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68화
베르사가 재차 확인했다.
“기껏 승급시험 일정을 잡아 달라 부탁해놓았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미루어 달라?”
“그렇습니다.”
“이미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에게 서신이 전달되었고, 그렇게 하겠다는 답신이 도착했다. 그것을 무르는 것은 요새장의 재량에 달려 있다.”
베르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내가, 나라는 외압을 사용하여 붉은 요새에 요청을 했다.”
그것은 아덴카를 잘못 관리한 베르사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자, 빈첸에게 내리는 칭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는 건 모양새가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네가 천과(天果)를 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천과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붉은 요새의 보물이다.
천과를 직접 얻은 본인들도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침묵했기에, 획득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천과를 얻었던 이들은 ‘가장 빠른 승급을 했던 무인’들이었고,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무인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네가 최단 기간 승급을 원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승급시험을 미루어달라는 것이냐?”
“그것은 제가 직접 헤르카 경에게 설명하겠습니다.”
베르사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찡그렸다.
겉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맹랑하구나.’
빈첸이 왜 총책임자 헤르카에게 직접 설명하겠다는 건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무르는 것은 요새장의 재량에 달려 있다.
베르사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은 헤르카에게 넘어갔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빈첸은 베르사가 아닌, 헤르카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 맞았다.
베르사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재미있는 녀석이야.’
베르사가 한 가지를 물었다.
“헤르카는 최근 마물 토벌 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더구나. 그건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저도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그분을 뵌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나와 헤르카 사이에 오간 서신을 무르기 위해서, 요새장이 직접 찾아와 새로이 날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아무리 빨라도 24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헤르카는 귀찮은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올 겁니다.”
베르사가 가볍게 웃었다.
“자신만만하구나. 네가 헤르카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머니께서는 헤르카 경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것이다. 마물 토벌이 천직인 자이니.”
빈첸은 베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
“내기?”
베르사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덴카의 후계자 후보들 중 자신에게 내기를 제안했던 사람은 없었다.
“무엇을 걸겠느냐?”
“내기에서 패한다면 어머니께 신임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따로 걸 것이 없습니다.”
베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았다.
빈첸이 스스로 베르사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아덴카의 안주인에게 내기를 제안하려면 이긴다는 확신이 있을 때여야만 했다.
혹시라도 진다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럼 넌 무엇을 원하느냐?”
“어머니께서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례?”
“어째서 승급 시험을 연기해 달라는 것이냐 물으셨으나 저는 대답하지 않았으니까요.”
‘총책임자는 헤르카다’라고 말한 것을 정확히 짚되,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참신한 방법이었다.
“무척 즐거운 제안이구나.”
그래서 기다려보았다.
24시간이 지났고, 헤르카가 아덴카의 본가를 찾았다.
* * *
헤르카가 아덴카의 남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길어도 1시간 내로 이곳을 찾을 것이었다.
“네가 이겼구나.”
베르사가 웃었다.
“네 무례를 용서하마.”
“감사합니다.”
“어째서 헤르카가 올 것이라 확신했느냐?”
“어머니께서는 헤르카 경을 서류로 접하였고, 저는 눈으로 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류만 보면 헤르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매일같이 솔선수범하여 위험한 마물들을 토벌하러 다닌다.
그러나 빈첸은 알고 있었다.
헤르카는 사실 마물토벌에 열정을 쏟는 게 아니라, 붉은 요새의 행정처리를 하기 싫은 것이다.
“그토록 마물토벌에 열심인 자라면 제철 생크림 케이크를 먹기 위해 휴가를 내지는 않았겠지요.”
“제철 생크림 케이크?”
어쨌든 내기는 빈첸이 이겼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헤르카입니다.”
“들어오도록.”
헤르카가 들어오자 베르사는 책상 위의 종이를 가리켰다.
“전후 사정은 오면서 들었을 테고, 그대가 수락한다면 사인을 하면 된다.”
“그러죠, 언니.”
“나는 요새장의 언니가 아니다.”
거기까지 말한 베르사는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버렸다.
