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1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존재하는 법이거든.”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힘은 완전한 어둠에서 나온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를 그림자의 일족이라 믿고 있는 어둠의 일족인 셈이지.”
이것은 카진이 직접 가르쳐준 것이었다.
카진을 비롯한 사미온의 직계들은 아스비온 일족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가장 완전한 어둠이라도, 가장 희미한 빛을 이길 수 없어.”
저들은 스스로의 힘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러한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율리안이 물었다.
-형님, 안 베고 뭐해요?
‘안 베는 게 아니라 못 벤다.’
그제야 율리안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지고 말았다.
빈첸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으나 지금 빈첸의 상태는 마나를 일으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이게 허세라고요? 나마저도 속였어요?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빈첸의 자기통제가 철저했다는 소리였고, 이 정도면 빈첸은 빈첸 자신조차도 속이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얘기였다.
‘뭐, 뭐 이런 영감님이 다 있어.’
율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빈첸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으니까.
지금은 대화로 시간을 벌고 있는 중이었다.
빈첸이 말했다.
“가장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너희는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가장 강할 때에 나를 죽이지 못했으니, 내게는 여유가 생겼고 결국 이렇게 됐지.”
그 작은 틈을 비집어서 빛을 만들었다.
빛을 마주한 어둠의 일족은 일시적으로 힘이 약화되고 당황했다.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빈첸은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오, 오지 마.”
빈첸은 무감정한 눈으로 영살자를 내려다보았다.
말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나, 나를 죽이면 넌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난 길잡이라고.”
“무슨 뜻이지?”
“나를 없애면 성왕의 무덤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
빈첸은 저 말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영살자의 다리를 베었을 때, ‘성왕의 무덤’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천장 여기저기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어.”
“…….”
“아까 동생이 가르쳐주지 않았어? 이곳은 전진만 가능한 곳이라고. 돌아가려면 길잡이의 힘이 필요해.”
“그런가.”
“나를 살려준다면 순순히 성배를 넘기고, 너를 바깥으로 보내줄게. 목숨만 살려줘.”
“성배는 너희들의 영역에 있나?”
“맞아. 우리는 오랜 시간 그것을 지켜왔어.”
“누가 그걸 명령했지?”
“성왕과의 맹약이었어.”
빈첸이 고개를 저었다.
“성왕이 아니야.”
“……뭐?”
저들은 진정한 의미의 수호자가 아니다.
“정말로 성왕과 맹약을 맺었다면,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을 때 성배를 넘기라는 전언도 함께였겠지. 맹약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그, 그건……!”
성왕과의 맹약이 아니라,
사미온의 세뇌였을 것이다.
“너희는 그저 성배가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을 방해하도록 설정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계의 권능을 지닌 일족이라고 해도 500년을 살 수는 없다.
이제야 이들의 정확한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너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리고 의지만 남아 의미 없이 성배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야.”
“아니야!”
오래된 가디언들이 그렇다.
맹목적인 의지만 남는다.
“아주 오래전 성왕은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성왕과 아슬란.
둘은 오늘을 예견했다.
“어쩌면 사미온도 그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르겠군.”
아슬란만 오늘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사미온도 그랬던 것 같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단, 아슬란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만약 아슬란만큼 확신했더라면, 껍데기만 남은 ‘영살자’가 아니라 보다 강한 대책을 준비해놓았겠지.
영살자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너.”
무척이나 화가 난 가운데 그녀도 눈치챘다.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구나.”
잘려나간 다리에서 검은색 기운이 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온전한 다리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했다.
마치 의족 같은 형상이었다.
그녀가 몸을 숙였다.
“죽여줄게.”
용수철처럼 튀어 빈첸과의 거리를 좁혔다.
영살자의 우검(右劍)이 빈첸의 배에 닿기 직전, 빈첸이 하나의 기운을 운용했다.
“네 주인을 알아보아라.”
사미온 검식 제1장.
유검제강(柔劍制剛).
빈첸의 몸에서 적황미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센의 대장간에서 홍련을 집어삼켰던 불꽃을 막아내었던 유검제강.
그 검의 마력이 부드러이 흘러 영살자의 검을 막아내었다.
“다, 다, 다, 당신은!”
빈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했어.’
대화로 시간을 번 덕택에 유검제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유검제강과 적황미력을 느낀 영살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그분의 후예이신가요?”
“그분?”
순간,
팍!
피가 튀었다.
영살자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시, 시, 시, 싫어!”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목을 연거푸 찔렀다.
“싫어! 꺄아아악!”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영살자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빈첸은 묵묵히 영살자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 시신은 왜 안 없어질까요?
멜리논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의 이 영살자는 시신이 남았다.
‘저들은 7의 진실에 3의 거짓을 섞었다.’
그러면 거짓도 진실 같아진다.
오히려 10의 진실보다 더욱 진실 같을 때도 있다.
“저 영살자는 스스로를 길잡이라고 했고, 돌아가라면 길잡이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어.”
어찌 됐든 ‘길잡이의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우리는 이미 봤잖아.”
