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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67화 (67/184)

환생의 정석 67화

마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차렷자세를 취했다.

“무례를 범했네요.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마리아는 그제야 온몸에 힘을 풀었다.

“빈첸 공자와 도대체 어떤 사이이신가요?”

“빈첸 공자는 저에게 많은 배움을 준 친구입니다.”

“둘란 신관님께 배움을 주었다고요?!”

빈첸 공자는 이제 겨우 열넷인걸요!

마리아는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세상에 그 어떤 열네 살이 가이아의 2급 신관에게 가르침을 준단 말인가.

“빈첸 공자가 어떤 가르침을 주었나요?”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따로 가르쳐준 것은 없습니다.”

빈첸이었다.

마리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특종이 굴러들어오는구나!’

빈첸과 둘란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

마리아의 머릿속에 수많은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둘란 신관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공자.”

빈첸은 품속에서 둘란의 명패를 꺼내 들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것 덕택에 저는 수많은 치료를 대가 없이 받을 수 있었고, 제 친구인 시젠의 팔도 온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빈첸 공자가 내게 준 도움이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열정적인 태도로 메모지에 둘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바빠졌으나, 빈첸과 둘란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친구분이 잘 회복되어서 다행입니다.”

빈첸은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저한테 조금 더 감사하셔야 하겠는데요?”

“네?”

“새로운 것을 드리려 하거든요.”

그는 품 안에서 또 다른 나무 명패를 하나 꺼냈다.

“그 명패를 받고, 이 명패를 드리지요. 조금 더 감사하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마리아가 안경을 고쳐 썼다.

‘설마 저건 2급 신관의 명패? 심지어 금색 글자잖아?’

이것은 대중에게 공개된 내용은 아니었다.

2급 신관부터는 이름의 색깔이 조금씩 달랐다.

‘최상위 신관을 예우하는 의미로 황금색을 사용한다는 정보가 있었지.’

황금색 글자로 ‘2급 신관 둘란’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

그것을 건넸다.

타이밍을 재던 마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러한 내용을 기사로 다루어도 될까요?”

특종을 마주한 마리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마리아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 둘란과 빈첸은 둘만 남게 되었다.

빈첸이 물었다.

“제게 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건가요?”

“빈첸 공자가 올곧은 아덴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찌 확신하시나요?”

사실 빈첸도 궁금했다.

과거에 좋은 모습을 한 번 보여준 걸로, 둘란이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이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저는 성왕(聖王)의 힘을 계승한 신관 중 한 명입니다.”

“성왕의 힘이요?”

성왕.

그는 500년 전에 가이아 신전을 세운 영웅이었고, 가이아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였다.

가이아 신전에서는 성왕이 신이 되었다 믿고 있기도 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힘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무인들이 가지는 안목 특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둘란은 거기까지만 말한 뒤, 속으로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보입니다. 빈첸 공자의 몸에서는 찬란한 기류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저는 이토록 밝은 기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왜 빈첸에게서 이러한 기운이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둘란이 빙그레 웃었다.

빈첸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둘란이 자신에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약간 시간이 흐른 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한 가지만 드려도 될까요?”

“2급 신관의 명패를 지니셨으니, 무엇이든 부탁해도 됩니다.”

빈첸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시절,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것들을 혼자서 해결했었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하는 것은 빈첸에게 꽤 큰 고역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서는 사미온을 극복할 수 없다.

‘율리안의 신기를 회복시켜야 해.’

정신적인 연결고리가 꽤 약해졌다.

아마도 율리안의 신기가 상당히 고갈되었기 때문이리라.

지금도 율리안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사람으로 치자면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신관이 아닌 자가 신기(神氣)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기록을 봤습니다. 사실인가요?”

“…….”

둘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의 힘을 ‘신성력’이라 부른다.

신기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말이었다.

“공자는 신기가 얻고 싶습니까?”

“예.”

“어째서입니까?”

“제 몸이 신기를 필요로 하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붉은 요새에 파견 나와 계신 신관님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몸이 많이 회복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일시적이긴 했지만요.”

그때 이후로 율리안의 신기가 조금 회복되는 걸 느꼈었다.

이후 그 신기가 다시 옅어지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외부로부터 신기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부상 회복을 위한 신성력이 아닌, 특별히 신기를 얻고 싶다는 말이로군요.”

둘란은 턱을 쓰다듬었다.

‘성왕의 무덤’ 어딘가에 존재하는 ‘성배’를 찾아, 그 안에 담긴 ‘성수’를 마시면 인간도 신기를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어디서 기록을 보았나요?”

“3급 서고에서 봤습니다.”

“책을 열심히 읽으시나 봅니다.”

무인들은 보통 역사나 오래된 기록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무학뿐이니까.

성왕의 무덤이나 성배와 관련된 기록도 사실 비밀이랄 것은 없었지만, 대다수의 무인들은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 방법으로 신기를 얻은 사람이 500년간 단 한 명밖에 없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까?”