빈첸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빈첸. 뭐가 그렇게 재밌어?”
헤르카는 성의 없는 태도로 서류를 읽어보았다.
승급시험을 미룬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어머니는 헤르카 경이 오지 않을 것이라 하셨거든요.”
“그게 왜 웃겨?”
“헤르카 경은 어머니께 미움받고 있나요?”
“몰라, 그런 거 같아.”
헤르카는 귀찮은 듯 서류에 사인했다.
“자. 됐지?”
“뒷장에 중요내용이 있는데 안 살펴보실 건가요?”
“뭐 대충 중요한 거 있겠지.”
그녀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그냥 대충 오케이하면 될 걸 다들 참 복잡하게 산다니까. 절차니 행정이니.”
헤르카가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빈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상하네. 베르사 언니는 너처럼 구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왜 언니는 널 좋아하는 것 같지?”
“어머니께서 절 좋아하시나요?”
“안 좋아하면, 그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 언니가 이런 일을 진행해 줬을 것 같아?”
헤르카는 빈첸의 볼을 주욱- 잡아당겨 보았다.
“귀엽게 생겨서 그런가? 도대체 비결이 뭐냐?”
“헤르카 경은 어머니의 호감을 사고 싶은 건지요?”
“엉. 근데 반쯤 포기했어. 20년을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더라고. 난 그 언니 좋던데, 그 언니는 날 영 싫어한단 말이지.”
빈첸이 다시 쿡쿡 웃고 말았다.
“나중에라도 이유를 찾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됐어, 이제 와서 뭘. 자. 서류에 또 형식이니 뭐니 하면서 구구절절 어려운 말들 적혀 있겠지?”
빈첸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일의 자초지종과 서류의 내용에 대해 첨언 설명을 하려고 했다.
“됐어. 설명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하지만…….”
“뭐냐, 그 표정은?”
빈첸과 헤르카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헤르카는 빈첸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냈다.
“야. 너 내가 우리 성실한 바르곤 경에게 모든 걸 다 떠넘기고 싶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아니었습니까?”
“죽을래?”
“붉은 요새의 요새장께서 생도를 살해하면 무척이나 큰일이 벌어질 텐데요.”
“끙. 보통 생도는 요새장한테 좀 쫄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저한테 실망하시지 않겠습니까?”
“…….”
헤르카는 입을 다물었다.
“쪼그만 게 말은 잘하네. 아무튼, 뒷장 내용은 다 봤어.”
빈첸은 흠칫 놀랐다.
‘뒷장을 언제 본 거지?’
빈첸은 헤르카의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했다.
헤르카가 하암- 크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까 나는 붉은 요새 총책임자의 권한으로 2급 신관 둘란 경의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야. 당연히 임무 수행자는 빈첸 너고.”
빈첸이 아무 생각 없이 베르사에게 승급 시험을 미뤄 달라 요구한 건 아니었다.
2급 신관 둘란의 의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란은 가이아 대신전으로 향하는 길에 밀착 호위를 요청했다.
호위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성왕의 무덤’에 출입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준다고 했다.
무려 2급 신관의 공식 요청이니, 빈첸에게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근데 너도 알지? 지금 시기의 2급 신관들이 가장 많이 피살되는 거?”
이제 2급 신관들의 경합이 벌어진다.
가이아 신전 소속의 2급 신관들이 가이아 대신전에 모이는 중이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암살시도가 있었다.
“일개 9급 생도가 맡기에는 지나치게 위험도가 높은 임무야. 혹시라도 피살되면 그 책임은 누가 져? 또 그렇게 중요한 인물에게 9급 생도 나부랭이를 붙여줬다 어쨌다 하면서 나를 들들 볶으며 괴롭혀댈 거 아냐?”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가야겠다, 이 말이지. 관리자로서.”
“바르곤 경께서 반대하실 텐데요.”
“바르곤 경이? 왜?”
“오는 겨울에 2급 생도들의 경합이 있잖아요.”
그들도 경합과 승급시험을 통해 1급으로 승급한다.
이 과정에 총책임자도 깊이 관여하는 게 관례였다.