빈첸은 영살자의 시신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의 시신들과 마찬가지였다.
검지가 기이한 형태로 구부러져 있었다.
“아까의 길잡이가 하던 것을.”
빈첸은 품 안에서 국화꽃 한 송이를 꺼냈다.
-그, 그건 언제 준비했어요?
아까 잿더미를 완전히 불태워 없앨 때 주웠다.
멜리논의 품 안에는 하얀 국화꽃이 한 송이 더 있었고, 이상하게도 불에 잘 타지 않았었다.
그래서 손싸움의 기예를 응용하여 주워 놓았다.
빈첸은 영살자의 시신 앞에 국화꽃을 내려놓고, 멜리논이 그랬던 것처럼 묵념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까 멜리논이 했던 말 기억하지? 정확한 표현을 말해봐.’
율리안은 초인적인 기억력으로 멜리논의 말을 정확히 읊었다.
-오늘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아이도 기쁘게 소멸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아이도 기쁘게 소멸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것이 키워드였다.
아까 해골이 움직였던 것처럼, 영살자의 왼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선이 되어 결계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빈첸이 고개를 들어 선을 확인했다.
‘성배를 찾는다.’
이 공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영살자의 말대로 이곳은 분명히 무너진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직감했다.
‘아슬란과 성왕은 내가 찾아올 것을 확신했으니.’
그렇다면 다음 안배도 반드시 준비해놓았을 것이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놓았을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빈첸 자신의 몫이었다.
‘성배가 있는 곳에 안배가 있을 거야.’
빈첸은 주저 없이 영살자들의 ‘영역’으로 향했다.
* * *
결계를 통과했다.
커다란 지하 공동이었고, 가운데에는 공동을 떠받치는 듯한 커다란 기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형님. 저기 뭔가가 있어요.
기둥 아래.
작은 제단 같은 것이 하나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관’이었다.
‘별다른 트랩은 없는 것 같고.’
빈첸은 관 앞에 섰다.
-장난 아니네요!
‘뭐가?’
-어마어마한 신기가 느껴져요. 호흡 좀 세차게 해봐요, 형님.
빈첸은 신기 자체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율리안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우와, 나 진짜 신 되는 느낌이다.
율리안은 굉장히 들떴다.
그와는 별개로 빈첸은 관을 잠시 관찰했다.
투두둑.
천장에서 돌가루가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많지 않겠어.’
율리안은 강력한 신기를 느끼고 있다.
관에는 별다른 함정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연다.’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빈첸이 조심스레 관의 뚜껑을 열었다.
‘사람?’
그 안에는 시신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보존마법처리 되었는지 깨끗한 상태였다.
-으, 으아아아악! 시체가 일어난다!
시신이 몸을 일으켰다.
빈첸은 마나흐름을 통해 이 시신이 마법으로 구현된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시신이 입을 열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인가.”
눈동자에 영혼은 없었다.
미리 각인되어 있는 말을 꺼내는 듯했다.
“이 날이 왔는가.”
“…….”
“아슬란의 말이 맞구나.”
그의 오른손에 작은 지팡이가 하나 생성되었다.
“이것을 받으라.”
빈첸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새어 나오는 작은 지팡이였다.
“훗날, 그것이 그대를 천과(天果)로 안내할 것이다.”
지금 빈첸과 율리안이 애타게 원하고 있는 ‘천과’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천과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것을 받으라.”
그의 왼손에 작은 황금잔이 생성되었다.
성배였다.
율리안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마어마한 양의 신기에요. 저걸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마셔요, 형님. 지금 이 순간에도 날아가고 있어요.
빈첸은 의심하지 않고 성배에 담긴 성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신체 자체에 별다른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율리안의 존재감이 굉장히 커졌다.
율리안에게 막대한 신기가 전달되고 있었다.
“나의 할 일을 다 하였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음이다. 내게 와주어 고맙구나. 나의 후예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크게 감사할 것이다.”
이미 죽은 성왕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으나 빈첸은 성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성왕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그대의 앞날을 축복한다.”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쩌적-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이 공간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쾅!
천장에서 거대한 돌무리가 떨어져 내렸다.
들어왔던 입구는 완전히 막혔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구나.’
-형님,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기껏 신기를 잔뜩 획득했다.
그런데 여기서 죽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무 걱정 마라.’
아슬란과 성왕은 오늘을 예비했다.
사미온도 사미온 나름대로 오늘을 대비해서 영살자를 배치했다.
이곳을 무너뜨리는 건 아마 사미온의 방식이겠지.
‘이곳을 안배할 정도의 머리가 있다면 사미온의 견제도 예상했을 거고.’
그 견제가 그렇게 고도화된 방법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무너뜨릴 것쯤은 예상했을 것이다.
무너뜨리는 것처럼 쉽고 간편한 대비책은 없으니까.
“결국 다음 패는 존재하기 마련이거든.”
빈첸은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강맹하고 익숙한 기운을.
신기를 느낄 수 없어도 마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승님?”
빈첸의 스승이자 페일커의 이름을 이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