“네. 저희 가문의 초대가주께서 성배를 획득하셨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허황된 전설로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둘란이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성배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은 태양검제가 유일합니다. 그 말은 즉, 앞으로도 성배를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는 얘기겠지요.”

아슬란이 발견했고, 그가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후대의 그 누구도 성배를 발견하지 못했다.

빈첸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신기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500년 전에도 그랬을까요?”

“500년 전의 기록에도 신기라는 말보다는 신성력이라는 말을 훨씬 더 많이 썼습니다. 기록상 ‘신기’가 등장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군요.”

그렇다는 건 일부러 ‘신기’라는 말을 썼다는 뜻이었다.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왕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가이아 신전을 만든 영웅인데요?”

“성왕은 대악마 데이븐과의 대전쟁 때에 순교하셨습니다. 이후 가이아 신전의 힘은 약화되었고, 대악마의 추종자들이 수많은 기록을 불태웠습니다. 가이아 신전이 대악마 토벌에 앞장섰던 만큼이나 그 추종자들은 가이아 신전을 극도로 혐오했거든요.”

둘라은 한참 동안이나 생각했다.

‘내가 정보를 전해줄 때마다…….’

빈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더욱 짙어졌다.

성왕.

아슬란.

성배.

신기.

이러한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빈첸의 영혼이 빛나는 느낌이었다.

여러 번 확인해 보았으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다.

“죽음을 경험하여 신과 만난 자만이 성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 말을 전하고 나자 둘란은 눈을 감을 뻔했다.

빈첸의 몸에서 찬란한 광채가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저와 빈첸 공자가 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빈첸은 예감이 아니라 확신을 가졌다.

‘분명히 나를 염두에 두고 남긴 말이야.’

죽음을 경험한 자.

신과 만난 자.

자신을 일컫는 말이 분명했다.

500년 너머에서 기록이 전달되었다.

“그곳에 저도 갈 수 있습니까?”

“교단의 추천서만 있으면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간 자는 많았다.

그러나 나온 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추천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빈첸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아슬란이 무엇을 남겼는지.

왜 ‘성왕의 무덤’을 안배하였는지.

‘500년 전의 너는 무엇을 보았던 것이냐?’

* * *

그날 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세리?”

세리가 빈첸의 방에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저녁은 늘 제가 챙겨드렸잖아요.”

그녀의 오른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직접 만든 샌드위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스승님이 특별히 보존마법을 걸어주셨어요.”

“이걸 전해주러 왔다고?”

“네.”

세리가 활짝 웃었다.

“어서 드셔보세요. 이번에는 특별히 직접 만든 산딸기잼을 넣었어요. 베릴 산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산딸기로 만들었어요.”

“…….”

세리는 빈첸이 샌드위치를 베어 먹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빈첸이 식사를 끝내자 세리는 또 밝게 웃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아요.”

“…….”

빈첸은 여전히 이 내리사랑이 익숙하지 않았다.

붉은 요새에서 이곳까지, 세리 혼자 오기에는 결코 쉽지만은 않은 곳이었다.

이동관문을 여러 번 타야 한다는 건 둘째 치고, 최단/최소 거리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도 왕복 48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겨우 이걸 주려고 아덴카가까지 나를 찾아왔단 말이야?”

“겨우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서운해요.”

세리는 짐짓 서운한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빈첸은 괜스레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었다.

“미안해. 화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저에게는 이게 행복인걸요.”

48시간이 걸려 찾아와서 샌드위치를 주었다.

그리고 30분 만에 돌아가겠다 말했다.

“이만 돌아가 볼게요. 조금 더 있고 싶지만 스승님과의 약속시간이 있어서요.”

“…….”

“아참, 내 정신 좀 봐. 멀린 경이 이걸 전해주라고 했어요.”

세리가 품 안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마정석?”

“네. 행운을 불러다 주는 돌이래요. 범용 마정석인데 지금은 제가 부적석으로 만들었어요.”

범용 마정석은 마나를 불어넣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마정석이었다.

전용 마정석처럼 뛰어난 효능은 없지만 범용성이 좋았다.

“보여드릴게요!”

세리는 마치 자랑하듯, 마정석 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바르곤 경에게 잘 배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빛이 나요. 예쁘죠?”

“예쁘네.”

“맘에 드세요?”

“응, 고마워.”

마정석이 예쁘다기보다는, 마정석을 들고 활짝 웃는 세리의 모습이 좋았다.

“그럼 가볼게요! 다음에 만나 뵐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밥도 꼭 잘 챙겨드시구요!”

“그래, 세리도 몸 조심해.”

빈첸은 멀어지는 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첸의 손에는 세리가 꼭 쥐어 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겨우 30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그 거리를 달려오다니.’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빈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세리가 돌아가고 난 이후, 빈첸은 베르사를 찾았다.

“어머니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베르사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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