“바르곤 경은 엄청 성실하잖아. 흐흐. 혼자서도 잘하는 친구야.”
“……바르곤 경이 책상을 쾅 내리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군요.”
“그래서 대(對) 마법 저항 속성 마정석을 책상에 심어놨어. 그래야 책상 안 부수고 더 열심히 일하지.”
헤르카는 빈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무튼 잘했다. 대단해.”
“대화에 맥락이 없는 건 제 기분 탓입니까?”
“그런 말 자주 들어.”
헤르카는 히히 웃고서 말을 이었다.
“그 재수 없는 늙은이는 죽어도 싸지.”
“틸로반을 무척 싫어하셨나 보군요.”
“어. 나를 첩으로 삼고 싶어 했거든.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더라니까. 더러운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렇군요.”
그러나 빈첸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헤르카가 틸로반을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틸로반과 홀리만 장로가 친구 사이였다는 건 왜 가르쳐주셨나요?”
“내가 그런 걸 가르쳐줬어? 언제?”
“…….”
빈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헤르카도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루가 흘렀다.
틸로반 장로의 흑마법과 관련한 조사를 끝마친 둘란은 경합을 위해 ‘가이아 대신전’으로 마차의 방향을 잡았다.
베르사가 직접 나와 둘란을 배웅했다.
“빈첸을 지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성왕의 힘을 계승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자신 있습니다. 빈첸은 충분히 저를 지켜줄 수 있을 겁니다.”
아덴카 본가로부터 가이아 대신전까지 마차로 일주일 정도 걸린다.
길이 잘 닦여 있고 치안 좋은 도시들을 지나기에, 사실 큰 위험은 없었다.
“마치 빈첸에게 추천서를 써주기 위하여 일부러 지목 의뢰를 하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요.”
일주일이 흘렀다.
다행히 암살시도는 없었다.
둘란은 무사히 대신전에 입전했고, 덕분에 하루가 지나지 않아 ‘성왕들의 무덤’에 입장할 수 있는 추천서도 받을 수 있었다.
“시시하게 그냥 지나왔네. 습격을 좀 기대했는데 아쉽다.”
“헤르카 경이 함께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돌았으니까요.”
“요즘 도적들은 배포가 없나 봐.”
“그럼 이제 붉은 요새로 복귀하십니까?”
“그래야지.”
헤르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어지간히도 복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데 성왕의 무덤. 마침 가는 길이잖아?”
빈첸이 품 안에서 지도를 꺼냈다.
“꽤 많이 돌아…….”
헤르카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지도가 산산조각이 났다.
“자아! 길은 내가 잘 알아. 내가 안내해 줄게.”
헤르카가 앞장서서 걸었다.
빈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율리안. 네 생각은 어때?’
율리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율리안과 나눈 대화는 몇 마디에 불과했다.
‘그냥 일이 싫어서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지는 않구나.’
이것은 본능적인 육감이었다.
헤르카에게는, ‘성왕의 무덤’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것을 알아차리면, 네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풀어주어야 할 것 아니냐.’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이틀이 흘렀다.
성기사들이 관리하고 있는 성왕의 무덤에 도착했다.
추천서를 내밀자 어렵지 않게 안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헤르카는 호오- 하고 감탄했다.
“저렇게 무지막지한 노동력의 낭비로 무덤 따위나 만들다니.”
돌로 만든 입구가 보였다.
저곳이 진정한 의미의 ‘성왕의 무덤’이었다.
성배와 성수가 존재한다고 알려진 곳.
입구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근데 너, 진짜로 들어갈 거야?”
“그러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들어간 사람은 있어도, 나온 사람은 없는 거 알지?”
“예.”
“좋아 좋아, 우리 생도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잘 갔다 와라. 붉은 요새 9급 생도의 잘남을 한 번 자랑해 보자고.”
빈첸은 망설임 없이 어두운 입구를 향해 걸었다.
헤르카가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빈첸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난 이후 헤르카가 작게 말했다.
“정말로 아덴카의 성을 가진 아이가 성왕의 무덤에 들어갔어.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