빈첸은 멀린의 의도를 이해했다.
스승이 아니라 멀린 페일커로 왔다는 사실까지도 이해했다.
“이해가 빨라 좋군요.”
성왕의 무덤이 무너지고 있다는 건, 이 안에서 빈첸이 충분한 자격을 증명했다는 얘기였다.
빈첸이 자격을 증명했으니, 이제는 멀린 자신이 페일커로서의 증명을 해내야 했다.
이것은 페일커가의 피에 각인된 사명이었다.
하고 싶든, 하기 싫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멀린은 차분히 말했다.
“빈첸 공자는 뛰어난 제자였습니다.”
“그게 유언인가요?”
“…….”
멀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유언이랄 것도 없었다.
신념을 위하여 죽는 것.
그것은 무인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명예다.
멀린은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고,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왜 저를 위하여 죽으시려는 건가요?”
“저는 제 이름을 기억해 준 아덴카를 위하여 예비 된 자입니다.”
헤르카와 처음 만났을 때 많은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듯, 빈첸과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멀린,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그때.
멀린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피가 들끓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배고픈 자가 음식을 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인 것처럼.
멀린은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빈첸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곧 때가 옵니다.”
빈첸도, 멀린도 알았다.
시간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다.
멀린이 노리는 타이밍.
그 순간,
멀린은 기둥을 베어낼 것이다.
아주 잠깐 밖으로 나가는 틈새가 열릴 것이다.
빈첸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는 아슬란이라면, 누군가를 희생시켜 훗날을 도모하지 않는다.’
아슬란은 꽤나 순수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데이븐의 누명을 벗기겠다, 억울하다, 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면회를 왔던 것이다.
보통의 무인들은 데이븐과의 만남조차 극도로 꺼렸는데 말이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페일커의 이름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
멀린은 의아한 듯 빈첸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이름을 기억해 준 아덴카를 위하여 예비 되었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에서 죽으면 안 된다.
그리고 멀린은, 빈첸에게 처음으로 호의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름을 기억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저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해주셔야 할 겁니다.”
좀처럼 다양한 표정을 짓지 않는 멀린이 빙그레 웃었다.
“저의 소명은 여기까지입니다, 빈첸 공자.”
어느새,
멀린은 검을 뽑은 상태였다.
그의 검에서는 빈첸이 단 한 번도 번 적 없으리만치 강렬한 뇌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멀린의 눈이 완전한 푸른색으로 변했고,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숨 또한 옅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뇌력거인의 힘을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요.”
빈첸은 멀린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사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함께 나간다.’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이 제대로 통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가능성은 있었고, 빈첸은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 * *
멀린이 기둥을 벤다.
작은 틈이 생긴다.
멀린이 뇌력을 이용하여 그 틈을 잠시라도 벌려놓는다.
그를 통해 빈첸이 빠져나간다.
이것이 원래의 그림이었다.
“멀린 경은 저를 탈출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하며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멀린이 뇌력을 운용하며 틈을 벌리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면?
빈첸이 그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 과정을 생략하면 우리는 함께 나갈 수 있습니다.”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멀린은 빈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엄청난 성장세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검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와 숙련도가 깊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설인 걸음. 설령 상위 특성인 설상(雪上) 걸음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뇌전의 힘이 담긴 특성이 가미된 설상 걸음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요.”
현대 무인들은 수많은 특성을 사용한다.
그것은 ‘가호’에서 파생된 특성들이며, 무인들은 테크트리라는 개념을 통하여 특성을 적절히 배합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빈첸은 다르다.
“저는 가호에서 특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특성을 자극해 가호를 만들었다.
현대 무인들이 가지는 특성의 ‘근원’이 가호라면, 빈첸은 특성 자체가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가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설상 걸음과 미전류 특성을 융합할 겁니다.”
쿠구궁!
진동은 점차 심해졌다.
멀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여러 번 좋은 때가 지나갔다.’
그러나 빈첸은 고집을 버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빈첸의 눈은 진심이었다.
기껏 기둥을 베어봤자, 빈첸이 나가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될 터.
그래서 멀린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공자는 설상 걸음을 아직 익히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익히려고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방법이다.
‘율리안. 네 도움이 필요하다.’
-헹!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암요.
율리안의 신기는 더없이 강해진 상태.
그에 따라 동조율이 매우 높아졌다.
율리안의 지식과 마력회로 공식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마나를 유도하는 길.
마력회로를 자극하는 타이밍과 방법.
‘이 정도로 눈에 보인다면, 할 수 있다.’
아직 닿지 않은 경지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었다.
“미전류를 운용할 겁니다.”
이곳에는 멀린도 있었다.
그는 한때 거뢰(巨雷)로 불린 무인이었고, 빈첸은 그의 실력을 충분히 신뢰했다.
“도와주십시오, 스승님.”
예전 레반 아덴카가 빈첸의 마력회로를 인도해 주었듯.
이번에는 멀린 페일커가 빈첸의 특성유도를 도와주었다.
‘이게 될 리 없잖아.’
서로 다른 가호에서 파생된 두 가지 특성을 하나로 융합하여 사용한다니.
그건 현대무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개념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빈첸의 등에 손을 댄 멀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빈첸의 몸에서 생생한 변화가 느껴졌다.
‘마력의 성질이 바뀌고.’
뇌전은 빠르고 강하다.
그 난폭하고 강맹한 기운이 ‘설상 걸음’을 일으키는 데 쓰이고 있었다.
빈첸의 눈도 옅은 푸른빛을 띠었다.
빈첸의 입에서도 멀린과 같은 결의 호흡이 새어 나왔다.
‘뇌력의 호흡.’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멀린의 유도에 따라 빈첸은 설상 걸음 특성을 완성시켰다.
빈첸의 발 부근에 치직- 치직- 푸른 뇌전이 일렁거렸다.
멀린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이 때입니다.”
페일커 검식 제7장.
뇌력 연환.
벽력종절(霹力縱絶).
멀린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단순히 빠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신속(神速).
그의 몸과 그의 검이 하나의 뇌전을 이루었다.
검을 휘둘렀다.
뇌전의 기운이 거대한 벽에 쏘아졌다.
파지지직-!
빛이 폭발하는 듯했다.
지하 공동 전체가 뇌전의 공간이 되어 뇌기가 들끓었다.
멀린의 검이 기둥을 베고 틈이 생겨났다.
파짓!
하늘에 닿을 것만 같던 거대한 기둥이 반으로 갈라졌다.
빈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설상 걸음!’
멀린이 페일커 검식과 뇌력거인의 힘을 연환하여 사용하였듯, 빈첸도 그렇게 하였다.
뇌력을 머금고 설상 걸음을 펼치자 빈첸의 몸이 빛처럼 쏘아졌다.
‘틈이 보인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멀린 경은……!’
하늘 높이 솟구쳐 지면에서 꽤 멀어졌다.
땅을 보니 먼지가 자욱이 일고 있었다.
‘성왕의 무덤’은 무너졌다.
‘나오지 않았다.’
멀린은 빈첸을 뒤따라 나오지 않은 듯했다.
분명히 시간이 있었을 텐데.
‘혹시라도 내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일부러 힘을 더 소모했다.
멀린은 빈첸을 위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 같았다.
빈첸의 몸이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멀린 경……!’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크게 아프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받아준 것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오늘을 위하여 내가 있었던 것 같네, 멀린 오빠.”
헤르카의 오른손에는 퀘벨가(家)의 독문무기.
살아 숨 쉬는 채찍이라고도 불리는 ‘독사’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